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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해완's MVQ

살기 좋은,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서 튀어!!

by 북드라망 2015. 7. 1.


자유를 상상할 자유





쿠바로 튀어?


얼마 전, 친구들에게 학교 졸업하고 나서 쿠바에 갈 것 같다고 고백했다. 예상대로 다들 깜짝 놀랐다. 이 쿠바행은 나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치 못한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친구들의 격한 반응이었다. 남미를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싶었고 또 나를 뉴욕으로 보내준 연구실에서도 쿠바에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결정하게 되었다고 이유를 설명해주어도 소용 없다. 그들은 계속 딴지를 걸었다. 뉴욕에 있다가 가면 참으로 심심하겠다는 둥, 쿠바는 그냥 여행으로 가라는 둥, 너에게 반미주의자(?!) 기질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둥... 놀랍게도, 쿠바에 대해 불편해하는 것은 남미친구들이라고 덜 하지 않았다. 쿠바가 아무리 혁명 이후로 독재의 길을 걸었다지만, 체 게바라에 대한 향수가 물씬한 남미 대륙인들까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사실 이 반응은 쿠바 자체에 대한 반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사랑도 겹쳐져있다. 유학생인 자신들처럼 미국에서 뿌리내리고 사는 게 내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튀어나가버릴 줄은 몰랐던 것. 저들의 소스라치는 반응에는 ‘돈 들여서 힘들게 미국까지 왔는데 학교 졸업한 후 인턴십 뛰고 취직해서 이 자유로운 나라에 뿌리내릴 생각을 해야지, 왜 저 구석진 섬나라로 기어들어 가느냐’라는 소리 없는 외침이 숨어 있었다.


'힘들게 미국까지 왔는데 이 자유로운 나라에 뿌리내릴 생각을 해야지!'라는 소리 없는 외침..




미국이 아름다운 나라인 이유


떠나는 데 이유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아직 떠나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이 격한 반응을 보면서 거꾸로 묻게 되었다. ‘왜 굳이 미국을 떠나야 하느냐’는 물음을 저렇게 격렬하게 할까? 어째서 거꾸로 ‘왜 굳이 미국에서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은 쉬이 하지 않는 것일까? 답이야 뻔하다. 미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공식 때문이다.


이 공식을 뒷받침하는 가장 첫 번째 근거는 이 나라가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다. 아메리카, 자유의 땅이자 사생활의 천국! 나도 저 공식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들이 있다. 미국 내 담론에 점점 노출되고 또 감정이입이 될 때 특히 그렇다. 억압받던 소수자들이 미국에 와서 자유를 되찾는 드라마는 생각보다 효과가 아주 좋다. 아프리카에서 여성 할례를 받고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흑인 모델의 이야기, 중동에서 탈레반에 반대하는 글을 블로그에 썼다가 테러 당한 십대 소녀의 이야기, 전족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국 할머니의 이야기...... 이들의 상처가 부각될수록 미국을 상징하는 개인의 자유도 더 위대해보인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그래도 나는 테러 당할 걱정 없이 안전하게 살고 있지. 이 얼마나 다행인가.





쿠바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하나다. 최근 오십 여년 만에 봉쇄 정책을 풀고 쿠바와 외교 관계를 다시 수립하고 있는 미국은 쿠바의 동향을 관찰하는 기사를 매일매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모든 기사에 약속하기라도 한 듯 깔려 있는 메시지가 하나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쿠바인들의 인권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터넷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슬픈 쿠바 청소년 이야기가 슬쩍 등장한다. 그러면 기사를 읽다가 또 이렇게 반응하게 된다. 그렇지, 그래도 내가 쿠바인들처럼 중앙 정부에서 감시하는 인터넷 쓰려고 한 시간에 $5씩 내야하는 건 아니지. 이 얼마나 다행인가.


특히, 남미에서 올라온 이민자 1세대 아줌마 아저씨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저절로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다. 아가씨, 거기 베네수엘라 촌구석에는 쌀도 없고 과일도 없고 옷도 없어, 그래서 죽기살기로 여기 온 거야...... 이 나라는 이 정도면 얼마나 살기 좋은지, 노력만 하면 먹고 살 만 하거든...... 이 정도면 6.25 직전에 태어난 우리 할머니 옛날 이야기를 방불케하는 수준이다. 이 이야기가 은근히 ‘쿠바가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 줄 아느냐 이 철 없는 아가씨야’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만 같아 가슴이 괜히 뜨끔하다. 경험도 없으면서 아는 척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얼버무리며 동의하고 만다. 그...그렇죠? 역시 배는 안 고픈 게 좋겠죠?




현장의 역설


나도 전통을 명분으로 여성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전족을 안 해도 되는 시공간에서 태어난 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누구나 테러를 걱정하지 않고 밤잠 푹 잘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고프기도 싫고 인터넷을 못 쓰고 통제 당하는 삶은 악몽과 같다.


그러나 솔직해지자. 이런 나쁜 사례들이 역으로 미국의 자유를 증명해준다고 할 수는 없다. 너네들이 나쁘니까 우리가 더 잘났다는 논증은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뉴욕은 미국 안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장소로 손 꼽히는 곳이지만, (웃자고 하는 소리로 뉴요커들은 텍사스 주 사람들을 같은 나라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이 ‘리버럴한’ 뉴욕에서도 나는 저 공식을 확신하지 못했다. 오히려 좀, 많이 깼다.


가령 이런 것이다. 미국은 아이가 부모를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만큼 아동 인권에 깨어있는 나라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쉬이 힘든 비상식적인 일이 태연히 벌어진다. 어떤 부모는 길거리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면서 갓난아기 바로 위에서 담배를 피우질 않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던 엄마는 4살 배기 아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자 손을 세차게 때려 애를 울리고 신경 꺼버리질 않나, 학교에서는 내 몸집의 두 배 되는 아줌마가 조막만한 어린 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면서 소리치는 광경도 보았다. 학생 인권도 마찬가지다. 체벌을 금지시킨 이 나라의 공립 고등학교는 거의 정글판 같다. 불량 학생들의 눈 밖에 난 선생들은 살얼음판 걷듯 수업에 들어가고, 학생들 패싸움에서 칼부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 한 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온 힘을 다해 살아남았다’고 표현했다.


그 뿐일까? 이곳은 인종 차별 금지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곳이지만, 소수자들의 역차별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한 번은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안 시키고 핸드폰만 충전하면서 낮잠을 자는 흑인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종업원이 몇 번이나 커피 시키지 않으면 나가달라고 부탁했지만, 마침내 잠에서 깬 그 청년이 종업원의 하얀 얼굴을 보고 처음 했던 말은 ‘차별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소낙비가 쏟아지고 지하철 노선이 바뀌어도 인종차별주의자를 탓할 기세다.


역설은 끝도 없다. 세계 명문대를 여럿 갖춘 미국이지만 이곳 사회인문부 대학생들은 책 <돈키호테>의 제목조차 아예 모르기도 하고, 전 세계 자원의 50%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조잡한 ‘환경 캠페인 비디오’에 순진하게 감동받기도 하고, 외모 차별을 금지한 나라에 세상 어느 곳보다 많은 상품들이 몸에 걸쳐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회 단체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앗아가는 경제 구조를 비판하지만 노예처럼 부려질 것을 알면서도 이민 1세대들은 자발적으로 이 땅에 온다. 그래서 미국은 조만간에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노동 시장의 맨 밑바닥부터 이 시장을 움직일 최고급 인재까지 계속 밖에서부터 알아서 충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유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렇게 더 자유로운 것이 ‘더 좋은’ 것인가?





자유는 계량 가능하지 않다


미국이 자유로운 나라인가 아닌가? 개인의 자유의 확장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이 사람들에게 ‘지나친’ 자유를 허용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동의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미국 학교에서 나오는 단골 논술 주제라고 한다. 내가 이 논술을 받았다면 답을 못하고 0점을 받았겠지만, 답을 하는 것이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여기서 목격한 저 역설적인 광경은 이 논리적 문답들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논하기 전에 그 자유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를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뉴욕에 있다보니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뉴욕이 좋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참 제멋대로 사는 곳이며, 머무를수록 내 오랜 습관을 자극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뉴욕이 더 진보적이라거나 더 자유롭다고 간단히 말하기는 힘들다. 굳이 뉴욕을 묘사하자면, 거칠다는 표현을 써야 한다. 사람들의 행동은 뒤죽박죽 제멋대로고, 사람들 사이에 기준이라는 것도 공통의 가치관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행동할 자유는 여기서 나온다. 이는 다양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심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부분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무관심이다. 차가워 보이지만 이것이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예의다. 이처럼, 이 자유의 도시에서 내가 경험한 ‘자유’란 널리 퍼져 있는 윤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몇 백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도출해낸 최소한의 합의점이자 이 도시의 몸체를 가장 효율적인 규칙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 도시는 수백만 명의 날뛰는 에너지를 간신히 통제하면서 가열차게 돌아간다.




뉴욕은 미국적인 성격을 가장 잘 압축시킨 곳, 미국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증해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 세계 각국에서 떠나온 사람들이 워낙 뒤섞이다보니, 공통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분명히 선을 긋는 기준점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물론, 내 얄팍한 지식과 경험을 일반화하기란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러나 미국의 ‘자유’라는 것이 미국의 독특한 풍토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또 그렇게 취급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수업에서 세계 정치를 토론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를 자기 시선으로 재단하는데 정말 선수들이다. 북한, 이란, 중국 등등, 맥락도 역사도 완전히 다른 나라들을 단순히 ‘자유 없는 독재정권의 나라’로 하나로 퉁쳐버리는 저 무식함! 이 나라들의 희망은 오직 (미국처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데에 있다는 저 자신감!



미국이 다양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증해주는게 아니라, 그 반대일 수 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계량 가능할 수 없다. 자유를 말하려면 그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과 배치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 속에 살고 있는 한 개인이, 어떻게 자기 역량을 펼치기 위해 선택하고 싸우고 감당하는가. 이것이 자유라고 불려야 한다. 중세에도 남성을 위한 미색보다는 고독을 택하겠다는 당당한 여성들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도 길 위의 자유를 누리던 당당한 백정들이 있었다. 그러니 ‘미국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는 것은 참 무식한 발언이다. 그것은 연애에 눈이 먼 내 남미 친구가 스킨십의 강도(!)로 자유를 측정하여 “남미가 제일 개방적이고, 미국은 그 다음이고, 아시아는 꼴통”이라고 말한 것만큼이나 무식한 일이다.




미국에서 튀어!


역량이 있으면 한계도 있는 법이다. 이것 외에 또 다른 자유를 상상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른 맥락과 역사, 전통의 결을 가진 장소에서 다른 방식의 자유를 구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경험해보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그곳이 쿠바라고 해도 기꺼이 겪고 배우고 싶다.


미국이 최고라고 믿는 것은 미국의 자유다. 그러나 이 말은 해야겠다. 나는 여기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우울증 약을 국민의 절반 이상이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면 이 나라 문제 있는 것 아닌가. 왜 가장 많은 자유가 보증된다는 나라에서 전 국민이 약물중독에 걸리고 있을까? 무슨 함정이 있는 것일까? 질문은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미국 중심의 사고에서 튀어나가는 첫 번째 스텝이다(^^).


그 곳이 어디라도 미국 중심의 사고에서 튀어나가는 것이 첫 번째 스텝이다!



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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