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해완's MVQ

"나도 뉴욕의 몇 만 명의 얼굴 중 하나가 되어간다."

by 북드라망 2015. 6. 1.



뉴욕의




여름이 코앞이다. 나는 뉴욕에서 두 번째 여름나기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도 아닌데 괜히 유난 떨지 말라고 하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일단 담요를 준비해야 한다. 모든 곳에서 냉장고처럼 ‘풀가동’되는 에어컨에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또 한편, 지하철에서 ‘뉴요커들’과 살을 부대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여름은 겨울보다 불쾌지수가 높다. 인종에 따라 각양각색인 땀 냄새 속에 푹 쩔어서 반 시간 이상 달리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지에 이른다. 이 혼돈 속에서 에어컨 때문에 정수리만 차갑다.



경계 혹은 경직


물론 어찌 이것이 뉴욕만의 상황이겠는가? 서울이든 방콕이든 여름의 만원 지하철은 늘 ‘지옥철’이다. 그러나 뉴욕의 다양한 인구구성은 이 전형적인 불쾌함 위에 독특한 긴장감을 더한다.


이곳에서 맨 처음 지하철을 탔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곳은 F호선의 루즈벨트 아일랜드라는 역이었다. 지하철이 왔고, 엄마와 내가 탔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바닥에 땀이 찰 정도였다. 갓 상경한 시골 모녀처럼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화들짝. 온몸으로 ‘나는 관광객이요’라고 말하는 이 어색한 포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F트레인에서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뉴욕 사람들이 너무 낯설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다 쓸데없는 자의식이었고,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고 누구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반응은 경계가 아니라, 경직이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이 사람들의 겉모습을 두고 몸이 완전히 굳어버린 것이다. 눈 앞에 수많은 피부 색깔과 이목구비가 펼쳐졌고, 이국적인 체향이 (국적을 초월한 홈리스 냄새와 함께) 사방에서 코를 찔렀으며, 분절할 수 없는 언어가 웅얼웅얼 공중을 가득 메웠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내 옆에서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의식된 적은 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카오스. 낯선 만큼 신기했고, 신기한 만큼 거북스러웠다. 옆 사람의 열기와 시선이 피부로 강렬히 느껴지는데 그 낯선 얼굴에서 표정과 인상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무방비 상태로 정체를 모르는 적들에게 노출된 기분이랄까.


이제 그 빈도수가 드물어지긴 했지만 이 긴장감은 아직도 종종 나를 엄습한다. 지하철에서 내 어깨와 누군가의 가슴이 강하게 부딪힐 때, 고개를 드니 까만 피부에 하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순간 마음이 움츠러든다. 그리고는 내가 뉴욕에 있음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뉴욕에서 타자와의 접촉은 늘 자발적이지만은 않다.



뉴욕의 얼굴들


뉴욕은 이 긴장을 대체로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뉴욕을 ‘다양성의 도시(The City of Diversity)’라고 부르고, 이 도시도 스스로를 그렇게 포장하고 또 광고한다. 뉴욕 말고 세상에 어떤 도시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고 있겠는가? 뉴욕의 최고 자원은 인적 자원인 것이다. 뉴욕에서는 어느 작은 서점이나 <뉴욕 사람들(People in New York)>이라는 사진책을 판다. 연령, 성별, 인종, 패션이 각기 다른 뉴욕의 거리에서 각기 즐거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유쾌해지는 사진들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만인을 품는 이곳 뉴욕으로 오라!


하지만 이 사진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렌즈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다. 이 사진사는 사진을 찍힌 뉴욕 사람들과 실제로 섞일 필요는 없다. 사진사의 눈을 빌려 ‘뉴욕’을 탐사하는 독자들에게는 그 거리가 더 멀 것이다. 즉, 이것은 어디까지나 뉴욕의 초상화이지, 살아 움직이는 뉴욕이 아니다. 타임스퀘어에서 셀카를 찍으며 “난 지금 뉴욕에 있어(I’m in NY now)!”라고 포스팅을 하는 관광객이 아니고서는 이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그들이 정말 뉴욕 ‘안’에 있는 것일까? 그 언저리에도 못 간 것이 아닐까?) 다양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양한 교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에는 ‘얼굴들’이라는 챕터가 있다. 얼굴이라는 기호로 인간중심주의를 해부하는 꽤 희한한 발상인데, 예전에는 이 챕터가 아무리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얼굴은 얼굴이지, 뭘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해석하나? 하지만 뉴욕에 온 후로 생각이 확 바뀌었다. 얼굴은 정말 기호다. 낯선 이를 만나면 얼굴을 가장 먼저 보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 낯선 얼굴을 전형화하게 된다. 흑인의 얼굴을 보면 무섭고, 중국인의 얼굴을 보면 지겹고, 남미인의 얼굴을 보면 게으르게 보이는 것처럼. (뉴욕이 건재하는 한 얼굴 문제는 이곳에서 영원히 대두될 것이다.) 이렇게 얼굴 유형에 꼬리표를 붙이고 나면 그나마 마음이 편한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딴 사람도 아닌 내 친한 친구들에게 들을 때면 기분이 착잡하다. 인종 차별은 교육의 결핍이나 인간성의 문제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자들 속에서 편안해질 줄 모르는 신체적 무능력에서 온다. 한마디로, 몸이 경직되다 못해 항상 담에 걸린 상태로 남는 것이다. ‘차이는 차별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문구도, 차이 앞에서 몸이 여전히 뻣뻣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고로, 차이를 거부하지 않는 유연한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 결론은 이미 나왔다. 하지만 이런 신체를 만들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말을 일상에서 실천하기란 너무 어렵다. 하루하루 지하철에 나를 싣고,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땀 냄새들에 쩔어가면서 불평하지 않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가랑비처럼 뉴욕에 스며들기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집과 학교를 오가는 지겨운 일상을 반복하는 요즈음이다. 깨달음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천천히 왔다. 어느 순간부터 뉴욕의 진짜 얼굴들이 내 눈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출발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어느 날, 백인 아줌마가 배낭이 세 개씩 들어갈 듯한 쇼핑백 두 개를 양손에 낑낑 들고 있었다. 그날따라 지하철에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온몸이 위태롭게 흔들렸고, 얼굴에서 땀이 줄줄 나고 있었다. 안쓰러워 보였다. 세상에... 지하철에 앉으면 보통 곯아떨어지는 나도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할 정도였다. 그녀는 눈 앞의 기적을 믿지 못하는 듯 했다. 한 동양 여자애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양보하다니! 아줌마는 신(“God!”)을 부르짖으며 냉큼 앉았다.


자리에 서서 지하철을 한참 더 타고 가는데, 백인 아줌마의 피곤에 찌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엄습했다. 뉴욕 사람들은 참 열심히 산다. 지하철은 24시간 동안 끊임없이 일꾼들을 싣고 달린다. 이민 1세대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이민 2세대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죽어라 장학금을 탄다. 싱글맘들은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오고, 유학생들은 학업과 병행하기 위한 불법 알바를 찾는다. 이런 소위 저소득층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뉴요커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나 나오는 환상의 존재들인 것이다. (실제 뉴욕 사람들은 어찌나 옷을 대충 입고 다니는지, 그 ‘후리한’ 패션 스타일에서 찌든 삶이 줄줄 묻어나오는 듯하다.) 부처님이 인생은 고라고 하셨는데, 정말이다. 인종과 상관 없이 피곤함에 찌든 얼굴은 보기 안쓰럽다.


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학교에 오는 그런 친구들이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마침내 색깔과 이목구비 이전에 ‘어떤 얼굴’을 먼저 보게 되었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얄미운 얼굴의 우크라이나 친구, 장난기가 눈에 자글자글 서려 있는 인도 친구, 개미도 안 죽여 봤을 것 같은 방글라데시 친구, 잔소리 많이 하게 생긴 이탈리아 언니. 심지어 그 중 몇 명은 연구실 사람들이나 내 학창 시절 친구와 똑같이(!) 생겨서 충격받았다. 피부와 이목구비는 딴판이지만, 그 사람이 풍기는 인상과 성격이 너무 닮은 것이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더니, 오래 보아야 정말 보인다. 이 유형화할 수 없는 특이한 ‘얼굴’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인종 차별을 극복할 수 없다. 머리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은 거부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뉴욕의 몇 만 명의 얼굴 중 하나가 되어간다. ‘후리해진다는’ 소리다(^^). 화장기 없는 얼굴, 대충 걸쳐 입는 옷, 그리고 이 인구 속에 점점 자연스럽게 섞이는 몸. 내 얼굴은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도시에서 나를 ‘아시아 여자’이기 전에 김해완으로 봐주는 친구를 몇 명만 찾아도 이 뉴욕행은 성공일 것이다.




글/사진_김해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