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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해완's MVQ

미국에서 만난 한국보다 더 한국 같은 대학 담론 -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며

by 북드라망 2015. 4. 24.



대학 이야기





팍팍한 삼월의 봄


4월의 둘째 주. 봄이 코앞까지 왔건만, 나는 도대체 계절을 즐길 여유가 없다. 올해 쓸 체력 분량을 이미 다 방전시킨 것만 같다. 지난 3월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때였다. 대학교 첫 학기가 시작되었고 얼떨결에 알바 자리까지 얻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과목과 상관없이 무조건 글쓰기 과제를 내주는 학교 수업들을 만족스럽게 따라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무직에서 전화로 상담받는 일은 영어듣기가 충분히 되지 않아 버벅대고 있다. (모든 미국인들이 대학 교수들처럼 칼 같은 영어 발음과 올바른 문법을 구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매일 새벽 두 시에 파김치가 되어 드러눕고 나면 시간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ㅎㅎ)


다행히 때마침 이현진 오빠와 김민경이 3월에 뉴욕 땅에 도착했다. 이 둘은 먼지구덩이였던 이타카 하우스를 깔끔히 청소했고, 그 후로는 식상 고립인 이 불쌍한 유학생을 먹여 거두고 있다. 밥은 단 한 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민경이의 뚝심 돋는 부성애와, 이상한 의성어를 내면서 매일 새로운 몸 개그를 선보이는 현진 오빠의 수다스러운 모성애로 그나마 3월을 무사히 통과했다.


아, 내가 꿈꾸던 대학교 1학년 생활은 이것이 아니었건만. 기대가 현실이 되는 일은 역시 없다. 그렇다고 해도 내 빡빡한 스케줄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내 기대와 철저히 어긋났던 것, 정말 내 마음을 팍팍하게 했던 것은 ‘대학’이라는 장소 자체이기도 했다.


봄도 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빡빡한 대학생활이라니...





커뮤니티 칼리지의 두 얼굴


뉴욕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이 팍팍함은 내가 4년제가 아닌 2년제 대학교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커뮤니티 칼리지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커뮤니티 칼리지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에게 기회를 열어놓는 학교다. 일반 4년제 대학교들이 SAT 점수와 토플 점수에 맞춰서 신입생들을 선별하는 반면, 커뮤니티 칼리지는 고등학교 졸업증만 있으면 무조건 다 받아준다. 무엇보다, 커뮤니티 칼리지의 등록금은 일반 대학의 절반이다.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등록금을 4년 모두 부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소식이다.


이 활짝 열린 대문은 종종 미국 사회 안에서 웃음거리가 되어왔다. 커뮤니티 칼리지가 ‘진짜’ 대학이 아니라는 의식도 만연하다. 누구나 갈 수 있다면 그 학교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 입학에 문턱이 없다는 것은, 역으로 학교의 구성원이 그 어느 곳보다도 다양하다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학교에서 길에서 만났다면 도저히 ‘대학생’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학생들의 얼굴을 많이 보았다.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끌고 온 엄마-학생, 낮에 택시 운전을 뛰고 학교에 온 택시 기사-학생, 기자가 되고 싶어하고 글쓰기가 취미인 웨이터-학생, 공부하기 죽어도 싫은데 엄마 손에 끌려온 문제아-학생, 건실한 회계사가 되는 것이 꿈인 겜블러-학생까지. 얌전한 일반 대학교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버라이어티다. 같은 교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자극이 될 때도 있다.



커뮤니티 칼리지를 배경으로한 시트콤 <커뮤니티> 주인공인 전직 변호사부터 백발의 CEO(??), 덕후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칼리지에 대닌다.



이들의 공통점은 제때(십대 후반) 일반 대학교(4년제)에 입학해서 등록금(공립대는 대략 한 학기에 300만원)을 낼 만한, 소위 말하는 ‘정상적’ 가정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국 사회 저소득층의 얼굴을 다채롭게 체험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작년 동안 영어를 공부했던 헌터 칼리지는 4년제였다. 지금의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들과 비교한다면, 헌터 칼리지를 활보했던 청년들은 서로 나이 차이가 훨씬 적었고 분위기도 더 여유로웠다. 한마디로 얼굴 때깔들이 더 좋았다. 반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는 90%의 학생들이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심지어 육아까지 병행하는 사람도 있다. 엉겁결에 아르바이트생이 된 나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이 된 셈이다. 이렇다 보니, 이 사람들에게 공부란 전투일 수밖에 없다. 졸업은 결코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관문이 아니다. 수많은 의무들을 양손에 가득 안고서 삶이라는 외줄타기를 해내지 못한다면, 졸업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졸업을 ‘해내는’ 학생들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들은 매우 바쁘다. 그들은 모두 바람 같이 교실에 왔다 바람 같이 사라진다. 이들에게는 친구 관계에 공을 들일만한 여력이 없다. 짜투리 시간이 난다면 그 시간은 건너뛴 식사, 모자란 잠, 밀린 숙제, 혹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나 직장 상사를 위해 쓰여야 한다. 이런 그들이 매우 존경스럽지만, 말을 붙일 틈새를 찾기란 상당히 어렵다. 대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가 아예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내 친구들의 지적이 완전히 틀렸던 것은 아니다. 커뮤니티 칼리지의 ‘커뮤니티’는 팍팍하기 그지 없다.




이상은 없다
- 한국보다 더 한국 같은 대학 담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사람들은 감이당이나 남산강학원에서도 많다. 모두들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다양한 인생사를 감추고 있지만, 공부를 통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또 친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커뮤니티 칼리지라고해서 ‘대중지성 공동체’의 파워를 내지 못할 까닭은 또 뭐란 말인가? 커뮤니티 칼리지가 썰렁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대학을 찾는 목적은 하나 같이 천편일률이기 때문이다. 더 그럴듯한 말로, 대학이 비전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모든 일학년들이 ‘일학년 세미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 전공에 대해 더 심도 있는 이해를 갖추고 더 나아가 앞으로의 진로까지 설계하는 것이 이 세미나의 목적이다. 듣기만 해도 재미 없고, 실제로는 더 재미가 없는 수업이다. 꾸역꾸역 교재를 읽고 숙제를 제출하고는 있지만, 돈과 시간 모두를 낭비하고 있다는 분노를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수업에서도 얻을 것은 있었다. 미국에서 요새 거론되고 있는 대학 담론들을 접했고, 또 다른 학생들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이로써 나는 커뮤니티 칼리지가 학생들에게 달성하도록 권장하는 그 궁극적인 목표를 이해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칼리지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목표가 무엇이냐고? 너무 익숙한 단어라 놀라지 마시길. 바로 취업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취업의 개념은 우리보다 더 노골적이다. 이 학생들이 원하는 취업은 이들을 지금보다 더 높은 소득 계층으로 ‘상승시켜’ 줄 만한 고급스러운 직업을 취득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4년제 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야한다. 커뮤니티 칼리지는 빠르게 거쳐가야 하는 그 중간 고리일 뿐이다. 교육은 소득 계층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커뮤니티 칼리지의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저소득층이지만, 많은 도움을 받는다면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이야기들은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나는 공부를 오롯이 직업 수단으로만 환원하는 이 전제가 불편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문제제기를 하자,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당연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국에는 대학이 취업을 위한 공장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담론이 있다. 먹고 사는 현실 때문에 꿈도 없다는 젊은이들의 한탄이라도 들린다. 미국은 그마저도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졸업 후 커리어’를 인생의 숙명처럼 당연시 여기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이것이 확실히 자본주의의 요람인 국가다운 태도인 것일까.




공부는 학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실에서부터 회사 사무실까지. 톱니바퀴처럼 촘촘히 맞물린 이 시스템 속에서도 즐거운 공부는 여전히 가능하다. 팍팍한 학교 생활이지만 그 안에서도 열정적인 교수와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지만, 뉴욕에 발이 닿아 영어를 공부하게 된 것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을 요새 하고 있다. 그 덕분에 필리핀 교수를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국제정치학 수업을 배우고,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학생들에게 쓰레기 수입이, 아직 어설프지만 나 역시 환경윤리 수업 시간에 밀양 송전탑 사건을 소개해주는 것 등등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뭐든지 조금씩 천천히 배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일들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벌어지지만, 커뮤니티 칼리지가 이 배움의 현장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순간들은 우리가 ‘소득 계층 상승’이라는 당위를 까맣게 잊고 배움에 열중할 때 생긴다. 시스템의 균열인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내 친구는 일 학년을 보스턴에 있는 한 사립대학교에서 다녔다고 한다. 그 후 전공을 사회학으로 바꾸면서 공립대학으로 옮겼는데, 그녀는 놀랄만한 사실을 말했다. 학비는 열 배가 차이가 났으나 교육의 질은 똑같았다고. 학비의 차이는 철저히 위계의 차이 뿐이지, 교육의 차이가 아니라고.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내게 이 말을 들려준 것은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서였다. 마치 ‘하버드’도 뚜껑을 열어보면 그 이름값 못 한다고 장난스럽게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말은 내게 자유의 나팔소리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어디서든 공부할 수 있다는 말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공부의 열정을 위해 학교가 생긴 것이지, 학교의 조건이 공부가 생성시키지는 않는다. 공부의 길에는 여러 경계들이 있다. 하지만 이 경계를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것에서부터 공부가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점점 더 유연해 질수록,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일상은 덜 팍팍해지지 않을까.




글_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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