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묵자-비장
정확한 사랑과 미움
우리 사회에서 사십 줄이 넘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공(功)을 내세워 이익을 취하는데 그리 능하지 못하다. 아마 유교의 영향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며 이(利)에 밝은 것을 극히 경계했었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다른 구성원들의 원망이 높아진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림은 <공자성적도>
‘이(利)’라는 말은 벼 화(禾) 자와 칼 도(刀) 자로 만들어진 회의 문자다. 칼로 벼를 베어 수확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익’이나 ‘유리한 것’이란 의미가 나왔다. 내 것이 남들보다 잘 든 칼처럼 잘 풀리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가에서는 이런 이익을 바라면 소인으로 낮춰 말한다. 너도 나도 이익을 탐하면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송나라에 와서 사마광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실로 의로 군자를 드높이고 이(利)로 소인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라고 했던 말을 정확히 뒤집은 것이다. 전통적인 유가와 달리 소인들의 이(利)를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급기야 명나라에 와서 해서(海瑞)라는 사람은 “나라를 이롭게 하는 도는 백성을 이롭게 함으로써 실현된다”고 말하는데 이른다. 이른바 백성의 이(利)를 완전히 긍정해버렸다. 해서는 의만 말하는 성인을 두고, “천하에 어찌하여 그런 바보 같은 성인, 그런 죽일 놈의 성인이 있단 말인가”라고 격렬하게 조롱하기까지 한다(『중국사상문화사전』 220쪽). 유가의 전통적인 “의리(義利)의 변별”에서 한참 벗어난 주장인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 연원을 찾아 거슬러 가면 원조에 묵자(墨子)가 자리 잡고 있다. 전한 초기에 활동한 묵가(墨家)는 소멸하기까지 약 300여 년간 주로 물질적 이익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집단이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상호 사랑을 주장했다. 그런데 묵가의 혁명성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언표에만 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내면적 사상이 “서로가 서로를 이롭게 하기”라는 외면적 행위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 이렇게 되면 묵가는 유가와 달리 오히려 이(利)의 추구 그 자체가 새로운 도덕이 된다. 이로써 “의로움(義)이란, 이롭게 하는 것(利)이다”(義利也)"(『墨子』, 經編 上, 김학주 역, 590쪽)라는 반시대적인 정의가 출현한다.
이 반시대적 정의로부터 군주의 모습은 유가와 완전히 다르게 묘사된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도 역시 따라서 그를 사랑하게 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은 남들도 역시 따라서 그를 이롭게 해준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남들도 역시 따라서 그를 미워하고, 남을 해치는 사람은 남들도 역시 따라서 그를 해치게 된다. 이것이 무엇이 어려울 게 있겠는가? 특히 윗사람들이 그것으로서 정치를 하지 않고 선비들은 그것을 행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墨子』, 兼愛編 中, 김학주 역, 259쪽
일단 사랑과 미움은 상호적이다. 그런데 위 문장에서 뒤에 나오는 ‘남’은 앞의 ‘남’과 다르다. 즉 “어떤 사람이 타인(남)에게 이익과 사랑을 주든, 손해와 미움을 주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사랑과 미움, 이익과 손해를 준다고 하는 그 타인(남)은 좀 예외적 존재”이다. 더군다나 해치기까지 한다니, 그것은 독점된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바로 그 “남(타인)”은 군주, 왕이다(임건순, 『묵자-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406쪽). 겸애의 군주는 인민들의 사랑과 미움에 따라 상호적으로 반응해 줌으로써 이익이 고루 퍼지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신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먹고 살 식량은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인체가 필요한 기운은 비에서 거두어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비는 신체 내의 땅이다. 코로 들이마신 천기는 횡경막 위인 하늘(폐)로 들어가지만, 입으로 삼킨 지기는 횡경막 아래 땅 부위로 내려온다. 바로 이 땅 부위가 비장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비장을 “중황조기(中黃祖氣)”라고 칭한다(『동의보감』 406쪽). 도가에서도 비를 ‘황정(黃庭)’이라고 불렀다. 노란색[黃]은 청적황백흑에서 중앙이고, 또한 뜰[庭]은 동서남북 사방의 한 가운데다. 신체의 한 가운데에 땅으로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비장이 중심에 있으면서 음식물을 소화, 흡수하며 영양물질을 전신으로 옮겨준다. 오행상 토(土:땅)인 비는 위(胃)와 협동해서 섭취한 수곡을 소화시켜 다른 장부인 심폐와 간신을 자양한다. 신체에서 물질적 이익이랄 수 있는 수곡을 전신으로 나눠주는 장부인 것이다. 결국 비장은 겸애의 장부이다. 즉, 사랑의 장부라 불러야 한다. 이를 두고 한의학에서는 “비통혈(脾統血)” 그리고 “비주운화(脾主運化)”라고 한다.
그런데 비위가 건전하고 조화롭게 작용했다면 섭취한 수곡(水穀)이 전부 우리 몸의 에너지원인 기혈로 변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위가 사기를 받으면 ‘수(水)’는 도리어 습(濕)으로, 곡(穀)은 도리어 ‘체(滯)’로 바뀌어 설사로 나오고 만다. 이 순간에는 비장이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는다. 남을 미워하는 장부에게 비장도 역시 따라서 신체를 미워하고, 남을 해치는 장부를 비장도 역시 따라서 신체를 해친다. 따라서 비장은 사랑과 미움을 사랑과 미움으로 재분배하는 군주이다. 어쩌면 세상은 비장이 간절히 필요한지 모르겠다. ‘정확한 사랑과 미움’을 위해서 말이다. 묵자도 그만큼 셈이 정확한 인간이었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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