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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18c 조선지식인 생태학

[남인 백수 1세대, 성호 이익] ⑤ 백성을 위한 학문을 했던 백수 선비

by 북드라망 2014. 7. 22.


남인 백수 1세대, 성호 이익이 사는 법 ⑤

야인의 국가경영학



산림에서 정치하기


성호 이익을 제도권 바깥의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성호는 단 한순간도 제도권 바깥을 사유해본 적이 없다. 몸은 비록 현실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같이 중앙정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제도권 안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제도 바깥의 자유를 꿈꾸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도권 밖에 존재하면서 제도권을 향하여 외치는 이가 있는 터. 성호는 후자였다. 산림에서 정치하기! 야인이면서 국가경영과 현실개혁의 방안을 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성호는 제도를 개혁하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성호는 정치와 제도를 신뢰했다. “주자는 말하기를, 천하의 제도에 완전히 이롭기만 하고 해가 전혀 없게 하는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그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 이해(利害)가 어떠한지를 살필 뿐이다. 만약 해로운 점만 지적하여 이로운 점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하였다.”(균전, 「인사문1」, 『성호사설』) 성호는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 나가는 게 중요하지 완벽한 제도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떤 제도인들 완전할 수 있겠는가? 제도마다 약점이 있는 법이지만 최선의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는 현실을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것. 성호는 정치와 제도를 벗어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제도권형의 백수였다. 정치적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했다.    


그런데 당시 선비들의 폐단은 백성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정치, 사회, 문화의 제도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무식하고 소홀한 것이었다. 사대부들은 일상이 영위되는 현실의 국면들은 도외시한 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층위에서의 본성과 마음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을 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뿐이었다. 성호는 실질을 다루는 학문에 해박했다. 그래서 성호의 관심은 천문, 지리, 역사, 경제, 행정, 역법, 수리, 경학 등의 실용적인 분야로 폭넓게 뻗쳐 있었다. 성호의 학문을 실학이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호는 굳게 믿었다. 관념을 벗어나 현상과 관련된 지식에 박학해야 국가와 백성의 현실을 진단하고 바꿀 수 있는 법이라고. 


그림은 유숙의 「수계도」 중 일부.


그리하여, 성호는 국가를 경영할 방안과 현실을 개혁할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글쓰기에 매진했다. 문장가로써 글을 쓴 게 아니라 국가경영학을 펼치기 위해 글을 썼다. 그 내용이 자잘하더라도 국가제도와 백성의 일용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글로 담아냈다. 그것이 바로 『성호사설』이다. 『성호사설』은 성호의 국가경영학이 응축되어 있는 결과물이다. 어찌 보면 백과사전 같은, 시사와 일용에 보탬이 되는 지식과 생각의 단편을 총망라한 메모 형식의 글모음집. 안시성의 위치, 도성 지키기, 말 기르기, 목화심기, 식용하는 곤충, 수리 관개 시설, 과거제도, 토지제도, 군사제도, 빈민구제, 노비제도, 등용 제도 등등 행정과 실용에 관련된 주제라면 무엇이든 기록했다.   




게의 암컷과 수컷 구별하기


성호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비판하기 위해 아주 우스운 일화를 들려준다. 


옛날 노성한 선비가 있었다. 그가 해변 고을의 원님으로 파견되었을 때, 서울에 있는 친지들에게 게를 두루 선물했다. 그가 서울에 돌아오자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게의 암놈과 수놈을 어찌 구별하냐고. 그 원님이 말씀하시길, 

“게의 암놈과 수놈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좌중이 모두 웃었지만 그 중 누구도 게의 암놈과 수놈이 어떻게 다른지 아는 이가 없었다. 다만 어떤 이는 앞에 있는 큰 발로 구별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다리의 마디로 구별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껍질로 구별한다는 등 설이 분분했다. 조정에서 벼슬하던 친구가 늦게 도착했는데, 그는 세상의 일을 잘 알기로 소문난 자였다. 그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설을 풀었다. 

“그 구별은 어렵지 않으니, 눈으로 한다네.” 

온 좌중은 또 한 차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 게의 암놈과 수놈(蟹雌雄), 「인사문1」, 『성호사설』

 

‘게의 암놈과 수놈은 눈^^으로 구별한다’는 난센스 풀이 같은 이야기. 성호는 포복절도할 이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기술했다. 성호에겐 바닷가 백성의 살림살이를 관할하는 해변 고을 원님이 게의 암놈과 수놈도 구별할 줄 모르고, 박식한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암게와 수게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난센스다. 당시 사대부의 풍습이 현실생활에 무심하여 세밀한 부분까지 관찰하지 않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지식과 정보, 그리고 통치기술을 가지고 뽐내며 살아간다. 현실생활에 밀착되지 않은 지식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해변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이 백성들의 살림의 근간이 되는 ‘게’의 생태를 알지 못한다면, 백성의 마음과 생활을 헤아릴 수는 있겠는가?    


정치를 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치의 시작은 무엇인가? 정답은 당연 백성을 위해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찌 직무에 충실할 수 있는가? 직무에 충실하다는 말은 백성들의 생활과 관련한 아주 자잘한 일용사물의 이치에도 능통해야 하는 것이다. 게장을 만들 때 암컷이 맛이 좋고, 수컷은 맛이 떨어지므로, 좋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게의 암컷과 수컷을 분별하는 게 기본이다. 사물에 해박한 사람은 ‘게의 배꼽이 둥근 놈은 암컷이고, 배꼽이 뾰족한 놈은 수컷임’을 식별할 수 있다. 백성을 이끄는 목민관이자,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사대부가 이 기본조차 모른다면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칠 수 있겠는가? 구체적 일상을 외면하고 소홀히 하면 좋은 정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성호는 일용사물의 세밀한 이치를 꿰뚫는 데서부터 정치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백성들의 생활의 밑천이 되는 일용사물에 대한 이해가 곧 정치의 근간이다.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라 


성호에게 정치의 궁극은 현실의 폐단을 진단하고 그를 위해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현실은 늘 만족스럽지 않다. 불평등, 비리, 궁핍, 소외가 없던 시절을 찾기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 적어도 자신의 시대에 책임을 느끼는 자들은 자기 시대에 만족하지 않았고 자기 시대의 환경에 저항했다. 성호는 18세기의 사회, 정치적 환경을 최적의 상태로 개선하고 싶어했다. 성호가 보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가난했고, 인재는 버려진 채 쓰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를 개혁하려면 한계에 도달한 제도를 바꾸는 길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성호의 시대에 모든 사회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적 사유는 불가능했다. 성호는 토지제도, 세금제도, 과거제도, 신분제도의 개혁을 열심히 글로 남겼다. 실현될지는 미지수지만 성호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장 현실에 반영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개혁안을 알아줄 사람이 있으리라 여기며 지치지 않고 제안했다.  


우리나라 제도에 자오묘유(子午卯酉)가 든  네 해를 시험 보는 해로 삼아 문과에 33명, 생원과, 진사과에 각각 1백 명씩 뽑는다. 

벼슬길에 나갔다가 물러나는 기간을 대략 30년으로 잡으면, 이 30년 동안에 문과 및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인원이 모두 2천330명이 된다. 지금 내직은 병조에서 관장하는 자리를 제외하고 이조에서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해 올리는 자리가 4백 자리가 채 되지 않는다. 외직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무과, 선음, 천문, 유품 따위의 300자리가 그 안에 들어 있으니, 나머지는 5백여 자리에 불과하다. 이 500여 자리로 2천 330명을 두루 다 대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생원, 진사는 권귀나 근신에게 연줄을 대 벼슬을 얻는다. 문과에 합격한 자일지라도 끌어주는 힘이 없으면 한번 체직된 뒤에는 다시 나아가지 못한다. 요즘 항간에는 관원도 평민도 아닌 생원, 진사로 늙어 죽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늘날에는 더욱 심한 점이 있다. 식년시 이외에도 과거 시험의 명칭이 10여 가지나 된다. 그래서 3년 동안 문과에 오른 자가 1백여 명에 이르기도 한다.  조정에서는 사류(士類)를 위안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삼고 있으나, 실제로는 원망을 사는 데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만약 부득이하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과거 시험에 뽑힌 사람 중에서 인재를 고르고 덕을 숭상하게 하는 방법을 붙이는 것이다. 육조와 한성부의 장관, 차관, 양도의 유수, 팔도의 감사로 하여금 3년마다 문과에 급제한 사람 몇 명씩 천거케 한다. 그리고 각각 제목을 만든 뒤에, 임금과 정부의 고관이 추천서를 친히 심사하되, 한곳에 모여 점수를 매긴다. 그리하여 2점 이상을 받은 문학, 덕행이 있는 사람을 경석에 불러들이되 관록의 법규는 없앤다. 재능이 있고 실무를 아는 사람에게는 정사를 맡기고, 오로지 벌열을 숭상하며 귀족과 노니는 자는 법으로 입사를 금지시킨다. 일단 선발된 뒤에는 죄를 지어 쫓겨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버려두는 일이 없도록 한다. 몇 해 동안만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해결될 것이다.

- 과천합일(科薦合一), 「인사문1」,『 성호사설』


성호는 과거보는 사람 수에 비해 관직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관리를 뽑을지, 그 방법을 제안했다. 예나 지금이나 수험생의 수와 일할 자리수가 일치하는 그런 환상적인 시대는 없었다. 그러므로 관건은 늘 공정함이다. 인재가 버려지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성호는 인재를 등용하려면 과거시험 합격자 중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방식의, 과거와 천거를 합일시키는 제도를 주장한다. 과거시험과 무관하게 인재를 천거해서 기용하는 음서직을 없애고, 급제자 중에서 인재를 천거하여 발탁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성호는 이렇게 하면 인재가 소외되는 현상은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호 이익은 과거를 보는 사람 수에 비해 관직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림은 작자미상의 「소과응시」



성호는 장례조차 치룰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백성을 위해 균전제를 제안한다. 개인 소유학의 토지를 인정하지 않는 정전제 방식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지를 백성들에게 영구히 점유케하는 영업전을 제안한다. 모든 백성이 각기 영업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 영업전은 매매가 불가능하지만 그 나머지 땅은 사유지로 매매가 가능하다. 사유지를 모두 빼앗아 공유지로 만들면 토지소유자들의 반발로 사회혼란이 야기되므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호는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한 방법은 부분적인 공유지 방식이다.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일정한 넓이의 영업전을 고수하는 것. 영업전만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백성의 농작지로 팔 수도 살 수도 없도록 했다. 성호는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영업전을 제안하면서 빈부 차이는 존재하지만, 적어도 부모의 장례를 못 치르거나 백성이 굶주리는 일은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성호는 신분제에 묶여 재능이 있어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을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노비나 서얼, 농민 중에도 인재가 있는데 한 번 노비나 서얼, 농민이면 그 신분적 귀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폐단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들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어야 하고, 반대로 아무리 고관대작의 집안 후손이라도 능력이 없다면 농사를 짓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것.     


이렇듯 성호는 사회, 정치 제도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개혁에 관해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물론 이 많은 제안들이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성호가 제시한 바는 실질이자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책이었으나, 실제 현실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다면 일종의 유토피아와 같은 불가능한 희망으로 남아버렸다. 실사구시의 학문과 이용후생의 실천적 방안을 추구했지만, 이런 방안들은 성호의 구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성호가 반계 유형원의 개혁안이 현실에 쓰이지 못했음을 한탄했듯이. 성호의 구상이 구상으로 그친데 대해 안타까움 금할 수가 없다.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말하고, 제도에 대한 개혁을 세세하게 언급하면 우리는 그런 담론을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호의 개혁안이 실현된 바 없기에 그 방법 자체가 얼마나 현실에 적합했는지,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제도나 법규는 그야말로 한시적인 것이라 구체적인 제도 개혁의 방법이 우리에게 던지는 파장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성호의 현실개혁안은 개혁안에 불과했기에 현실을 전복하는 힘은 오히려 미약했다. 개혁안도 또한 현실 부정의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성호는 신분제와 토지사유제의 불평등성에 대해 근본적인 시선의 전환을 보여주었으며, 농민의 마음으로 농촌의 현장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우리의 사유를 전복하는 건, 제도의 개혁 가능성이 아니라 18세기 현실에서 일어난 존재 자체의 변화다. 성호의 제도 개혁안이나 현실 개선책이 너무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비라는 존재의 현실을 직시하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정치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백수이면서도 세상에 대한 책무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성호는 18세기 지성사의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었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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