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백수 1세대, 성호 이익이 사는 법 ④
성호 이익의 세상을 향한 외침!
난치병 고치는 의원, 반계 유형원
유형원의 『반계수록』
성호의 멘토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이었다. 성호는 유형원의 학문을 추숭하고 곱씹으며, 문물제도, 행정제도의 개혁을 사유하는 것으로 일생을 바쳤다. 유형원은 외삼촌 이원진에게서 수학했는데, 이원진은 성호 이익에게는 종백부가 된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당맥, 학맥은 혈맥과 불가분리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대대적인 국가개조론을 담고 있는 실학서의 상징이다. 유형원 식의 학문과 글쓰기는 산림학자가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하나의 새로운 길이었다.
성호는 유형원에게서 학문하는 선비의 전형을 찾아냈다. 학자는 난치병을 살리는 의원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성호가 보기에 조선은 여기저기 난치병에 걸려 있다. 그러나 이 난치병을 고칠 좋은 의원은 없고, 용렬한 의원만 세상에 가득하다. 용렬한 의원들은 소 오줌이나 말똥 따위의 쓸모없는 것으로 난치병을 고치려 한다. 그런데 어찌된 게 거칠고 더러운 초목 가운데에서 신령스러운 약초를 찾아내는 좋은 의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신령스런 약초를 찾아내고도 버려지는 의원은 바로 유형원이다. 덕과 재주를 품고도 세상에 뜻을 펼 수 없었던 존재. 세태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림에서 국가개조론 프로젝트를 묵묵히 연구했던 유형원.
근세의 반계(磻溪) 유 선생(柳先生) 같은 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선생은 호걸스러운 선비로,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꿰뚫고 도(道)는 백성을 포괄하여 한 사람의 지아비라도 터전을 잃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므로 몸은 필부(匹夫)이지만 뜻은 일찍이 세상을 구하는 데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평소에 생각이 깊어서 각각 확정된 계획이 있는 것이 마치 촛불이 어두운 방을 비추는 것처럼 분명하였다. 또한 좋은 값을 기다려 팔지 않고 늙어서 암혈(巖穴)의 사이에 죽으니,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 『성호집』,「반계수록 서문」[磻溪隨錄序]
유형원은 벼슬은 포기했지만 유자로서의 정치적 책무는 단념하지 않았다. 아니 더 활활 타올랐다. 유형원은 산림학자로 생활함으로써 백성의 궁핍을 아파하고, 궁핍을 벗어날 제도의 문제를 절감하여, 아주 절실하게 자신의 사유와 희망을 글로 기록했다. ‘경세와 안민’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게 유자의 책무지만, 이것을 정치로 실행할 수 없다면 그 방법은 글로 남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유형원의 계책이 좋은 값에 팔리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반계수록』이란 책을 남겨 시무의 요결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
다행스러운 것은 저술한 『수록』(隨錄) 한 책이 먼지가 쌓이고 좀이 슬며 썩어서 부스러지는 가운데에도 없어지지 않고 점점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감탄하며 책을 덮고는 너나없이 시무(時務)를 아는 요결(要訣)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바삐 전록(傳錄)해다가 일일이 보관해 두었다. 또한 조정에 바치고서 반드시 시행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 거의 지극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두 손을 모으고 귀를 기울여도 또한 공허하게도 한마디 말이라도 채납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조처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은택을 받게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무엇 때문인가? 입으로 칭송하는 것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과 다르고, 공법(公法)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데서 막히게 된다. 그러므로 범범하게 말을 할 뿐이었고, 끝내 결단하여 자임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 『성호집』,「반계수록 서문」
성호는 『반계수록』이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다. 시무의 요결이라 말하며 베껴서 간직까지 하고 조정에 바치겠다고 말하는 자가 왕왕 나타났지만, 실제로 정책으로 실현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계수록』에 감동한 사람들은 그저 범범하게 말할 뿐, 결단하는 자가 없었다. 유형원의 국가개조론은 그야말로 읽히는 정책일 뿐, 실행되는 정책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 성호의 안타까움은 그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의 뜻을 펼칠 뿐. 성호는 그렇게 탄식하며 유형원의 뒤를 이었다. 쓰이고 안 쓰이고는 세상에 달린 것, 성호는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데 집중했다.
지혜 나누기!
성호는 시골에 은거했지만 은거한 게 아니었다. 농촌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서툴지만 농사를 짓고 농민으로서의 고충을 몸소 체험했다. 성호는 농촌에 안주한 선비라면 적어도 오곡을 나누어 심고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그런데 농사짓는 일에 뛰어들어 현장에서 농민들을 만나보니 노동력은 대단했지만 농사에 관한 지식은 부족했다. 그리고 선비들을 보니 세상에 보탬도 되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기에도 부족한 도를 운운하며 망상에 빠진 채 헤매고 있었다. 선비들의 유일한 쓸모는 그들의 똥과 오줌일 뿐이다. 똥과 오줌은 밭에 거름이 되니 자신과 자기 집안을 구제하는 넉넉한 계책이 될 수 있다. 선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 자신의 똥과 오줌처럼 하찮지만 농사에 꼭 필요한 지식을 나누는 것. 도는 바로 이곳에 있다. 농민은 선비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선비는 농민들의 수확을 높여줄 지식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현장을 살리는 도다.
곡식 가운데 벼[稻]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곡식을 말할 때에는 벼가 마땅히 윗자리를 차지한다.
벼라는 곡식은 불을 때서 밥을 지으면 눈처럼 희고 윤기가 흐르며, 빚어서 술을 만들면 계수(桂樹)와 목란(木蘭)의 향기가 풍기며, 반죽하여 떡을 만들면 옥(玉)과 비계를 잘라 놓은 듯하다. 지극히 담박하면서도 지극히 맛있고, 지극히 넉넉하면서도 지극히 귀하다. 그러므로 임금에게 바칠 수도 있고 귀신에게 제사할 수도 있고 빈객을 접대할 수도 있으며, 배고픈 자가 먹으면 살진 고기를 싫증 내게 되고, 병든 자가 먹으면 약물을 물리치게 되니, 참으로 농사에서 심지 않아서는 안 되는 곡식이다.
내가 재배하는 것은 벼인데, 그 품종이 많다. 시기가 빠른 것과 늦는 것이 있고, 촉촉한 곳을 좋아하는 것과 마른 곳을 좋아하는 것이 있으며, 색깔에 따라 흑색, 백색, 황색, 적색이 있으며, 까끄라기가 긴 것과 짧은 것이 있으며, 눈이 검은 것과 흰 것이 있으며, 꼭지가 질긴 것과 연한 것이 있으니, 모두 품종을 나누어 구별할 수 있다. 마침내 이것을 모아 『도보』(稻譜)를 만들었으니, 나의 농사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먼저 파종하고 나중에 익는 것을 동(穜)이라고 하고, 나중에 파종하고 먼저 익는 것을 육(稑)이라고 하고, 파종하지 않았는데 자생(自生)하는 것을 여(穭)라고 하고, 올해 절로 씨가 떨어져 다음 해에 자란 것을 이(秜)라고 하고, 베어 낸 벼가 다시 움트는 것을 필즐[䄶]이라고 하고, 수해(水害)를 입어 검은 반점이 생긴 것을 매(䆀)라고 하고, 풍해(風害)를 입어 해충(害蟲)이 생긴 것을 치(䅔)라고 하고, 지나치게 비대(肥大)해져서 부패한 것을 요(穘)라고 하고, 지나치게 여위어서 쌀에 붉은색이 많은 것을 고(䆁)라고 하고, 시기를 놓쳐서 쌀이 부스러지는 것을 미라고 하고, 싹이 처음 나온 것을 추라고 하고, 연약한 싹을 유라고 하고, 크고 무성한 것을 예(䅄)라고 하고, 포기가 조밀한 것을 기(穊)라고 하고, 포기가 성긴 것을 역이라고 하고, 여물기 시작하는 것을 지(秖)라고 하고, 이삭이 늘어지는 것을 초(䄪)라고 하고, 누렇게 여문 것을 권이라고 하고, 여물지 못한 것을 고(秙)라고 하고, 이삭이 패지 못한 것을 창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벼의 별명(別名)인데, 또한 대략 채집하여 아울러 기록해 둔다.
- 『도보』 서문 (『도보』의 본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김홍도의 <논갈이>
성호는 농촌의 현장에서 깨달았다. 농민들은 벼를 심는 데는 능하지만, 벼에 관한 지식은 부족하다는 점. 여기서 선비의 역할을 찾아냈다. 선비가 할 일은 농부의 경험에 지혜를 더해주는 일이었다. 성호는 『도보』(稻譜)를 썼다. 벼의 특징을 알 수 있도록 벼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나에게도 보탬이 되고 농민들에게도 보탬이 되는 지식 나누기.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지혜를 얻고, 그리고 그 지혜가 다시 일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순환! 이것이 성호가 찾아낸 선비의 역할이었다.
성호는 백성을 사랑하는 타고난 유자였다. 물론 조선시대 선비치고 그 누군들 애민(愛民)하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마는, 성호의 애민은 구호에 그친 말이 아니었다. 성호는 현장에서 백성의 삶을 고민했다. 그는 처사로 살면서 한시도 농민들의 삶을 외면한 적이 없다. 아니 늘 농민들에게 미안해했다. 어찌하면 백성들을 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게 할지 그 방도를 고민했다. 성호에게 도는 추상적인 관념 내지 이념의 어떤 것이 아니었다. ‘천하에 곤궁한 백성이 없게 하는 것’이 도였다. 이런 지평 위에서 ‘본원에만 뜻을 둘 뿐, 실지로 물러날 줄 모르는’ 즉 형이상학적 명제를 탐구하는 쪽으로만 흘러 일상과는 동떨어지게 된 주자학을 비판했던 것이다, 도는 농민들의 현장 즉 그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지, 현실을 초월한 저 너머에 있는 게 아니었다. 백성이 궁핍하면 궁핍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유학의 도이지, 궁핍한 현실은 외면한 채 상정된 그 어떤 초월적 이데아의 상태를 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
거름과 지푸라기의 효용성
성호 이익은 아들 맹휴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입고 땅속에 묻힌 분의 억울함이 거듭 풀렸다”(옥동선생에 대한 두 번째 제문[再祭玉洞文])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환난을 피해 관직을 단념했던 것일 뿐, 관직 자체가 부질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성호는 정치가요, 행정가이기를 원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몸을 사렸을 뿐이다. 그의 경세(經世)의 의지,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 경영에 참여해야한다는 의지는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성호는 참으로 외길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오로지 세상을 개혁하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방법만 생각했다. 시를 짓고, 문장을 짓는 이유가 세상을 바로잡고 가르치기 위함이듯, 그가 한평생 탐구한 것은 세상을 경영하는 방도였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세상과 백성을 걱정하는 일에 바쳤다. 유학자는 대부로서 정치 일선에 참여할 때도, 선비로서 살아갈 때도 세상에 대한 책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성호처럼 철저하게 유학자로 자임한 자가 있을까? 공자와 맹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을 자임(自任)했듯, 성호는 은거하며 그와 같이 살았다. 쓰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비록 쓰이지 않더라도 세상을 향한 외침을 멈출 수 없었던 성호, 그는 진정한 경세가였다. 그래서 그는 쓰고 또 쓸 뿐이었다.
그 경세학의 한 방면이 경전의 해석이고, 다른 방면이 제도 개혁의 방안과 정책이었다. 성호는 ‘질서’(疾書)와 ‘사설’(僿說)이라는 문장스타일로 경세의 희망을 담았다. “질서(疾書)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기록한 것이니, 이는 금방 잊을까 염려해서이다. 익숙하지 않으면 잊게 되고, 잊으면 생각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익숙해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빨리 기록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기는데, 기록하는 것 역시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맹자질서』 서문)” 한밤중이라도 해득한 것이 있으면 잊지 않을려고 기록하는 정신! 그것이 질서다.
“『사설』과 같은 것은 앞의 몇 가지 문체에 실을 수 없으니, 그것은 쓸모없는 말임이 정해진 것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나 먹자니 싫고 버리기는 아깝다.'[我食屬厭 棄將可惜] 하였는데, 이것이 『사설』이 지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거름과 지푸라기는 지극히 천한 물건이지만, 논밭에다 가져다 뿌리면 좋은 곡식을 기를 수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맛있는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이 책을 글을 잘 볼 줄 아는 자가 보고서 채택한다면 또한 백 가지 중에 한 가지 정도는 얻을 것이 없겠는가.”(「성호사설 서문」) 『사설』은 자잘한 부스러기 말들이라는 겸손의 표현이지만, 실은 천문, 지리, 역사, 풍속, 인사, 행정 제도, 국가 정책 등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여 세상을 바로잡을 방편이 들어있다는 성호의 위대한 희망이 담긴 텍스트다.
내가 성호에게 공명한 지점은 균전론과 같은 전세나 세금 제도의 개혁 혹은 관리들의 상벌 문제가 아니었다. 18세기의 현실, 벼슬하지 않는 선비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길을 찾은 것! 그 세상에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자세였다. 그리고 자신의 정책이 실현되든 안 되든 ‘정치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점이다. 성호는 고민하고, 의심하고, 기록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성호는 18세기 지식인이 사는 법을 개척한, 혹은 삶의 현장에 능동적으로 접속한, 진정한 프리랜서였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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