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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① - '기궤'한 소품문의 개척자

by 북드라망 2014. 8. 5.

남인 2세대 백수

혜환 이용휴 : 참신한 문장, 일상의 정치


1. 아버지 이용휴와 아들 이가환


농암과 성호가 1세대 포의였다면, 오늘 만날 혜환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2세대 남인 백수다. 이용휴는 성호 이익의 조카다. 그러니까 성호는 혜환의 작은 아버지다. 혜환은 성호의 넷째 형인 이침(李沉)의 아들로 성호에게 수학했다. 1735년(영조11)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혜환이 관직을 단념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호의 둘째 형, 곧 혜환의 숙부 이잠의 죽음 때문이다. 이잠은 1706년 남인을 변론하고 노론을 비판하며 국정쇄신의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로 국문당하다 죽었다. 남인들의 몰락과 성호 집안의 침잠! 성호의 아들, 이맹휴는 과거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지만(중앙정계에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혜환은 진사로 외직에조차 오르지 않았다. 



혜환은 다만 여유롭게 삶을 관조하고 즐기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문장가로 자처했다. 다산은 성호선생에게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모두 대유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성호 후손들의 특장을 이렇게 전했다. "정산(貞山) 병휴(秉休)는 『역경』(易經)과 『삼례』(三禮) 예기』(禮記)ㆍ『의례』(儀禮)ㆍ『주례』(周禮)를 전공하고, 만경(萬頃) 맹휴(孟休)는 경제(經濟)와 실용(實用)을 전공하고, 혜환(惠寰) 용휴(用休)는 문장을 전공하고, 장천(長川) 철환(嚞煥)은 박흡(博洽)함이 장화(張華)ㆍ간보(干寶)와 같았고, 목재(木齋) 삼환(森煥)은 예(禮)에 익숙함이 숭의(崇義)와 계공(繼公) 같았고, 염촌(剡村) 구환(九煥)도 조부(祖父)의 뒤를 이어 무(武)로 이름이 났으니, 한 집안에 유학(儒學)의 성함이 이와 같았다." (「정헌(貞軒)의 묘지명(墓誌銘)」,『다산시문집』


유유자적 문장의 세계에 침잠했던 혜환은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혜환의 아들, 이가환(1742-1801)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조선의 천재로 일컬어졌던 이가환.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글은 평생토록 잊지 않고 한번 입을 열면 줄줄 내리 외는 것이 마치 치이(鴟夷 호리병)에서 물이 쏟아지고 비탈길에 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으며, 구경(九經)ㆍ사서(四書)에서부터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詩)ㆍ부(賦)ㆍ잡문(雜文)ㆍ총서(叢書)ㆍ패관(稗官)ㆍ상역(象譯)ㆍ산율(算律)의 학과 우의(牛醫)ㆍ마무(馬巫)의 설과 악창(惡瘡)ㆍ옹루(癰漏)의 처방(處方)에 이르기까지 문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정헌의 묘지명」


이렇듯 당대의 천재로 이름난 이가환은 이미 명망가로 정조의 칭예를 받으며 중앙 요로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가환도 종조부 이잠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던 터, 그 스스로 종조부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지만 비방과 참소는 그치지 않았다. 더구나 총명하면서 거침없던 이가환은 다산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으며 노론, 남인 모두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정조의 남인 옹호 덕분에 다산과 이가환이 버텨냈지만, 결국 이가환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옥사하 만다. 정조가 1800년 온몸에 난 종창을 잡지 못해 숨을 거두고, 그 여름 왕이 죽자마자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가환(李家煥) 등이 장차 난을 일으켜 4흉(凶)ㆍ8적(賊)을 제거하려 한다." 게다가 이와 때맞춰 1800년 12월 19일 봉천 축일을 맞아 천주교도들이 최필제의 약국에서 예배를 보다 포졸들에게 적발되는 사건이 터진다. 1801년 정순왕후는 사교를 믿는 자는 코를 베고 멸종시켜 버린다는 경고를 내려졌고, 다산 집안과 이가환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산의 형 약종이 처형당하고, 가환은 옥사했으며, 다산과 형 약전은 유배된다.


아버지 혜환과 달리 정치가로 살았던 이가환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학자나 문장가로 살기보다는 정치가, 행정가로 살기를 원했던 이가환은 천재라는 칭송을 받았다는 사실 말고는 이 세상에 또 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를 훨씬 넘어서는 명성을 누렸으나 그 명성을 뒷받침해줄 문장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남아있는 몇 편의 문장도 주목하기에는 지극히 평범하다. 이가환은 정계에서 노심초사 애썼으나 천재라는 두 글자만 남겼고, 아버지 혜환은 평범하게 살다 갔지만 그의 글은 특별한 문장으로 지금까지 음미된다. 




2. 붓 한자루 쥐고 신선처럼...    


혜환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섭생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병약함은 숙부 성호와 닮았다.) 허약함이 남달라서 몇 살이 되었는데도 머리뼈가 단단해지지 않아 어머니의 양육이 남들보다 백배나 더했다. 성장하면서 고기나 기름진 것을 주지 않았고 옷은 따뜻한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놀 때 방문을 벗어나지 않게 해 품안에 있는 것처럼 했다고 한다. 혜환은 장성해서도 어머니의 뜻을 지켜서 섭양을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안개나 이슬을 범하지 않고, 추위와 더위에 노출되지 않았고, 화창하고 따뜻한 때가 아니면 감히 문에서 나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바람이 어지러운 날이면 창문 열기를 꺼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섭생에 신경쓰듯, 혜환은 세상사 이런저런 일에 동요되지 않았다. 마치 도가의 지인, 혹은 신선과 같이 소요했다. 문장이 세상에 알려졌어도 마음에 집착하려 하지 않았고, 서화가 서가에 넘쳤어도 다만 뜻을 표현할 뿐이었다. 세상의 온갖 일과 집안의 온갖 일들로써 기뻐할 만하고 노여워할 만하며, 근심스럽고 서글픈 것들을 모두 하나의 잊을 망자에 붙였으며 기타 모든 생명을 손상시키고 심성을 해치는 것들을 일체 멀리 피했다. 그 결과 서른 살이 된 후에는 용모가 날로 충실해지고 신기기 왕성했으며, 61세가 꽉 찼는데도 고운 얼굴이 덜하지 않고 흰머리가 아주 드물었으며 보고 듣는 것이 거의 젊은 때와 같았다.(이병휴 지음, 「중형 혜환선생 주갑수서」,『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하』, 394쪽) 그리하여 74살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관직 없고 작위 없고 권세 없으나 

대도 있고 매화 있고 연꽃도 있네. 

취하면 노래하고 노래하면 술 마시니 

살아 있는 신선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 「스스로 마음을 달래다」(自遣), 『혜환 이용휴 시전집』, 241쪽. 


신선처럼 살았던 혜환이 자기를 증명하는 방법은 오직 '문학적 글쓰기'였다. 전업 문장가로 산다는 것은 그만의 글쓰기로 승부한다는 말이다. 혜환에게 문장은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글쓰기는 생활이자 그가 사는 이유였다. 그러니 어찌 남과 똑같은 글쓰기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혜환에게 문장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사람(한미한 사람)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세력과 지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문장가의 한 자루 붓만 있으면 된다."(평와집서」(萍窩集序),『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상』, 267쪽) 혜환은 오직 붓 한 자루 쥐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의 족적을 남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만의 색채를 오롯이 드러내는 특별한 글쓰기가 필요했다. 하여 혜환은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그만의 글쓰기에 골몰했다. 


이용휴 「자설」(字說), 년도미상. 종손 재중 (載重)의 자(字)를 유여(幼輿)라고 지은 데 관한 글이다.



3. ‘기궤(奇詭)한 문장’의 선구자    


성호학파 가운데 혜환의 포지션은 참으로 특이하다. 혜환은 작은아버지 성호에게서 배우고, 성호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포의로 살았지만, 성호와는 기질이 달랐다. 성호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경세가로 자부했다면, 혜환은 평생을 문장가로서 유유자적했기 때문이다. 성호의 제자들이 경학가로, 경세가로, 예제(禮制) 연구자로 그들만의 색깔을 형성할 때, 혜환은 색다른 문장의 세계에 빠져들어 성호학파스럽지 않은 길을 걸었다. 혜환은 명말청초에 유행했던 소품문체에서 자신의 문장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리하여 18세기 고문을 벗어나 소품을 쓰는 작가들, 즉 창신(創新)에 뜻을 둔 작가들의 조타수가 되었다. 성호학파지만 혜환의 글쓰기는 오히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연암학파의 글쓰기와 더 가깝다. 혜환의 글쓰기는 다산과 매우 다르다.(성호의 진정한 계승자는 다산이다.) 다산은 혜환의 문장을 이렇게 평했다.   


용휴는 진사(進士)가 된 뒤로는 다시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고 문장에 전념하여 우리나라의 속된 문체(文體)를 도태하고, 힘써 중국의 문체를 따랐다. 그의 문장은 기이하고 웅장하여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이나 석공(石公) 원굉도(袁宏道)에 못지않았다. 혜환 거사(惠寰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원릉(元陵 영조(英祖)의 능호(陵號)) 말엽에 명망이 당시의 으뜸이어서 학문을 탁마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찾아와서 질정(質正)하였으므로, 몸은 평민의 열(列)에 있으면서 30년 동안이나 문원(文苑 문단)의 권(權)을 쥐었으니 예부터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배들의 문자(文字)에 대해 흠을 너무 심하게 끄집어냈기 때문에 속류(俗流)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 「정헌의 묘지명」, 『다산시문집』 


다산의 말처럼 혜환은 고문(당시의 표준문체)을 배격하고 명말청초 전겸익(명대 7자(七子)의 의고적인 주장에 반대하여 문학은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했다)과 원굉도(공안파, 대표적인 성령파이자 소품문 작가)의 문체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고문을 배격하는 참신한 글쓰기, 천기의 발현 등을 외친 이는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형제였지만, 정작 개성에 입각한 새로운 문장을 선보인 이는 혜환 이용휴였다. 혜환은 소품문(일상어, 속된 어휘, 자유분방한 문체)의 실질적 개척자이자 문단에 소품문의 기이함을 본격적으로 점화한 장본인이다. 


근대의 문장에는 기(奇)와 정(正) 두 부류가 있으니, 정이란 당송팔가처럼 법도를 따르는 것이요, 기란 시내암, 김성탄, 그리고 수호전 등의 사대기서처럼 현묘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당송팔가의 여파가 흘러서 사대부의 문장이 되었고, 시내암과 김성탄의 여파가 흘러서 남인과 서얼배의 문장이 되었다. 남유용이나 황경원은 당송의 법식을 모방했으며, 이용휴와 이덕무는 시내암과 김성탄의 현묘를 모의했다. 그리하여 기를 추구하여 치달리는 자는 법식을 존중하는 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 유만주 지음, 박희병 해제,『흠영』(欽英)

본조의 선조, 인조 연간에는 앞을 이어서 작가들이 크게 성하였다. 백광훈, 차천로, 허난설헌, 권필, 김상헌, 정두경 등의 대가들은 대개 豊雄하고 高華한 정취를 주로 하였다. 영조 이래로 풍기가 일변하였으니, 이용휴, 이가환 부자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의 대가들은 혹은 기궤(奇詭)를 주로 하거나 혹은 첨신(尖新)을 주로 하였다. 그 일대의 오르내렸던 자취를 옛날과 비교해보면 성당, 만당과도 같았다.
- 김택영


『흠영』(欽英). 유만주의 일기로 1775년(영조 51)부터 1787년(정조 11)까지 작성되었다. 자신의 주변부터 나라 안팎의 일까지 광범위한 내용을기록한 것은 물론, 정통 고문부터 소설·소품문에 관한 문장론도 풍부하게 개진되어 있다.


유만주는 연암 박지원의 한 때 친구였다가 원수가 된 유한준의 아들이다. 노론 유만주는 패관기서나 소품문의 문장을 남인과 서얼배의 문장이라 치부했지만, 김택영의 평론을 보면 실상 노론 소론 남인 가릴 것 없이 이런 기이한 문체를 추구했었다. 유만주는 이용휴와 이덕무가 소품문의 대가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남인과 서얼배의 문장이라 치부한 듯하다. 어쨌든, 혜환은 소품문을 시도하고, 기궤한 문체를 구사하여 비방과 칭예를 한 몸에 받았던, 조선후기 문단사에 한 획을 그었던 문장가였음에 틀림없다. 


이용휴의 문장은 극히 괴상하다. 문장에서는 전혀 之(지), 而(이) 같은 글자를 구사하지 않는 반면 시에서는 之, 而 같은 자를 전혀 기피하지 않는다. 혜환은 결단코 일반 문인과 다른 모습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분명 병통이나 그의 기이한 면이기도 하다. 혜환은 장서가 제법 풍부한데 그가 소유한 책은 모두 기이한 문장과 특이한 서책으로 평범한 것은 한 질도 없다. 그의 기이함은 참으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1784년 기록」,『흠영』  / 안대회, 『이용휴 소품문의 미학』, 재인용. 239쪽   


혜환은 합고(合古)에서 이고(離古)를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기(奇)는 그로테스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표준 문체의 격식(正)을 따르지 않은 새롭고 개성을 추구한 문체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보통 문장에서 많이 쓰는 연결사로서의 之나 而를 쓰지 않고, 시에서는 오히려 기피하는 ‘지와 이’자를 사용했다는 말은 문체상의 파격을 구사했다는 의미다.  


고양이를 그리는 자는 쥐구멍을 지키고 있다가 쥐를 잡는 것을 많이 그리는데, 

이 그림은 유독 고양이가 꽃과 나비를 희롱하는 것을 그렸다. 이것이 곧 문장가의 번안법이다.

畵猫者, 多畵守穴搏鼠, 而此獨畵弄花戱蝶. 乃用文章家翻案法也. 
-「김명로군이 소장한 화당에 쓰다」(題金君溟老所藏畵幢),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상』, 305쪽 


화가 김명로의 그림에 대한 비평문이다. 혜환의 글은 짧다. 구구하게 늘어놓지 않고 핵심만 말한다. 이렇게 짧으면서 핵심을 드러내는 글이 소품문의 전형이다. 이 글은 겨우 26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명로의 고양이 그림이 다른 고양이 그림과 얼마나 다른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냈다. 쥐를 잡는 고양이가 아니라, 꽃과 나비를 희롱하는 고양이! 발상의 참신함. 이것이 명로 그림의 매력이자 새로움이다. 그것만으로 이 그림은 다른 그림과 천양지차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혜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문장가의 번안법이란다. 문장은 자고로 모방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다. 기존의 문체와 가치와 상상을 뒤집는 글, 그것이 바로 기궤한 문장이다. 혜환은 문장의 새로움으로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을 보여주고자 했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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