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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아파서 살았다

[아파서 살았다 최종편] 오랜 고통과 불안을 '만나다, 철학하다'

by 북드라망 2013. 6. 14.

‘경험’에서 ‘지성’으로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부처님을 따르던 무수한 제자들과 공자의 문도 3천 명을 위시하여, 주자의 강학원을 찾았던 2천 명의 학인들, 양명의 뜰에 모여든 개성 넘치는 문사들. 비단 이들 대가들만 그랬던 건 아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문사가 있었고, 그곳엔 가르침을 받기 위해 천 리를 마다않고 오는 학인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코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그 ‘코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했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것이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588쪽



인간적 성숙


두 발로 다시 선 후, ‘비로소 한 개 사람이 된듯한 자신감’으로 살아가던 2000년 초,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 4중 추돌 사고가 났다. 그리 큰 충격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심해졌고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렇게 충천했던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런 정도의 충격에도 견디지 못할 몸이라니. 살다보면 이런 사고가 다시는 없으리라 어떻게 장담하나? 이보다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데 그땐 어쩌지?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아 두어야 불안감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5억? 10억? 과연 많은 돈을 가지면 불안하지 않을까? 돈이 편안한 미래를 보장해 줄까? 처음 독립을 할 때, 매월 50만원만 벌면 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때 그 액수의 몇 배를 벌고 있는데도 왜 불안하지?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벌면 그땐 또 안전을 위해 마련해야 하는 돈의 액수가 더 커지는 게 아닐까? 결국 경제력이 이 불안감을 씻어주지는 못하는 것 아닐까? 그럼 어떻게 해야 불안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러던 2001년 여름, 동료의 추천으로 이유진의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를 읽었다. 그 중 ‘한가한 삶의 기반’에 나오는 내용.


옛 사람들이 “소인은 가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쉴 줄을 모른다”고 한 것은 한가로운 삶에는 반드시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그 기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적 성숙(La maturité)이다.
 

돈과 속도를 숭상하는 산업혁명 이후의 서양인들은 그전의 사람들보다 유치하다. 그것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인간을 성숙시키는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의 턱없이 분주한 생활은 인간의 성숙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퇴행(退行)을 강요하고 있다. 일 년 열두 달 ‘메트로(Métro 전철), 불로(Boulo 일), 도도(Dodo 잠)’의 반복 생활과 어른의 유치증(幼稚症)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인간이 돈벌이에 너무 시달리면 바람직한 인격의 성숙은 불가능해진다. 
 

철학자 니체는 모든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류된다면서 하루 중 3분의 2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다. 시간은 돈보다 더욱 귀중하고, 한가로운 시간이야말로 무의식이 비로소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p.77~78)


인간적 성숙. 이 구절을 보는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여름밤을 꼬박 새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면 돈이 없어도, 병이 들어도, 믿었던 관계가 틀어져도, 가족을 잃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가! 그 길이 어렵든 어쨌든 비빌 언덕을 찾고 나니 일단은 안도감이 들었다.



덜 쓰고 살기, 내 몸을 모르는 나


 ‘인간적 성숙’을 마음에 품고서도 여전히 바쁘게 살았다. 그런 중에도 문득문득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2005년 가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때,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미치도록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걸 후회하고 대학원 진학을 꿈꿨고 27년 만에 꿈을 이뤘다. 
 

대학원 공부는 생각보다 벅찼다. 영어 일색인 논문과 교재 읽기. 오빠와 조카들의 도움을 받으며 힘들게 과제를 해결해 가는 와중에도 외부 강의는 점점 늘어났다. 몸에 무리가 오는 듯했지만 병상에서 보낸 20년의 공백을 채우고야 말겠다는 듯, 학생들 그룹지도와 강의로 동분서주했다. 논문 학기를 앞 둔 그때는 숨이 턱에 차올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으나 무엇 하나 정리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개강을 며칠 앞둔 2007년 2월 21일, 그날도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려고 급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허벅지가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뼈가 부러진 것이다. 화장실 문턱을 넘는 데에 1시간이 걸렸다. 오른쪽 대퇴부 복합골절. 모든 일이 중단되었다. 강의도, 독서지도도, 대학원 공부도. 


샤갈, <이카루스의 추락>



퇴원 후, 몸은 침대에 묶여 있는데 마음은 자유로웠다. 한 평 감옥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게 이런 걸까?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놓지 못했던 일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니 편안했다. 수업이 없는 한가한 시간엔 침대에 누워 생각이 일어나면 그걸 따라갔다. 인간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야 인간적으로 성숙할 수 있을까? 왜 지금까지 내가 한 공부는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없을까? 나의 이 의문에 답해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들어가 보고도 싶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런 생각에 젖어있던 2008년 가을, 미국 발 경제위기가 닥쳤고 우리 경제는 또 다시 요동쳤고,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위기라는 말을 쏟아냈다. 경제적 불안감이 또 다시 고개를 들었다. 6개월이면 붙는다던 뼈는 1년이 지나고 다시 6개월이 더 지났는데도 붙질 않았다. 남의 손을 필요로 하는 내가, 모든 걸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경제 형편은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야 하고, 외부는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것. 그렇다면 자본주의 구조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자급자족?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우선 덜 쓰고 사는 것. 가계부를 더 꼼꼼하게 적었다.
 

인간적 성숙과 덜 쓰고 사는 걸 생활의 지침으로 정하고 나자 이를 실행에 옮기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건강이었다. 건강이 더 악화되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병원이 이걸 해결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30여 년을 어느 하루 치료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관절의 변형은 계속되었고 수술이 이어졌다. 손가락과 발목 관절의 통증도 여전했다. 몸은 변하고 있는데 처방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주치의가 몸 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환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 의사가 야속했다.
 

그제야 너무 오랫동안 몸을 의사에게만 맡겨 두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이 넘도록 왜 몸에 대해, 병에 대해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 밤을 새며 한 공부는 왜 불안감 해소에 도움이 안 될까? 늘 바쁜 일상에 묻어두었던 의문. 문득문득 스치는 건강에 대한 불안감. 그것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내 몸을 모른다’는 것. 우연히 주어진 한가한 시간은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내 몸을, 내 병을 내가 모른다는 그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몸의 주인이 되자


2009년, 2년 만에 드디어 뼈가 붙었고 다시 걸을 수 있었다. 그해 1월 중순부터 침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를 맡은 분은 내 발병 과정에 귀를 기울였고, 내 몸의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런 봉사자의 태도는 비록 ‘증’은 없었지만 나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다. 치료 후 3개월 정도 지나자 통증이 눈에 띄게 줄었고, 검사 결과 염증 수치도 내려갔다. 5개월 뒤에는 스테로이드를 끊었다. 그러면서 식이요법과 활원운동을 할 때의 그 느낌, 내 안의 치유력에 대한 믿음이 되살아났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침뜸 치료를 하면서 마지막 학기 등록을 했다. 수업은 빡빡하게 진행되었다. 2년 간의 병상 생활에 약할 대로 약해진 몸이 버티지를 못했다.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논문 준비로 1년 여를 보낸 2010년 5월, 처음엔 이가 아팠다. 치과 치료를 받다가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방이 마구 돌기 시작했다. 기운이 달려서 그런 줄 알았다. 일주일을 고생하다가 병원에 가니 이석(耳石)증이었다. 그 후 한 달쯤 지나자 땀이 심하게 흐르고 몸무게가 5킬로그램 이상 빠졌다. 내과에 갔더니 갑상선 기능항진증이라고 했다.
 

갑상선 기능 억제제를 투여하자 간 기능 수치가 올라갔고, 의사는 그 데이터를 앞에 놓고 최악의 경우를 예로 들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또 어떤 의사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마시면 평생 동안 하루 한 알 약으로 호르몬 조절이 되니 그게 편하지 않겠냐고도 했다. 우왕좌왕 불안에 떨었다. 30여 년을 오직 류머티즘 외길만을 걸어온 내게 찾아온 이 불청객은 어마어마한 수업료를 내고 길러왔다고 믿은 내공(?)이 모래 위에 쌓은 성임을 알게 해 주었다. 우선 약물치료를 하겠다고 했다. 약 복용 후, 갑상선 기능은 항진에서 저하로 저하에서 다시 항진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간에 부담을 주는 류머티즘 치료제인 면역억제제 복용을 중단했다. 16년 간이나 복용하던 그 약을 중단한 이후 내 몸에는 별 이상 증세가 보이지 않았고, 그때부터 류머티즘 처방에 불신이 생겼다. 이어서 갑상선 처방에도 의구심이 생겼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2년이 흘렀다. 내 안에서 이젠 약을 그만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에 약을 아주 끊지는 못하고 조금씩 줄여갔다.
 

침뜸 치료의 효과와 갑상선 기능 항진증으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 면역억제제 복용 중단.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다시 한 번 내 몸을, 내 병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내 몸을 가장 잘 아는 건 내가 아닐까, 내게서 생겨난 문제이니 내가 해결해 보자며 어디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길을 찾다가 2011년 12월 감이당을 찾았다.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감이당과 인연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0년대 후반(97~98년 쯤으로 기억한다)에 수유 연구공동체에 관해 처음 들었다. 제도권 내에서 하는 학문 탐구가 아니라 제도권 ‘밖’에서, 그것도 몇몇 소장학자들이 ‘함께’ 공부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신선했다. 늘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었다. 2009년 1월 용산에 있는 수유+너머를 찾아가 카프카 읽기에 참여했다가 계단이 많아 훗날을 기약한 적도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 동안 공동체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집에서 가장 가까운 데다가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감이당을 선택하고 ‘마음 세미나’에 참여하며 동의보감도 수강했다. 일 년 정도 감이당을 오가며 점점 제대로 공부해 보자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35년 전, 현대의학은 내 몸의 이상을 류머티스성 관절염이라 명명했고, 지금까지 그 병명에 대한 치료를 계속해 왔다. 내 몸은 변해가고 있었지만 의사는 변하는 생명체인 몸이 아닌 병명에만 관심을 두는 듯했다.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변화들을 의사에게 이야기했다. 내 몸 상태를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약의 종류만 늘어날 뿐이었고 그럴수록 내 몸은 부분으로 나뉘어진 채 임상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면역체계니 항체활동이니 하는 이러한 용어들은 내가 접근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참으로 버거운 상대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에 난 병의 원인을 탐구해 볼 염조차 내지 못했던 것.
 

병은 내 몸에서 일어났는데 왜 그걸 치료하는 건 오직 그들만의 권한이 되어야 하는지. 의사들만이 내 몸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젠 내가 내 몸을, 내 병을, 내 마음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길 차례. 감이당 대중지성 1학년에 입학 신청을 했다.



이제는 지성의 힘으로


2012년 가을부터 다시 몸이 야위고 기력이 떨어졌다. 12월이 되자 절정에 달했고 새해가 되자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건강검진차 병원 갔다가 갑상선 기능 검사를 했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약 복용을 종용했다. 그러나 나는 잠시 약 복용을 보류했다. 약을 먹더라도 내 판단도 반영하고 싶었다. 우선 현대의학이 붙여 준 갑상선 기능항진증이라는 ‘병명’을 내려놓은 다음, 아직은 보잘 것 없지만 그 동안 배운 의역학적 시선으로 내 몸을 바라보았다.
 

동의보감 시간에 배운 바로는 겨울에 병을 앓는 것은 여름에 그 원인이 있었다. 지난여름, 말로만 듣던 열대야를 난생 처음 몸으로 겪었다. 게다가 감정의 홍역까지 진하게 치렀으니  정(精)이 바닥이 날 밖에. 가을이 되자 감기가 찾아왔다. 나은 듯하다가 또 걸리기를 대여섯 차례 반복하고 나니 먹는 것도 시답잖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게다가 건강에 대한 불안까지 겹쳐서 몸도 마음도 야윌 대로 야위었던 것.
 

이렇게 진단을 내리고 보니 처방이 나왔다. 우선 섭생에 신경을 쓰면서 제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틈틈이 산책도 하며 정(精)의 소모를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명랑인생 건강교본』을 참고로 밥에 흑미와 검정 콩, 거기다가 빈혈에 도움이 된다는 팥을 섞어 안치고, 최대한 외출도 자제하고 말수도 줄였다. 인터넷 전화만을 켜 둔 채 핸드폰도 집전화도 사용을 중지했다. 이런 생활을 막 실천에 옮기던 차에 감이당 수업이 시작되었다. 몸을 좀 더 추슬러서 내년에 입학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휴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가,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휴학이냐며 시간이 많으면 망상이 많아져서 몸에 더 해로우니, 공부를 하지 않으려면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더 많이 하라고 했다. 일을 더 많이 할 바에야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자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갑상선 치료약 복용은 보류한 채이고 별 탈 없이 공부도 하고 어머니 수발도 들고 있다. 


카스파 프리드리히, <창가의 여인>

1학기에 읽은 책들은 세상과 나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도덕의 계보』는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았던 가치들을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했고, 푸코의 글들은 자기배려라는 덕목을 새롭게 품도록 했다. 그 중에서 루쉰의 강의를 듣던 날의 체험. 그날도 곰샘(고미숙 선생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붙들지 않고, 어떤 기대도 희망도 그리고 절망도 없이 ‘적막’ 가운데에서 쓴 루쉰의 글쓰기에 대하여.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망상에 불과하며, 우리가 힘든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끼어든 온갖 망상들 때문이라는 것. 무언가 직면할 때, 어떤 망상도 없이 대상과 맞닥뜨릴 때, 고통도 불안도 없다. 이 말을 들으니 갑자기 6년 전의 한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대퇴부 골절로 수술을 한 그 이튿날 저녁으로 기억한다. 진통제를 맞아도 가라앉을 줄 모르는 통증. 어떤 것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듯한 통증 앞에 참 막막했다. 2월의 밤은 길었고 통증과 함께 찾아드는 불안감. 주치의가 출장 중이라 수술이 잘못된 게 아닐까? 혹시 염증이 생기고 있나? 집도의가 농담처럼 한, 세상에서 제일 긴 쇠막대를 넣고도 모자라 남의 뼈도 좀 갖다 이었으며 못을 아홉 개나 박아 두었으니 붙기만 하면 튼튼할 거라던 말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정말 이 뼈가 붙기는 하는 걸까? 불안이 통증을 가중시켰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렇게도 들끓던 불안이 일시에 사라지고 오로지 통증만이 존재하는 듯한, 찰나였지만 어떤 느낌보다 선명했던, 통증이 사라진 건 아닌데 통증이 없었던 순간(언어의 빈곤함으로 그 순간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그날 그 순간, 나는 그 어떤 망상도 없이 고통을 직면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슈나가 말하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며 루쉰의 적막 가운데서의 글쓰기이며 니체가 말하는 원망도 자책도 없는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삶이며 푸코가 말하는 자기배려가 아닐까. 그날 집으로 돌아와 일기를 썼다.


불안은 삶의 국면을 직면하지 못할 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망상에 불과하다. 혜가도 일찍이 이런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마음이란 본디 평화롭다. 거기엔 어떤 불안이나 동요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더욱 요동친다’(고미숙, 『운명사용설명서』, 북드라망, 2012, 17쪽)
 

비록 찰나였지만 어떤 환희 같은 걸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거의 모든 고통들은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사이에 끼어드는 망상 때문인 것이다. 다만 그 직면하기를 오래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2013. 3. 10. 일)


그날 그 순간의 직면하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막연히 생각해 왔던 ‘인간적 성숙’이란 이런 상태를 일컫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어떤 문제 상황에 닥칠 때마다 나를 그런 극한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없고 그런 상황이 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면 망상없이 순간순간을 직면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다. 경험으로 해결하던 이 지점을 이젠 지성의 힘으로 넘어서는 것. 경험에서 지성으로. 고도의 지성을 갈고 닦아 앞으로 겪을 크고 작은 마디들을 넘어가자.


병을 이기려고 애쓰던 10년이 흐르고, 병과 함께 살겠다고 마음먹은 채 또 10년이 흐르고, 홀로서기 후 밥벌이를 하며 그 동안 못다 한 일을 원 없이 하던 10년이 또 흐른 뒤, 그제야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섰다. 왜 내 몸을, 내 병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를 알고 그리고 천지의 기운을 느끼며, 우주 순환의 리듬을 타며 몸에 병 없기를, 삶에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 고통들을 지성의 힘으로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기르리라. 감이당에서 글을 쓰고 의역학 공부를 하고 암송을 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오직 하나, 고도의 지성을 연마하는 것.


레메디오스 바로, <하모니>



“그게 오른 공부다”


어머니가 편찮으신 지 보름이 지났다. 첫 글을 연재한 바로 다음 날부터 골반 뼈와 아랫배에 통증이 심해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셨다. 사흘쯤 지나자 아예 자리에 누우셨다. 그 이후에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셨고 내게 대소변을 받아내게 한다는 걸 힘들어하셨다. 지난 토요일 저녁부터는 기력이 완전히 떨어지셨다. 지난 일요일엔 감성 수업을 가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 내가 없으면 많이 불편해하시니 결석을 해야 하나 싶어 어머니께 여쭈었다. “오늘 공부하러 가지 말까?” 어머니는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하셨다. “안 가면 내사 좋지마는, 언제 날(나을)지도 모르고…… 그 좋은 공부를 해야 대제(되지). 갔다 일찍 온나.”라고.
 

가끔씩 어머니 침대에 나란히 누워 고미숙 선생님 강의나 도담 선생님 강의 내용을 이야기해 드리곤 했다. 편찮으신 후에도 가끔씩 상태가 호전되시는 날엔 여전히 왼쪽 귀에 대고 감이당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어머니가 그러셨다. “그게 오른 공부다. 나도 점꼬 눈 발그면 그 공부를 하고 싶다.”고. 대학원에 갈 때도 논문을 쓸 때에도 어머니는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몸 상해가면서 그클 공부를 하노” 하시며 내 건강을 걱정하시며 못마땅해 하셨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있어서 안심이 된다고 하신다. 그리고 “기대가 젤 나쁘다. 그런데 안 그럴라고 해도 잘 안된다. 니는 공부해서 내그치 살지 마라. 아무 기대도 하지 말고 살아라” 하신다.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한다. 아흔 다섯,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니가 삶과 죽음을 오가며 남기신 유언 같은 말씀이기에. 그리고 30년을 돌아돌아 우여곡절 끝에 내가 찾은 길이기도 하기에. 이 길을 이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고 있다. 앎의 코뮌 ‘감이당’에서 여러 학인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그래서 행복하다.



_오창희(감이당 대중지성)



※ 4주 동안 여러분과 함께했던 <아파서 살았다>의 마지막 편입니다. 그동안 많은 응원이 있었기에 오창희 선생님도 즐겁게, 저또한 즐겁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특별한 시간을 마련할 예정인데요~ 다음 주에는 연재 후기 겸 인터뷰(라고 읽고 수다라고 읽는…)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아파서 살았다>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랑인생 건강교본 - 10점
김태진 지음, 최정준 감수/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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