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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아파서 살았다

어떻게 해야 '글'을 쓸 수 있는가?

by 북드라망 2017. 3. 3.

아파야 쓴다

- 글쓰기, 간절하게, 한 발짝부터 시작하기



* 어느 학인의 고백 

- 글을 쓸 때면 간식을 갈망하게 된다. 그냥 간식은 안 되고 무척 구체적인 간식을 먹고 싶어진다. 예를 들면, 미주유통 동그란 뻥튀기 과자. 여전히 글은 안 써지지만 간식을 먹으며 시간이 흐른다. 그러고 나면 이제 잠이 온다. 한 시간 넘게 까무룩 잠이 든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밀려오다가 살짝 화가 나면서, “그냥 써!”를 속으로 외치면서 분노의 타이핑을 시작한다. 생각했던 개요와 영 먼 글을 써 놓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런 과정을 3-4번 반복하다가 잠시 글쓰기를 멈춘다. 글쓰기와 상관없는 일들을 한다. 베이킹소다로 화장실 청소하기라든가....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기운을 차려서 다시 글쓰기로 돌아온다. 대개,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나면 그런다. “말하는 대로”라든가, “한 번도 제대로 달려본 적 없었다는 것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가사를 듣고 나면 에너지가 다시 모여 글이 써진다.


우리 모두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어디 이뿐인가?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머리가 하얘지는 백지형, 컴퓨터를 앞에 두고 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앉았다 엎드렸다를 반복하는 폴더형, 다음엔 정말 맘 잡고 차근차근 잘 써 봐야지 하는 미래기약형, 심지어는 무의식을 동원해서라도 알리바이용 사건을 일으키고야 마는 자해형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몸부림은 참으로 천태만상이다.



‘그 한 발짝’, 누구나 힘들다


* 글쓰기, 무엇이 힘든가?

- 새로운 생각이 없다. 너무 빤하거나 식상한 개요를 세울 때가 많다. 

- 질문을 가지는 것이 너무 힘들다. 

-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한 문장 만들기도 힘들 때, 뭐가 문제지 당연히 의문이 든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 내가 무얼 알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은데 많은 소재들을 한 번에 풀어내겠다는 욕심만 앞서서 다 쓰려다 보니 글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 내 사유를 펼쳐야 하는 지점에 가면 늘 막막하고 답답하다. 뚫고 나가지 못한다. 나도 그것을 내 힘으로 뚫고 싶다. 그러나......

- 글을 밀고 나가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까지 안전선을 확보하고 그만 밀기.

- 자의식과 싸우는 것, 잘 해야지 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등.

- 글을 쓸 때 맥락에 맞지도 않는, 멋진(!) 표현이나 단어를 고집하다가 삑사리가 난다.


어떤 글을 쓰든 기-승-전-결의 마디를 넘어야 하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위 설문을 읽어보면 첫 단계부터 만만치가 않다. 설문에 참여한 학인들도, 얼마 전에 있었던 ‘도전 칼럼쓰기’의 많은 조원들도 문제제기부터 힘들어했다. 문제제기가 분명하면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구성하고 실제로 써 내려 갈 수는 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막히면 글이 갈팡질팡 갈지자 행보를 한다. 다행히 질문을 찾아서 문제제기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승’의 단계도 수월치 않다. 어렵사리 문제의식을 가졌다가도 얼마 못가 그것을 놓아버리거나 다른 걸로 도피하기를 일삼다 보니, 그 문제가 펼쳐지는 구체적인 상황을 관찰하고 탐색하는 데는 한없이 게으르다. 



어찌어찌 해서 이 단계를 넘어섰다 해도 ‘전’의 단계에 가면 다들 막막해진다. 거의 대부분의 학인들이 여기서 가장 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단계가 사유의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좀 버거운 걸 가져다가 그 틈을 논리로 메워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모험을 하기보다는 안전제일주의자가 된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안전선을 확보하고 거기서 멈추는’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론에 가서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 군소리로 마무리를 짓고 만다. 곰샘께서 그러셨다. ‘전’ 단계에서는 그야말로 ‘뒤집기’를 잘해야 먹음직스런 전이 된다. 그런데 행여 부치던 전이 망가질까봐 밍그적거리다 태워버리거나, 기껏 뒤집는다는 게 아예 후라이팬 바깥으로 나가떨어지게 삑사리를 내거나! 한다고. 그러니 우리는 늘 하는 생각에서 한 발짝을 더 못나가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말씀. 게다가 우리가 결론을 쓰는 순간 그나마 얼기설기 써 오던 글을 아주 ‘결’딴을 내고 만다는 것.ㅎㅎㅎ 참으로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웃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ㅠㅠ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누구나 비슷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한다면 이 몸부림은 글쓰기를 하려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아닐까. 심지어는 우리가 글쓰기의 달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곰샘조차도 힘들다는 투정을 하시니.(물론 이것이 그다지 위안이 되진 않는다. 결과물이 매우 다르므로.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힘들다! 힘들어!를 연발하며 좀 쉽게, 아니 쪼끔 양보해서 덜 힘들게 쓰는 방법은 없을지,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린다. 이 주제를 잡으면 쓰기 쉬울까 저 주제를 잡으면 쉬울까 따져보고, 옆 사람의 주제를 탐내기도 하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지레 포기하기도 하고, 이랬다면 저랬다면 후회도 하고, 끈기와 고민 없음을 자책하고, 급기야 문제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왜 이리 삶이 평탄할까 한탄하기까지.


하지만 글쓰기가 원래 힘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글쓰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글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은 앞의 글 “생명은 글쓰기를 원한다”를 읽어 보시길) 마음을 바꿔 먹는 수밖에. 글을 쉽게 써 보겠다는 것부터가 오만임을 인정하고, 끝까지 밀어붙일 동력을 찾기로.



글쓰기의 동력, ‘간절함’


‘도전 칼럼쓰기’를 하며 조원들과 10주간 기-승-전-결로 씨름했다.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글이 있었다. 내가 감이당에 온 2012년 봄 ‘마음 세미나’에서 쓴 첫 에세이. 기-승-전-결 같은 걸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 그저 감이당에 오기까지의 삶의 굴곡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글이었다. 스물한 살에 류머티즘을 앓기 시작한 때부터 병을 몰아내기 위해 이른바 ‘명약’을 탐방하며 보낸 10년의 세월,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머리를 때린 ‘아프면서 살면 안 되나?’하는 생각의 전환, 그 이후 뭘 하면서 살까를 고민하며 걸음마를 연습하던 또 10년의 세월, 그 이후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서 자신감이 충천했던 시절, 교통사고와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건강과 경제력에 대한 불안감이 되살아났던 시기, 뒤이어 일어난 생각의 전환-‘내 몸을 내가 탐구해야겠다, 돈을 더 벌려고 애쓰지 말고 덜 쓰고 살자’- 등등.


이렇게 류머티즘과 씨름하며 살아온 날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글이었는데, 거기엔 기-승-전-결의 흐름이 있었다. 특히 그날 이후에 쓴 여러 번의 에세이에선 그렇게 힘들었던 ‘전’의 ‘뒤집기’가 제대로 된 것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날 한순간에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을까? 그런 전환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선생님의 코멘트! 


- 자나 깨나 생각하라. 그러면 자다가 영적 계시를 받기도 한다.^^

- 겨우 일주일 낑낑거려 놓고 힘들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할 것.

- 간절한 마음으로 쓰라.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다. 바로 ‘간절함’이다. 20대 그 시절 내 마음은 참 간절했다. 하룻밤만이라도 두 다리 쭉 펴고 통증 없이 자고 싶었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두 발로 성큼성큼 걷고 싶었다. 이런 바람은 늘 내 머릿속에 있었고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었고 일기를 썼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오랜 투병에 지루함을 느꼈지만 그 문제를 놓을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한 부딪치는 문제였으니까. 관절을 움직이지 않고 일상을 꾸리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다가 느닷없이 ‘꼭 나아야 하나? 이대로 살면 안 되나?’하는 ‘의문’이 들었을 때 뭔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고, 정말로 “영적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 


사유의 전환은 한순간에 일어났지만, 10년이 걸렸다. 이런 방법으로는 더 이상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간절한’ 마음으로 길을 찾아 걸어온 10년이란 세월은 어처구니없게도 나를 막막함 앞에 세웠고, 그 동안 걸어오던 길이 갑자기 끊어진 듯한 그 막막함 앞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생겼고, 뜻밖에도 거기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렇다고 해서 늘 자신을 그런 절박한 삶의 현장 속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그건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에 버금가는 과정 없이 그런 빅뱅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스로 선택 가능한 길을 찾을 수밖에. 


그 중 하나가 바로 ‘수련으로서의 글쓰기’다. 삶에서 생각지도 않게 맞닥뜨린 류머티즘이라는 문제가 어쩔 수 없이 ‘기-승-전-기-승-전...’의 마디들을 넘어오게 했다면, 글쓰기는 스스로 건져 올린 질문을 품고 지성으로 이 마디들을 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막함 앞에 설 때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 동안 글쓰기 장에서 우리가 들었던, “간절한 마음으로 쓰라”, “자나 깨나 생각하라”는 코멘트가 살아서 움직인다. 손에 만져지는 듯, 피부에 닿는 듯, 몸에 각인되는 듯. 비로소 실감이 난다. ‘간절함’의 강도와 밀도가!


*간절한 마음으로

- 내가 궁금한 것, 책을 읽다가 생긴 궁금증의 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읽었다. 그리고 글을 썼다. 나만 그 점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썼을 때 많은 공감을 얻었다.  

- 내 옆의 친구가 내 글을 읽고 자기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 친구가 진심으로 잘 읽었다고 말해줬다.

- 쓰고 싶은 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니까 원했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질문을 놓치지 않고 계속 생각하기. 마음, 태도는 ‘이것 하나만은 알아야겠다’라는 것이었어요. 

- 내가 살면서 죽기 전 마지막 글을 쓴다고 생각하고, 어떤 질문을 갖고 글을 써야 후회가 없을지 생각했다.^^;; 너무 비장했나?


학인들도 같은 고백을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임했더니 그나마 원하는 글이 써졌다고. 나의 궁금증 하나만은 풀고야 말겠다는, 친구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이것만은 알아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쓰고 싶은 글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글을 쓴다는 비장한 각오로 글쓰기에 임했다는 학인도 있었다. 


지금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고민하고 있다면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질문이 내게 얼마나 간절한 문제인지, 그것을 풀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딴 짓’은 필수다


우리는 글을 쓰다가 힘들면 ‘딴 짓’들을 한다. 그리고는 자책한다. 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인가? 왜 엉덩이를 진득하니 붙이고 글쓰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다지도 산만하게 구는 걸까? 하고. 그런데 이참에 한 번 생각해 보자. 한 번 시작하면 몇 시간이라도 그렇게 앉아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긴 작가 조정래 선생은 대하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하루 열여섯 시간을 내리 쓴다고 하지만, 우리가 감히 그 경지를 넘볼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이케가야 유지 박사는 그의 저서 『해마』(은행나무, 200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뇌는 지치지 않는데, 두뇌 회전이 안 된다거나 뇌가 지쳤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눈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매일 만나는 새로운 정보들을 분류하고 있고,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싶을 때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정보들 속에서 연결 고리를 찾아내 순식간에 서로 조합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끌어낸다’고. 그래서 우리 뇌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고. (121-122) 


- 글이 안 써질 땐 산책하거나 샤워를 한다. 그러다 보면 문득 막혔던 부분이 풀릴 때가 있다.

- 달리기. 사실 글을 쓰는 것을 위해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음.

- 어떤 책을 읽든, 어떤 활동을 하든 써야 하는 글과 이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기존에 생각지도 못했던 회로들이 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인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딴 짓’을 했더니 문득 막혔던 게 풀리고,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리기도 하더라고. 달리기를 했더니 글쓰기에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한 어느 학인의 경험담이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엉뚱한 얘기만은 아닌 듯하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신체 활동을 함으로써 힘을 쓰는 방식을 다르게 하는 것도 뇌에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글을 쓰다가 막히면, 방안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간식을 먹을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청소를 할 수도 있고, 좀더 여유가 있다면 산책을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있다. 그러니 피로해진 눈도 쉬게 할 겸, 잠시 모니터 앞을 떠나는 걸 자책하진 말자. 이것이 도피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막힌 곳을 뚫어보려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수련의 과정이라면 그런 ‘딴 짓’은 더 적극적으로! 


‘글쓰기로 수련하기’. 감이당의 이 모토에는 이미 글이란 ‘아파야 쓰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갓 소일거리거나 장식물이 아니라, 내 사유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수련으로서의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질문을 품는다는 것도 아픈 일이고 그 질문을 들고 글쓰기의 마디를 넘으며 새로운 길을 내는 것 또한 고통스런 과정이다. 살면서 몸이 겪을 과정을 글쓰기의 단계로 겪는 것이니까. 글쓰기, 그 자체가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에 아플 수밖에.  


***


7월 말 ‘공부생활백서’의 ‘글쓰기 팀’이 꾸려졌다. 그 뒤 학인들에게 글쓰기와 관련된 설문을 했고, 많은 학인들이 성의껏 답해 주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각자 쓰고 싶은 글의 개요를 짜기로 하고, 주제는 평소 꼭 써 보고 싶었던 것으로 정했다. 그 이후 우리 네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 번씩 꾸준히 만나 서로의 글을 함께 보며 필자의 글쓰기에 동참했다. 피드백으로 채찍질하고 데드라인으로 압박하며 잘 아플 수 있도록 ‘격려’하면서. 그때 내가 들고 간 질문은 ‘글쓰기는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글이란 아파야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글이란 아파야 쓰는 것이니, 힘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아닐까.


글_오창희(공부생활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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