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새로운 연재가 시작됩니다. <아파서 살았다>라는 코너입니다. '아팠기에' 살 수 있다는 말, 조금 이상하지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병'을 없애야 할 무엇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요?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고미숙 선생님은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으로 병을, 고통을 '앎의 의지'로 전환시키면 누구나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병도 없을지 모릅니다(물론 동일한 병명은 있습니다;;). 누구와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하느냐에 따라 말이지요. 그래서 이 코너에서는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된 '아파서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
시작은 미미했으나 과정은 ‘창대’했다
1979년 5월, 나는 류머티스성 관절염 진단을 받았다. 몸에 이상을 느낀 지 일 년 만이었다. 요즘 같으면 대학병원마다 류머티스 내과가 따로 있고 몇 가지 검사만으로도 류머티즘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관절 이상은 정형외과 소관이었으며 일단 엑스레이 상에 문제가 없으면 작은 관절이 대칭적으로 붓는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증상이 어느 정도 진행돼야 비로소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연유로 발병에서 진단까지 일 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병은 꽤 진도가 나간 상태였다. 류머티즘은, 항체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적을 공격하지 않고 자기 몸을 공격하는, 면역 체계 이상으로 오는 질병이기에 항체 활동이 왕성한 젊은 사람에게서는 진행 속도가 더 빨랐다. 남자에 비해 여자들의 발병률이 훨씬 높았고, 나이가 좀 든 주부들이 많았으며 젊은 여자의 경우에는 주로 산후에 이 병을 얻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난 결혼도 하지 않은 대학 3학년, 이제 막 스물두 살 봄을 맞고 있었다.
룸메이트, 할머니가 돌아가시다
난 경상북도 오지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오빠와 언니들은 일찌감치 대구로 서울로 유학을 가고, 난 할머니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 3년을 제외하고는 늘 할머니와 함께 잤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할머니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셨고,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시는 이외의 모든 것들을 누군가 챙겨드려야 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가 조반상을 차리실 동안 할머니 수발을 들었다. 세숫물을 떠다가 수건을 두르고 얼굴을 씻긴 다음 옷을 갈아입히고 저고리 고름을 매고(난 지금도 남의 고름을 더 잘 맨다) 머리에 자주 댕기를 드려 비녀를 꽂아드리고, 그러고 나서 등교할 채비를 했다.
이렇게 함께 지내던 나의 룸메이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3세. 대학 2학년이던 1978년 5월 7일(음력 사월 초하루) 저녁 무렵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죽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내 방에 들어가 혼자서 눈물을 찔끔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언제쯤인지 어렴풋이 초인종 소리가 나고 대문 열어주라는 어머니 목소리에 잠이 깼다. 서울에서 오빠들이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꼬리뼈 오른쪽 부위에 뼈가 어긋난 듯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일으켜 주면 서서 걸을 수는 있었지만 장례 기간 내내 통증은 가시질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그때만 해도 이 병과 긴 시간 동안을 씨름하게 될 줄 알지 못했다.
할머니 장례를 마치고 대구에서 유일한 대학병원에 갔다. 디스크는 아닌 것 같다며 자세를 바르게 하고 될 수 있으면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라고 했다. 그해 12월, 가운데 손가락이 붓고 아팠다. 동상인 줄 알았다. 겨울방학을 하면서 막 다니기 시작한 피아노 학원, 그곳의 열어 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그런가 싶었다.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 그런데도 쉬 낫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79년 1월에 아는 한의원에 갔더니 류머티스성 관절염인 것 같다고 했다. 한약을 먹어도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그해 5월, 할 수 없이 다시 1년 전에 갔던 그 대학병원을 찾았고 그때서야 겨우 류머티스성 관절염이라는 병명을 얻고 입원을 했다.
물리치료를 받고 약(아스피린, 진통소염제, 스테로이드)을 먹는데도 아픈 부위는 점점 늘어만 갔다. 처음엔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 턱, 목 등 상체의 관절이 아프다가 차츰 무릎과 발목에도 조금씩 통증이 왔다. 7월 초, 주치의가 더 이상 병원에 있어도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집에 가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했다. 어차피 물리치료라고 해 봤자 온찜질이 고작이니 그 정도는 집에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입원한 지 50여일 만에 퇴원을 했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 우울해질 수 있으니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학교에 다니라는 처방에 따라 3학년 2학기 등록을 했다.
그런데 가을이 깊어지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더 많은 학교. 10·26(박정희 대통령 저격), 12·12(전두환의 군부 쿠데타), 5·18(광주 민주항쟁)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게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이어졌고, 그 동안 열심히 약을 타다 먹고 찜질을 했지만 통증은 심해지고 관절의 운동 범위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의사가 류머티즘이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이제 병명을 알았으니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나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증세는 점점 심각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약 부작용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스피린 장기 복용으로 이명증에 시달렸고, 알레르기성 비염에, 결막염, 가려움, 원인 모를 두드러기, 불면증까지. 점차 병원 치료로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이러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명약을 탐방하다
그 불안감을 파고드는 오만 가지 처방들. 어머니가 전국을 돌면서 명약(^^)들을 구해오셨다. 모두 누군가가 먹고 완치되었거나 큰 효험을 보았다고 소문이 난 약들이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건 한약. 어머니가 직접 달인 것만도 100제가 넘는다. 별의별 맛이 다 있었고 복용법도 다양했다. 신 맛, 떫은 맛, 쯥쯜한 맛, 덜쩍지근한 맛, 매운 맛, 그리고 그것들이 다양한 비율로 어우러져 내는 참으로 창의적인 맛들, 뜨거운 걸 마시면 죽을 수도 있어 꼭 식혀서 먹어야 하는 약, 무랑 같이 먹으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약 등. 나중에는 한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서 베란다에 연탄 화덕을 놓고 달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곱만큼의 차도도 없었다. 차도는커녕 날이 갈수록 오히려 심해져만 갔다.
양약과 한약이라는 ‘허가된 명약’의 순례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허가받지 못한 명약’ 순례로 방향을 틀었다. 늙은 호박에 지네를 넣어 삶아 먹기도 하고, 개뼈다귀 삶은 물을 상복하다가 수년간 소양증(가려움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토끼인 줄 알고 먹은 고양이도 몇 마리나 되는지 모른다. 말 발톱 볶은 가루를 막걸리에 타서 마시고 종일 취한 상태로 지낸 적도 있고, 뱀술을 한 잔 마시고 심장이 터질 뻔하기도 하고(덕분에 술에 취하면 정말 혀가 꼬인다는 걸 알게 됐다), 조치원인가 어디에서 처방 받은 백장닭(흰수탉)에 한약재를 넣은 약은 아예 마당에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여름 내내 달여 먹었다. 토끼 생간을 먹을 때는 절대 못 먹겠다고 버티다가 어머니께 호되게 꾸중을 듣고 울면서 먹기도 했다.
바위에 낀 오래된 이끼도 먹고(맛이 제일 고약했다), 엉게나무(개두릅나무) 삶은 물에 목욕도 하고 그 물에 감주(식혜)도 해 먹고, 열을 빼려고 감자를 갈아 밀가루로 반죽한 것을 전신 관절에 붙였다가 털까지 뜯기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아버지 몰래, 어머니는 부엌 옆에서 나는 방안에서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남묘호랭게교 제목을 암송하기도 하고, 대나무를 꽂은 집(무당집)에서 오신 분이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바가지에 담아서 대문께로 뿌리고 식칼을 던질 때는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어 한심하기도 했다. 검정 헝겊에 손가락만한 무슨 나무토막을 싸서 몸에 지니고 있기도 했다. 나중에는 침과 뜸도 했는데 어혈 때문에 생긴 병이라서 그걸 빼내야 낫는다며 일주일에 이틀은 침구사가 와서 부항을 붙여 피를 뽑았고, 나머지 닷새는 내가 침(거의 못 수준)으로 아픈 부위에 구멍을 뚫어서 피를 뽑았다. 전신에 쑥뜸을 뜨는 것으로도 모자라 뜸자리가 크게 헐수록 효과가 있다며 일부러 약을 붙여 헐리기도 했다. 그러나 병세는 요지부동……. 그 무렵, 친척 한 분이 조심스레 어머니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기도원에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이쯤 되자 불교 신자이신 엄마도 이과 출신인 아버지도 낫기만 한다면야 기도원 아니라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다는 태세셨다. 그런데 대구 근교에 있다는 기도원을 답사하고 오신 부모님은 정신 알고는 못 있을 곳이더라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무척 우울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과 잿빛 하늘뿐.(1980.11.7.일기)
올해는 좀 더, 내년에는 좀 더......이런 속임수에 당한 것도 벌써 몇 차례인가. 내일이면, 내달이면, 내년이면, 겨울이 지나면, 이렇게 살아온 세월이 벌써 2년이나 흘렀다.(1981.1.1.일기)
2년이 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아버지는 돈을 대고 어머니는 약을 구해 오고 나는 먹고 붙이고 찌르고 뽑고 지지고 빌어대는데도 어쩜 그리도 요지부동인지……. 이젠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하나? 오른 쪽 벽에 난 작은 창으로 보이는 하늘과 미루나무 가지들. 나를 저 세상 속으로 걸어가게 해 줄 수 있는 명약은 어디에 있을까?
니하고 내하고 같이 죽자
그 당시 나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 하룻밤만이라도 두 다리를 쭉 펴고 통증 없이 자 보는 것. 그때 내가 떠올린 건 팔다리가 분리되는 인형. 잠 잘 때만이라도 팔다리를 떼어서 벽에 걸어두고 편안히 자고 싶었다. 여름, 특히 장마철이 견디기 힘들었다. 39도를 오르내리던 열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오한이 들어 한여름에도 내복에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양말을 신고 지냈다. 물론 난방도 하고 잤다. 밤이 되면 관절 강직(굳어서 뻣뻣해지는 증세)이 더욱 심해져서 돌아눕는 게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누군가 팔을 들어서 옮겨 주고 이불도 다시 덮어 줘야 했다. 엄마는 유독 땀이 많으신 분이라 내 방 문 밖에서 불침번을 서셨다.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 문 닫히는 소리에도 내 몸은 통증에 진저리를 쳤다. 가려운 곳을 긁는 일도 어려웠고 숟가락질도 못하는 날이 많았다. 카세트에 테이프을 넣고 음악을 들으려고 해도 버튼은 왜 그리 억센지! 그래서 늘 라디오를 틀어놓고 지냈다. 채널 바꾸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죽는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다. 80년인지 81년인지, 그 당시는 어머니가 대소변을 받아내던 시절이었다. 대구 동촌에 살았는데 그 부근에 경상도에서는 흔히 거랑이라고 부르는 큰 내[川]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큰물이 져서 천방까지 물이 차는 그런 곳이다.
그해 봄, 며칠간 봄비가 제법 내린 어느 날, 어머니가
“동촌 거랑에 큰물 나가드라. 거기 니하고 내하고 가서 빠져 죽자. 니 혼자 죽으라 카면 죄 많고 내하고 같이 죽자. 이래 고생시리 사니 죽는 게 안 나을라.”
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죽고 싶으면 엄마나 가서 죽어라. 나는 이래도 사는 게 좋다.”
한참 뒤, 어머니가 그러셨다. “그 때 니 혼자 집에 두고 다니는 게 영 불안했다”고. 어머니는 그 시절 여기저기 약을 구하러 다니시거나 볼일을 보러 다니시느라 집을 비울 때, 혹시라도 내가 나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 속을 떠보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였는데, 내가 어머니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그 이후로는 안심하고 다니셨단다. 당시에 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쪽으로는 영 머리가 안 돌아갔던 것 같다. 다만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든가 어쨌든 이 고난을 견뎌야 한다든가 하는 ‘나름의 철학을 세우고 확고한 투병 정신’으로 견디어낸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돌이켜 보면, 죽고 싶을 만큼 안 아팠던 건가 싶기도 하고, 순간순간 엄습해오는 고통을 견디는 것만도 힘이 들어서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같고, 사람이 어떤 경우에라도 살려고 하면 다 살게 마련이라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하시던 말씀에 세뇌된 탓인 듯도 하고, 게다가 아픈 사이사이에 용필이 오빠의 신곡 단발머리며 고추잠자리도 익혀야 하고, 모르던 가곡이나 동요도 따라 불러야 하고, 친구들의 연애담이나 외육촌 언니의 유머를 들으며 적절하게 반응^^도 해야 하고, 엄마가 해 주시는 간식도 먹어야 하고, 아침마다 좀 어떠냐는 아버지의 걱정 어린 물음에 거짓은 아니면서도 뭔가 보답하는 차원의 대답도 궁리해야 하고, 방문객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똥오줌을 폼 나게 눌 것인가(이야말로 날마다 부딪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나으면 무얼 해서 먹고 살 것인가도 연구해야 하는 등 실존적 문제가 산적했기에 실존 그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는 죽음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웬만큼 살 만 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게 볼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 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7쪽
흔히들 오랜 세월 병에 시달리며 산 사람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내리 즐거워만 하기도 어렵지만 온통 고통 속에서 살기만도 어렵다. 만약 누군가 주야장천 힘들기만 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는 저마다의 환경에 따라 순간일망정 아픔을 잊게 하는 아주 작은 즐거움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미미하게 시작한 병이 ‘창대’한 과정을 거치며 나를 힘들게 했지만, 아무리 통증이 심해도 불안이 엄습해도 백약이 무효여도 그 틈으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는 게 좋았는지도 모른다.
_오창희(감이당 대중지성)
이 코너의 담당 필자 : 오창희(감이당 대중지성)
‘설마’ 내 인생에 뭐 그런 일이 닥칠까 싶었던 그런 일이 닥치기도 하고, ‘과연’ 그런 날이 올까 하는 날이 오기도 하는 게 삶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설마’와 ‘과연’이 둘이 아니라는 것, 불행이 행복이고 행복이 불행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좀 더 오~래 걸렸다. 지금까지는 류머티즘과 함께 임상으로 힘들게 이 지점들을 통과해 왔다면, 앞으로는 지성의 힘으로 삶의 마디들을 조금은 가볍게^^ 넘어 볼 요량으로 감이당에서 공부 중이다.
'지난 연재 ▽ > 아파서 살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해야 '글'을 쓸 수 있는가? (0) | 2017.03.03 |
---|---|
정정당당(精精堂堂)하게 사는 법 (1) | 2016.11.16 |
나는 왜 아픈가, '몸에 대한 무지'에서 '앎에 대한 열정'으로! (9) | 2013.06.21 |
[아파서 살았다 최종편] 오랜 고통과 불안을 '만나다, 철학하다' (30) | 2013.06.14 |
내게 힘이 된 것들 -부모님과 책읽기, 일기 쓰기 (9) | 2013.06.07 |
두 발로 선다는 것, 스스로 선다는 것 (21) | 2013.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