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서기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걷고 있을 때일지도 몰라. 왜냐하면, 연인들도 걸으면서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잖아." 이 대사는 일본 드라마 <1리터의 눈물>에서 주인공 ‘아야’가 휠체어를 밀어주는 남자 친구 ‘아소’에게 하는 말이다. 병상에서 보내던 그 시절,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두 다리로 우뚝 서서 ‘친구’와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하며 나란히 걷는 것.
1983년 5월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대구 ‘앞산‘ 아래의 5층짜리 작은 아파트 2층에서 살았다. 처음 일 년은 한 쪽 벽면 전체가 창으로 된, 어디에 앉아서도 앞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방에서 지냈다. 그 방은 산 아래 길과 같은 높이로 놓여 있었다. 방에서 올려다 보이는 산 아래 승마장에는 언제나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갈기를 세운 말들이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며 돌고 있었고, 그 아래에 난 좁은 길엔 종일을 두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초여름 초록 그늘이 깊게 드리울 때면, 단풍으로 온 산이 물들고 흰 눈이 조용히 내릴 때면,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석양에 바랑을 메고 가는 노스님이,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가, 뙤약볕 아래 느릿느릿 하교하는 학생들이, 가끔씩 출몰하는 데이트 족들이 그 길을 오고갈 때면, 창밖으로 걸어 나가 그들과 함께 서고 싶었다.
걷는 것은 절실한 문제였고, 간절한 바람이었다.
두 번의 걸음마
79년 가을이 깊어갈 무렵부터 구부러지기 시작한 두 무릎은 좀체 펴지질 않았다. 결국 82년 4월, 동부이촌동의 K병원에서 넉 달 간 두 다리에 추를 매달아 무릎을 펴는 물리치료를 받았다. 겨우 다리를 펴고 나니 대학 마지막 학기 등록일이 다가왔다. 복학을 위해 물리치료실이 잘 갖춰진 대구의 P병원으로 옮겼고, 남은 한 학기를 마치는 동안은 휠체어를 타고 학교와 병원을 오갔다. 9월 한 달은 휠체어를 타고 교생실습도 나갔다. 그러다가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입원을 하고 날마다 한 시간씩 전기 침대에 묶인 채 서는 연습을 했다. 30도-50도-70-50도-70도-90도로 아프면 내리고 나아지면 올리고를 반복하면서.
석 달 남짓 서는 연습을 한 83년 3월 어느 날, 물리치료실 복도에서 지지대를 잡고 두 발로 서서 창 너머 수녀원 앞마당의 막 피어나던 감나무 잎을 바라보던 그날의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누워서 보는 세상은 나와는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았는데 서서 보는 세상엔 내가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는, 활동이 자유로운 그들만의 세상, 그 바깥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두 발을 딛고 서 보니 어느새 나도 그 세상 속으로 들어와 있었고 그들과 함께였다. 이젠 더 이상 맥없이 누운 채 세상이 내게 와 주기만을 바라지 않아도 되었다. 환희라는 말에 담을 수 있는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온 세상이 나에게로 오는 듯한, 내가 두 팔을 벌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표현하기 어려운 이 기분, 환희! 그로부터 한 일 년 목발을 짚고 걸었고, 84년 봄부터는 집안에서는 벽을 짚으며 걷는 게 가능했다. 그때 가장 기분 좋았던 것은 일어서서 바지를 입을 수 있고, 화장실에 걸어갈 수 있는 것!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85년 가을부터는 그렇게 애써 펴 놓은 다리가 염증 악화로 또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2,3년을 휠체어로 지내다가 결국 88년 2월에 두 무릎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았다. 당시 서른 하나였던 내 나이가 너무 어렸지만(인공관절은 수명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쓰면 재수술 또는 재재수술이 불가피하기에 최대한 수술 시기를 늦추어야 한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생활 계책을 세울 시기를 놓칠 수 있으니, 차라리 수술을 몇 번 더 하더라도 젊었을 때 생계수단을 찾는 게 낫지 않겠냐는 주치의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
보름 간격으로 두 무릎 인공관절 치환술을 받은 지 일주일쯤 되던 날, 주치의가 오더니 침대에서 내려 서 보라고 했다. 아직 통증도 가시지 않았고 이물질이 들어갔다는 느낌 때문인지 내 다리 같지도 않았다. 그런 다리를 침대에서 내려 두 발로 서자니 왜 그렇게 무서운지. 83년 봄, 지지대를 잡고 섰을 때는 그렇게 환희에 찼었는데……. 난 무서워 벌벌 떨며 침대 난간을 부여잡고 있었다. 주치의는 손으로 내 바지허리춤을 움켜잡으며 절대로 안 넘어지도록 할 테니 바로 서 보라고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돌려 의사의 가운을 부여잡은 채 두 발로 섰다. 그러자 다시 한 발을 떼어 보라는 거다. 그런데 두 발이 병실 바닥에 딱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구의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무거움’. 내 두 발바닥에는 마치 전혀 다른 중력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때 몸무게를 달아보았다면 1톤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주치의는 보행기를 가져왔고 거기에 의지해 겨우 첫발을 뗄 수 있었다. 목발 떼고 걸을 때까지는 6-7년이 걸렸다. 걷지 못했던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두 발로 설 수 없었을 때에는 마치 세상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류머티즘으로 보행이 불가능해진 79년 가을 이후, 이렇게 두 번의 걸음마 끝에 마침내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인간에게 걷는다는 건 무얼까? 왜 휠체어를 타고 가는 길과 두 발로 걸어가는 길이 그렇게도 다를까? 누워서 보는 세상은 왜 저 멀리에 있는 걸까? 서서 보는 세상도 앉아서 보던 바로 그 세상인데 모든 게 왜 그리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인간이 두 발로 걷는다는 것, 거기엔 아직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희망은 미래의 소관이다
7시10분, 수술 카 위에 누워 주사를 맞고 기저귀를 차고 기다리고 있었다. 10년이란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이제 그 길고 긴 방황과 갈등과 투병의 발버둥을 끝맺으려 하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겨우 인공관절 수술이라는 최악의 수단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세월을, 나의 청춘을 다 보내버렸단 말인가? 머릿수건을 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한 층 아래인 3층 수술실로 들어갔다. (1988. 2. 29. 월. 일기)
나를 가장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것은 희망(?)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그렇게 유혹하는 희망 속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무심히 보내 버렸는지. (1988. 7. 5. 화. 일기)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저녁, 처음 통증을 느낄 때만 해도 그 불편함이 이토록 오래오래 함께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끝도 없는 치료에 매달리면서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다름 아닌 ‘희망’! 내일이면, 내달이면, 내년이면, 봄이 오면, 겨울이 가면, 이 약을 먹으면, 저 약을 먹으면, 한 재만 더 먹으면, 이 치료를 받으면,……. ‘지금’과 ‘여기’를 한 없이 유예시켜 온 희망. 그것의 부질없음을 깨닫는 데 십 년이 걸렸다. 그렇게나 원상복구를 갈망하던 두 무릎 관절을 인공물로 갈아치운 뒤에서야. ‘희망’의 맨 얼굴을 보게 된 것.
그러면서 생각한다. 섣불리 헛된 희망을 노래하지 말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창을 열고 라일락 꽃향기를 숨 쉬고 바람에 날리는 분홍꽃잎들에 눈 맞추며 여기저기 팔랑이는 연둣빛 봄을 만끽하자고.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선현들의 말씀을 믿고 그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나’를 만나자고. 이도저도 여의치 않을 땐, 하여간 무슨 일이 있어도 ‘미래의 소관’(루쉰, 「서문」, 『외침』, 그린비, 2010, 26쪽)인 희망에 ‘지금’ ‘여기’를 저당 잡히는 어리석은 生을 되풀이하진 말자고!
어쩌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내일이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병과 ‘함께’ 홀로 서다
헛된 희망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음을 깨달은 그 언저리인 1989년 봄,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택시가 동작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 건강해지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나?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지금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과연 다시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꼭 그래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나? 의문이 이어졌다. 지금 이 상태로 병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순간, 무언가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길을 찾아보자.
무릎 수술을 하기 전,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던 때에도 늘 일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병에 짓눌려 다른 일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차츰 통증에 익숙해지자 무료했고 부모님께도 죄송했다. 아버지 퇴직 시기는 다가오는데 월급은 대부분 치료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구부러진 다리를 펴고 일 년 정도 목발을 짚고 걷던 시기에는 구미공단에 취직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곳엔 기숙사가 있었고 조립 라인에 앉아서 자기 앞에 오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노동시스템이 보행이 어려운 나에게 적절할 것 같아서였다. 장애인 재활협회를 찾아 취업 신청서를 작성했다. 목발을 짚은 모습에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던 담당자는 신청서를 보더니 어렵겠다고 했다. 힘들게 한 대학 졸업이 걸림돌이었다. 당시는 공단에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고 정부에서는 이들을 색출하려 애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계 부업 하나를 구해오셨다. 수출용 안경테에 가죽을 붙이는 일이었다. 겨우 사흘을 했다. 본드 냄새 때문에 구토가 심하게 일어났고 구부리고 앉아 가죽을 오리고 붙이느라 용을 써서 그런지 사흘째 되는 날엔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는 것. 시각장애인 협회에 전화를 걸어 음성책자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따로 마련된 녹음실에 가서 해야 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점자 봉사를 신청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손목이며 손가락이 퉁퉁 부은 걸 본 봉사자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늘 일이 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릎 수술을 한 6년 뒤인 94년 9월, 신문 광고란에서 독서 지도사 모집 공고를 보았다. 휠체어를 타고서도 늘 ‘뭐하꼬’를 뇌이던 나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책과 관련된 일이 나타났으니, 그리고 이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기까지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을 하려면 그 상태로는 어려웠다. 일상생활을 겨우 영위할 뿐 여전히 오전에는 관절 강직으로 힘이 들었고 통증들이 전신 관절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지인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류머티스 전문 병원을 찾았다. 그 병원에서 처방한 특효약은 면역억제제. 첫 일 년은 감기를 달고 살았고 속도 울렁거렸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이 약을 먹으면서 독서 지도사 과정과 논술 지도사 과정을 1년여에 걸쳐 마치고 독서 그룹 지도를 준비했다.
"처음으로 한 개 사람이 된 것 같은" 나를 만들어준 것
그러면서 어머니가 독립을 거론하셨다. 물론 나도 오래도록 바라던 바였다. 친구들처럼 내 살림을 직접 꾸리며 살아보고 싶었다. 아버지와 큰오빠는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셨다. 당시 우리 세 식구는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서울 큰오빠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들이 돌아가신 뒤 독립을 하게 되면, 내보내는 오빠도 힘들고 나가는 나도 서러울 거라며, 당신들이 계실 때 독립을 하는 게 옳다는 논리로 아버지와 오빠를 설득했다. 드디어 1996년 6월 22일,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했다.
독립 이후, 독서 지도를 해 달라는 부탁이 하나 둘 들어왔다. 점차 학생들이 많아졌고, 독서 단체에서 교재도 만들고 독서지도사 양성 과정 강의도 하게 되었다. 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수입도 늘어났다. 전문 분야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성인이 된 듯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번 돈으로 병원 진료비를 내던 그날의 뿌듯함이라니! 두 발로 서서 수녀원 뜰의 감나무를 바라보던 그날과는 또 다른 기쁨. ‘처음으로 한 개 사람으로 된 것 같은 자신(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의 독백)‘이 생겼다.
두 발로 걷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까지 스무 해 가까이 걸렸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81년 겨울, 코르티솔(스테로이드호르몬) 주사 부작용 때문에 풍선처럼 부푼 몸을 한 채, 큰오빠의 책꽂이에 꽂힌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놓고 지구본을 돌려가며 세계 일주를 꿈꾸던 일(2005년 셋째오빠네 가족과 동유럽 여행을 했다. 휠체어를 타긴 했지만), 얼른 나아서 돈도 벌고 독립도 해서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여행을 가겠다던 호언장담에(부모님을 모시고 간 첫 여행지에서 아버지께서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시며 측은하게 바라보시던 부모님의 걱정 가득한 눈빛. 이제 병과 싸워 이기려던 그 숱한 날들은 지나갔다.
지금도 한강 시민 공원 잔디밭을 걷거나 남산을 산책하거나 교외에 나가 흙길을 걸을 때면, 83년 봄날의 그 ‘환희’와 88년 봄날의 그 ’무거움’이 가끔 되살아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함이 밀려오는 가슴을 활짝 펴고, 우주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한 발 한 발 걷·고·또·걷·는·다.
_오창희(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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