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음란서생>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명을 따라 복제 미술품의 범인을 추적하다 우연히 만난 음란소설을 만난 주인공(한석규)이 자신이 직접 그러한 소설을 쓰게 되는 것이 영화의 큰 줄거리이다. 눈이 번쩍 뜨였던 부분이 있었으니, 영화 내에서 한석규가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소개되는 장면이었다. '내가 아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는 연암인데?!' 하지만 이 글은 영화의 사실성 여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고, 18세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계기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라(무...물론 <음란서생>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만들었다고 밝히지는 않았다^^;).
<음란서생>을 보면서 눈에 띄었던 일!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윤식이 잠깐(!) 알바했던 그 일, 바로 책을 필사하는 것이다. 윤식에게도 일이 제법 몰렸던 것을 떠올려보면, 당시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반가의 자제들이 보는 사서삼경부터 여인들이 보는 한글본까지 서책들의 종류도 다양했으리라. 또, 청나라에서 서적이 바로바로 직수입되기도 하였으니 새로운 작품이 나와 유통되는 것에 필사쟁이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음란서생>에서는 놋그릇 가게의 쪽문 안쪽에서 이러한 필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한석규는 사대부가 알 수 없었던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87쪽
『열하일기』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미리 유통되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필사쟁이들이 연암의 작품을 베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과 조선 후기 최고의 출판편집인이 동시대인이었다는 점이다. 중인인 장혼(1759~1828)은 정조에게 사랑받으며 교정 보고 책 만드는 일로 반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정조가 1790년에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고 책을 인쇄하고 반포하려 할 때, 장혼은 교정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원고와 다른 글자를 살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솜씨가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다. 규장각의 여러 고관 가운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그에게 일을 맡겼다" 했다. 책 한 권을 다 만들면 으레 폼계를 올려주는 법인데, 그는 번번이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적은 봉급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받지만, 영예로운 승진은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그 이유를 밝혀, 정조가 봉급을 더 많이 주었다. … 사서삼경을 비롯해 『이충무공전서』,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을 간행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도 장혼이 교정보았다. 장혼이 교정을 잘 본다는 소문이 나자,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그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69쪽
장혼은 후에 인왕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과서를 직접 만들어서 인쇄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출판에는 필사하는 방법, 철활자나 나무활자로 인쇄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활자를 만들어서 인쇄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글자를 빌려서 인쇄하는 방법도 썼다. 하지만 글자를 빌려서 인쇄하는 것 역시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으므로, 장혼의 문집은 필사본으로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음란서생>의 주인공은 분명 한석규이겠지만, 그의 소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읽히게 된 배경에는 필사를 하고, 그 책을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조연인 출판업계 사람들이 내 마음에서는 주연으로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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