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레(vacare), 지혜를 기다리는 시간
혜원(고전비평공간 규문)
1. ‘휴가’라는 이름의 예속
작년 여름 방학, 더워 죽겠는 서울을 벗어나 바닷가에서 느긋하게 있고 싶어서 여수로 향했다. 하지만 ‘느긋하게’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휴가를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싹트자 숙소를 예약하고, 투어버스를 알아보고, 꼭 가봐야 할 맛집을 지도에 표시하며 갑자기 여행 준비를 했다. 평소 ‘파워 P’라는 소리를 듣는 내가 짠 것 치고는 제법 알찬 일정이었다. 그런데 돌아오고 나서는 사흘 정도 멍한 시간을 보냈다. 쉬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이상하게 피곤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쉬었다 왔는데 나는 왜 더 피곤해졌을까? 휴가에서 돌아온 이들의 반복되는 질문이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리듬이 있다. 이때 리듬이란 생명이 우주의 이치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봄에 꽃을 피우던 나무는 여름에는 잎을 무성하게 틔우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은 뒤 겨울에는 잎을 떨구며 다음 봄을 준비한다. 새들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거나 털갈이를 하고, 동물들은 먹을 것이 풍부한 때 번식하고 겨울에는 겨울잠을 잔다. 각 생명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변화에 응답하며 살아간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동양에서는 자연의 변화를 음양오행의 운행으로 이해하며 절기라는 시간의 감각을 만들어 왔다. 생장(生長)의 계절인 봄과 여름에는 활발히 활동하고, 수장(收藏)의 가을과 겨울에는 한 해의 결실을 거두고 식물이 씨앗 속에 생명력을 저장하듯 활동을 갈무리하고 쉬었다. 절기마다 각 방위와 장소, 동물과 곤충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며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과 함께 살아감을 되새기기도 했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과 조응하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시간의 감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효율성과 이윤을 척도로 삼는 자본의 시계에 따라 삶이 조직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서로 다른 기운과 질감을 지닌 흐름이 아니라, 1분 1초로 측정되고 계산되는 균질한 단위가 되었다.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고, 노동은 시간 단위로 계산된 임금과 교환되며, 일상은 생산과 소비로 재조직된다. 이렇게 균질적인 시간 속에서 노동은 돈을 버는 시간으로, 여가는 번 돈을 쓰는 시간으로 구분된다. 노동은 생산을 위해 조직되고, 여가는 다시 노동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수단’이 되거나 노동의 ‘보상’인 소비시간으로 전락한다.
우리 연구실은 애초에 그런 자본주의적 시간 질서와 다른 삶을 실험하기 위해 모여 공부하고 밥을 먹고 생활하는 공동체다. 공부를 통해 노동-소비 구조에서 벗어난 활동을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어쩐지 공부라는 애쓰는 시간의 ‘보상’으로 방학을 바라보게 된다. 나의 지난 여수 여행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공부하는 삶을 노동으로 여기면서 공부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여전히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지혜를 위한 자유 시간
‘바캉스(vacance)’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레(vacare), ‘자리를 비우다’이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에 따르면 바카레는 단순히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자유로울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시간’이었다. 이때의 자유란 무엇일까. 일리치가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이렇다.
“나는 게으름을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탐사하려고 자유 시간을 쓴다.”
“나는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활동으로부터 물러나며, 내 영은 천상의 욕망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 시간의 목적이 ‘지혜’라는 점이다. 지식이 이미 주어진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유란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선택하는 상태가 아니라, 번잡한 일상에서 물러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자유 시간’으로서의 바카레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지혜를 탐사”하고 다른 리듬을 스스로 조직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흔히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자유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비를 위한 여가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시간 질서 안에서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노동시간에 비해 여가시간이 적은 게 아니라, 그 둘을 모두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하나의 리듬 아래 배치한다는 데 있다. 다양한 리듬이 조직될 가능성이 사라진 시간 속에서는 ‘지혜’를 길어올릴 사유의 시간 역시 비효율적이고 무용한 것으로 취급된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늘 깨어 있는 문명”을 사는 우리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 ‘꿈과 헛말’의 언어를 익혀야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의 구성이 변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늘 깨어 있는 문명은 유연성 없이 완고하기만 하다. 문명에도 많은 꿈과 헛말로 인해 야기되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통로가 열리고 마음 내부에서 대칭성을 향한 변화가 시작되듯이, 문명을 구성하는 힘의 배치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 『녹색 자본론』)
문명의 리듬은 모든 것을 성공과 실패, 유용함과 무용함 같은 이분법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비대칭적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사고방식은 삶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하지만 다른 가능성을 받아들일 여지를 차단한다. 노동과 여가, 생산과 소비는 모두 같은 효율의 논리 안에서 움직이며, 인간은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의 창조성을 실현할 여지를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은 ‘완고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질서를 의심하지 못한 채 기존의 사고를 고집하고, 다른 언어와 사유를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과 헛말’의 세계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칭성이 실현된 신화의 세계와 같아서, 서로 나뉘어 있다고 전제되던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고 결합한다. 이러한 세계는 계산과 효율, 나와 너로 나누어져 있던 완고한 세계에 틈을 내며 미처 의식하지 못한 존재를 발견하거나 다른 삶의 양식을 상상하게 한다. 이처럼 의식이 무의식을 향해 열리고, 기존의 사고체계에 균열이 생기는 “대칭성을 향한 변화”의 시간이야말로 이반 일리치가 말한 자유 시간, 바카레와 통하지 않을까? 바카레는 단일한 시간 리듬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리듬을 조직할 지혜를 탐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때 새로이 조직된 리듬은 기존의 완고한 세계에 ‘틈’을 내어 삶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온다.
3. 방학(放學), 비움의 공부
학교 다닐 때 나는 방학이 되면 계획표를 만들고 그것을 외면하길 반복했다. 그리고 개학 전날 그렇게 산 ‘업보’를 맞았다. 그 시절 방학이란 학교라는 제도에서 잠깐 놓여나는 시간, 그러나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계획표를 만들고, 그걸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길 반복했다.
지금의 방학은 어떨까? 작년 방학은 마치 학창시절처럼 살았던 것 같다. 규칙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하루하루는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했다. 쉬는 시간을 또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들려고도 하고, 그 반동으로 ‘에라~ 모르겠다~’하고는 퍼져 있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바카레 제1의 조건, ‘고독 속에서 지혜를 기다리는 시간’은 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다고 공자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일상을 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들을 소화하고 자기 사유로 만들지 못하면 배움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버린다. 혹은 배우면서 덧붙게 되는 관성과 비대한 자아만 남게 된다. 불교에서 ‘비움’, ‘내려놓다’라는 말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을 뜻하듯, 방학의 ‘방(放)’은 무언가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시간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방학을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이번 방학에는 한 달 동안 두꺼운 역사책 한 권을 함께 읽는 세미나를 신청했다. 예전의 나라면 방학에 그런 책을 읽자는 제안을 가장 먼저 거절했을 것이다. 방학은 공부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방학이기에 그런 책을 읽고 싶다.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오래 붙들고 씨름하다 보면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조금씩 낯설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이미 익숙한 것들이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비워두는 실험을 해보고 싶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 스마트기기를 꺼두는 일이 그중 하나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것을 따라가지 않을 때, 미디어가 이분법적으로 규정해놓은 언어를 잠시 내려놓을 때, 그 빈자리에 무엇이 찾아올지 궁금하다. 책을 읽다가 딴생각에 빠질 수도 있고, 산책을 하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 앞에 오래 머물 수도 있다. 그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찾아오는 행운의 순간일 것이다. 이번 방학은 소비를 위한 휴식이 아니라, 지혜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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