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방심(求放心) : 구혜원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 '구방심(求放心)'은 이번 달부터 <녹색 자본론>을 읽고 번역한 혜원이 쓰는 코너입니다. <녹색 자본론>에 등장하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거기서 일어나는 마음의 흐름을 돌아봅니다. 맹자는 공부의 목적을 고립적이고 이기적인 사욕에 가려진 본성적인 마음을 찾는 것, 즉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求放心)' 것이라고 했습니다. 혜원도 이 글을 쓰면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공부를 해 보려 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길!
푸바오를 내버려 두세요
혜원(고전비평공간 규문)
1. 이 사랑, 너무 안전한
지난 겨울 을지로에서 ‘푸바오 반환 요구’ 시위대와 마주쳤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광판까지 동원해 ‘푸바오를 돌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반환된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시위대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 푸바오에게 털 빠짐이나 이상행동이 관찰되었고 이는 학대의 정황이며 따라서 푸바오를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딘가 기묘함이 느껴졌다. 모두가 선의의 사랑을 외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왜일까.
아마도 그 사랑이 너무나 ‘안전’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내 관점이 바뀔 가능성을 포함한다. 상대가 반박하고, 거절하고, 떠날 수도 있는 관계 속에 나는 나만의 목소리를 고집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처받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아가 흔들리는 불안정성을 포함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푸바오를 향한 사랑에는 그런 긴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푸바오 돌아와’를 외치지만, 그 푸바오는 이미 ‘우리 인간’의 판단과 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바뀔 필요가 없다. 인간과 동물의 거리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푸바오 ‘신드롬’이 등장한 건 모두가 격리되어 OTT와 SNS만 들여다보던 팬데믹 시기였다. 이때 우리는 화면 속 푸바오의 치명적인 귀여움, 푸바오와 사육사가 갖는 애틋한 서사에 깊이 몰입했고 위로받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중국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했던 때이기도 했다.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지목된 중국은 수많은 차별적 언어를 뒤집어썼다. 팬데믹 시기의 푸바오에 대한 열광과 중국에 대한 반감은 팬데믹이 끝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팬데믹은 어떤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감염병의 확산은 인간이 야생의 영역을 무분별하게 침범하고, 멸종위기종을 상품처럼 유통하며 생태계를 교란해온 결과였다. 팬데믹은 세계의 중심인 양 행세해 온 인간에게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고, 당시에는 분명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자각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의 원인을 외부로 몰면서 중국을 악마화했고, 동시에 푸바오에게 애정을 집중했다. 귀엽고 무해하며 말이 없는 푸바오. 그 앞에서 우리는 상처받을 염려도 반박당할 가능성도 없이 마음을 쏟을 수 있었다.
푸바오 사랑은 위계적이고 일방적인 관계 위에서 유지된다. 너를 사랑하는 나는 옳고 선하며 상대를 보호하는 존재라는 확신. 이때 사랑은 타자를 향해 열리는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이 중심에 서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된다. 그 과정에서 타자는 해석과 판단의 대상으로 고정된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한 ‘비대칭적 관계’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너와 나는 동등하다고 말해도 ‘나’를 중심에 둔 동일시의 감정을 앞세우는 순간 타자는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부여한 의미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2. 자기중심주의와 ‘분리된 세계’라는 착각
우리는 모든 동물을 푸바오처럼 대하지 않는다. 같은 동물임에도 전혀 다른 윤리와 감정에 따라 어떤 동물은 이름으로 불리며 가족이 되고 어떤 동물은 번호로 불리며 자원이 된다. 이 구분은 자연의 질서라기보다 인간의 필요에 맞게 구획된 체계이기에 아무리 종과 종이 동등하다고 말한들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감각의 뿌리에는 ‘나’를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 동일성의 논리가 있다. ‘나’의 관점에서 가치 있는 것은 보호의 대상으로 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방치해도 된다는 확신. 세계를 나와 분리된 대상들의 집합으로 상정하고 그 중심에 ‘나’를 세우는 태도. 비대칭성은 바로 이 자기중심주의에서 출발한다. 자기중심주의적 사고 안에서는 타자를 나와 동등한 존재라고 인정하더라도 그 평등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나의 감정과 언어, 나의 판단 체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타자를 관념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기반으로 한 분리의 위계는 동물과 인간 사이를 넘어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가령 백인의 인종차별에 분노하면서도 동남아인이 우리나라에서 겪는 멸시와 차별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앞서 말했던 중국인 혐오도 그러하다. 애초에 인종이라는 구분 자체가 역사적‧문화적 산물임에도 그 구분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은 채,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는 기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것이 단일한 가치척도 안에서 비교하고 교환 가능하다는 논리다. 무엇이든 화폐를 지불하면 그것과 동등한 가치를 구매할 수 있는 경제체제 안에서 우리는 소비자가 된다. 구매한 것은 내 소유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다. 저렴한 가격에 산 물건이 어떤 노동 착취에 연루되어 있는지, 내가 사랑하는 푸바오가 얼마나 인간중심주의적인 시선 속에 전시되어 왔는지는 쉽게 간과된다.
그러나 내가 중심에서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이 감각은 위험한 착각이다. 지금 내가 외부로 밀어낸 존재들의 고통과 생태계의 교란은 반드시 형태를 바꾸어 돌아온다. 인간과 동물이 무관한 것처럼 굴었지만, 그 대가는 인수공통감염병 코로나19라는 전세계적 재앙이었다. 이민자의 존재를 지우려 하고 우리는 인종차별과 관련 없는 것처럼 굴었지만, 우리 사회는 이민자의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구조다. 결국 나와 대상을 구분짓는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내가 누리는 안전한 중심은 타자의 희생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섬과 같다. 세계는 촘촘한 연결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까. 구분과 위계를 전제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조건 짓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관계,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일 뿐임을 인정하는 자리는 없는 것일까.
나는 보통 ‘나’를 단단한 실체처럼 상상한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판단.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타인 존재와 사회, 환경이라는 조건 위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결과다. 나의 언어와 가치, 취향조차 관계 속에서 구성된 것이다. 내 몸은 다른 생명과 환경에 의존해 유지되며, 조건에 따라 사고와 감정, 행동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정된 중심이라기보다 수많은 조건이 교차하는 자리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위계화하고 분리하는 비대칭성에서 벗어난 ‘대칭성’은 ‘나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적(緣起的)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나’를 하나의 단단한 실체처럼 단단하게 붙잡는 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아상은 변하지 않는 ‘나’가 따로 존재한다는 착각이며, 그 착각이 세계를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세우는 인식의 출발점이 된다. 불교의 ‘연기(緣起)’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서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과 ‘저것’은 독립된 항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든 존재는 경계 이전에 얽히고 연결된 거대한 그물망, 즉 인드라망과 같다. 하나의 매듭이 다른 매듭과 연결되어 서로를 비추듯, 모든 존재는 같은 평면 위에 놓인다. 무수한 인연조건 속에서 형성된 존재이므로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신드롬 시기에는 정작 푸바오에 무관심했던 내가 이런 글을 길게 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를 공부하는 환경, 팬데믹 경험, 이민자혐오가 극심한 시대적 공기가 나를 빚어낸 것이다. 허공에서 홀로 시작되는 사유는 없다. 저 멀리 있는 판다가 지금의 나를 만든다. 이러한 존재의 얽힘을 의식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는 나와 타자가 같은 평면 위에서 서로를 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태도, 일종의 연대적 책임감이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를 구성한다면, 서로를 비교하여 구분하고 배척할 이유보다 서로의 공통점을 찾고, 그에 대해 함께 고민할 이유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쓰면서도 나 또한 자아중심적 시선과 편리한 소비의 구조 안에 머물러 있음을 발견한다. 푸바오 시위대에게 기묘함을 느끼면서도, 내 알고리즘에 떠오르는 영상 속 주인공은 인간의 입맛에 맞게 편집된 동물들이다. 나 역시 비대칭적 관계가 제공하는 안락함을 누리며 타자를 나의 입맛에 맞게 재단해온 셈이다. 지금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타자를 자각하며, 내가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씩 사유해보는 것. 그것이 내가 마주한 기묘한 사랑의 풍경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응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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