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마음을 읽다
혜원(고전비평공간 규문)
1. 쓰레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다
내가 사는 혜화역 주변은 새벽이면 간판이 번쩍이고 음악이 크게 울리지만, 정작 사람은 거의 없는 가게들로 인해 어딘가 유령도시 같은 기묘함이 감돈다. 그 중심에는 요즘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무인 가챠샵(뽑기 가게)이 있다. 익숙한 캐릭터들이 줄지어 있는 투명한 진열장에 이끌려 코인을 넣고 뽑기를 하는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다. 단 한 번만 하겠다고 마음먹지만, 이윽고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와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막상 손에 남는 것은 ‘내가 왜 이런 걸 갖고 싶었지?’ 싶은 피규어와, 그걸 얻기 위해 가열차게 뽑았던 중복 상품들뿐이다. 도대체 뭘 한 걸지? 분명 처음에는 귀여운 캐릭터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원한 건 피규어가 아니라 뽑는 순간의 자극일 뿐이었다.
온라인 쇼핑도 같은 메커니즘이다. 온라인 쇼핑을 할 때 우리는 꼭 필요하다고 믿고 상품을 주문하지만, 사실 가장 즐거운 순간은 광고에 끌려 그럴싸해 보이는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주문하는 순간이다. 막상 그 물건들이 도착하면 왜 샀는지 고개를 갸웃하거나, 택배 상자를 열어보지조차 않는다. 저렴하고 다양한 물건을 파는 다이소나 이케아에서도 우리는 ‘있으면 좋을’ 물건을 집어 들지만, 그 물건들이 실제로 오랫동안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쉽게 고장 나거나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버리기 일쑤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사는 물건들은 내 손에 도착하는 순간 가치를 상실하는, 쓰레기가 되기 위해 생겨난 물건들이 아닐까?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이 ‘쓰레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 물건들’의 존재 방식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물건을 ‘모노(もの, 物)’라고 보고, 물건이 어떤 ‘영(靈)’을 담고 있는지, 모노와 어떻게 관계 맺고 동맹을 맺을지 생각하기를 권한다.
비인격적 역능, 얼기 직전의 해수와도 같은 물체성의 모노, 옛 사람들이 영력이라고도 성령이라고도 부르던 비감각적 내포력 등이 혼성계를 이루면서 복잡한 전체 운동을 하고 있는 그러한 모노와 인간은 진정한 동맹 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녹색 자본론』, 북드라망, 222쪽)
사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를 순환하는 힘이 일시적으로 응결된 형태, 비가시적 에너지가 현실화된 것이다. 즉 사물은 내적, 외적 관계가 응집된 결과로서 어떤 ‘힘’ 혹은 ‘영’을 지닌다. 그렇게 본다면 아주 정성스럽게 다뤄진 물건과 쓰레기밖에 되지 못할 물건들에 깃든 영은 다를 수밖에 없다.

2. 사물의 ‘영’: 관계가 만들어내는 힘
우리는 ‘사물에 영이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 종교에 빠진 사람이 ‘파워 스톤’을 숭배하거나, 어린아이가 인형을 친구처럼 대하는 등 사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미신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미신에 불과한 걸까?
과거에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고, 훗날 그 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혼수로 보냈다고 한다. 그 가구는 전문점에서 주문하는 물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장과 나무의 시간, 그 나무와 함께 보냈을 추억들, 사건, 역사가 깃든 살아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런 가구를 디자인이 구식이라고, 흠집이 났다고 함부로 버릴 수 있을까? ‘가구’라는 사물은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낸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 이게 사물에 ‘영이 있다’라는 말의 의미다.
물건에는 그 나름의 역사가 있다. 자연에서 비롯된 재료, 만들어진 계절, 그것을 만든 사람에 따라 그것의 ‘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인이 정성껏 만든 것과 착취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같은 ‘영’을 지닐까? 오랫동안 정성스레 사용한 물건과 대충 쓰다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소모하는 물건의 영이 같을까?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 속에서 자란 사람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사람이 다른 정서적 구조를 갖는 것처럼, 사물 역시 관계 속에서 다른 ‘영’을 지니게 된다. 이는 우리 자신의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쓰고 보존하고 고치는 물건들은 쉽게 쓰레기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물건일수록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우리 또한 그 사물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간다. 반면 함부로 쓰고 버리는 물건은 일시적으로 머물다 사라지며 관계에서 소외된다.
나는 평소 물건을 함부로 다룬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물건을 많이 사거나 버리는 일이 별로 없기에 처음에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지적의 핵심은 물건을 어딘가에 ‘툭’, 던져 놓으면서 함부로 대한다는 데 있었다. 나는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물건이 당장 망가지거나 버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물을 ‘모노’로 보는 관점에서, 나에게 함부로 다뤄진 물건들이 어떤 마음을 지닐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물건도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버리진 않았다’라고 정당화하면서 사용하지도 않고 어딘가에 던져놓거나 처박아 두거나 조심성 없이 마구 다룬 물건들은 내게 어떤 마음을 지닐까?
의자 같은 것을 옮길 때
경솔하게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문을 세게 열지 말며
항상 겸손한 것을 즐겨야 한다.
(『입보리행론』 5장 ‘호계정지품’ 70~72절)
『입보리행론』에서는 의자나 문과 같은 가장 흔하고 일상적인 물건을 대할 때조차 ‘항상 겸손’할 것을 당부한다. 이러한 구절은 사물을 나와 관련 없는 무생물이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나를 구성하는 생성적 힘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사물조차 나의 ‘어머니’인 것이다. 사물에 깃든 시간과 기억, 사물을 매개로 이루어진 타인과의 연결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쉽게 교체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감각 또한 점점 무뎌진다. 결국 이런 습관은 세계를 단절된 파편들의 집합으로 인식하는 습관을 강화하고, 그 속에서 나의 마음 또한 파편화되고 황폐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도 어딘가 허무함을 느끼고 만족하지 못할까? 그만큼 우리가 쓰레기가 될 운명을 지닌 사물들의 ‘영’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될 물건들을 뽑고 사들이면서 그처럼 허무하고 공격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3. 사물과의 동맹
『예기』에는 물건을 받을 때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하는지, 그에 걸맞은 답례품은 무엇인지, 그것을 언제 주어야 하는지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령 예물을 주고받을 때 “가난한 자는 재물을 기준으로 예물을 주지 않으며, 늙은 자는 근력을 기준으로 예물을 주지 않는다”(‘곡례曲禮’ 上)라고 하여, 단지 비싸거나 아름다운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신분과 나이, 촌수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선물하고 답례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고려한다. 여기서 사물은 그 시공간의 질서에 따라 관계를 매개하는 행위자다. 인간은 사물과 마땅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타인과 관계 맺고 우주적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도 그 나름의 삶이 있다. 세상에 나올 때 부여받은 쓰임이 있고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렇게 사물은 인간과 동등하게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영’에 귀 기울이는 기예를 잃었을 뿐 아니라 그 존재조차 잊고 말았다. 그토록 쉽게 쓰레기가 된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더 복잡하게 내 삶의 환경을 이룬다. 버려진 물건들은 쓰레기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분해되지 않은 채 축적된다. 기후 위기나 생태 위기는 우리가 그동안 쓰고 버린 사물들의 ‘역습’인지도 모른다.
사물과의 ‘동맹’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나는 어떤 사물을 원하는지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질문이 달라진다. 사물이 인간과 함께 배치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면, 내가 생각할 것은 ‘뭘 원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사물이 원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닐까? 나는 나를 둘러싼 사물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었나? 그들의 영을 존중하고, 인간을 우주의 유일한 주체라고 보는 오만에서 벗어나 사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쓰레기를 생산하기를 멈추고 소비와 소유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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