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수행 (난리)블루스
글 : 혜원(고전비평공간 규문)
1. 을사년, 수공예 개국공신(a.k.a. 을사오적)의 탄생
작년 가을, ‘100회 항심(恒心)’이라는 걸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야식을 끊고 밤 8시 이후에는 먹지 않겠다는, 연구실에서 흔히 볼 법한 챌린지였다. 다만 특이한 것은 ‘100일’이 아니라 ‘100회’ 항심이라는 점이다. 기획 의도(?)는 이러했는데, 100일을 독하게 결심했다가 실패하느니 자기 나름의 속도로 100회를 채우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렇지, 곧 회식도 있고, 송년회도 있고, 인간관계도 있는데 어떻게 매일 완벽하게 수행을 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이다. 원래 모든 챌린지의 목표는 100%보다는 80% 달성으로 잡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하지 않던가.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그런 마음으로 항심 결의안에 사인을 했다.
우리의 범행은 금방 발각(?) 되었다. 연구실의 ‘어떤 의지’가 ‘이딴 수행이 어딨냐!’는 포효와 함께 우리의 결의안을 (물리적으로) 갈래갈래 찢었다. 밤에 라면을 먹지 않겠다면서도 ‘오늘은 예외’, ‘이번 주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대체 무슨 수행이냐는 것이다. 그날 이후 <입보리행론>을 읽고 서로의 문제를 공유하며 수행법을 고민하는 일종의 자조모임(?) 세미나가 계획되었다. 이름하여 ‘수행과 공부의 기예 세미나(수공예 세미나)’! 수공예 세미나 개국공신, 일명 ‘을사오적’의 탄생이었다.
대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 우리의 마음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왜 굳이 야식을 끊겠다고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100회’라는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고 안 먹은 것도 아닌 이상한 방식을 선택했을까. 야식 정도야 그냥 먹으면 먹는 거고 아니면 마는 것인데,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나는 이 사건이 꽤 현대적인 욕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식탐을 절제하고는 싶지만 동시에 ‘배고픔을 참는 괴로움’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우리는 수행을 원했지만 고통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100회 항심’이란 절제를 향한 결의라기보다, 절제의 괴로움을 최대한 우회하려는 타협의 산물이었다. 여기에는 절제는 곧 괴로움이고 그것은 해방의 기쁨을 위한 억제라는 전제가 있다.

2. ‘절제’를 소비하는 시대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자극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러한 과잉의 결과로 생겨난 피로와 불안을 관리해야 한다. 다이어트, 명상, 디톡스 프로그램 콘텐츠가 넘쳐나고 최근에는 비만 치료제인 위고비, 마운자로 같은 약물이 등장하면서 식욕조차 기술적으로 관리 가능한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절제마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욕망을 멈추고 싶다는 욕망조차 소비의 형태로 조직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절제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기치다. 그것들은 대개 절제의 고통을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한다. 덜 힘들게, 더 쉽게, 더 빠르게. 간헐적 단식 앱은 언제 먹어도 되는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약물은 뇌의 포만 신호를 조작해 배고픔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절제하되 절제에 수반되는 괴로운 느낌은 없애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정말 절제인지, 아니면 절제처럼 보이는 또 다른 탐욕인지 헷갈린다. ‘100회 항심’이 절제의 고통을 회피하려 했던 것처럼, 지금 ‘절제 상품’ 전체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절제를 고통으로 느끼는 걸까? 그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참는다’는 시각 때문이다. 이 구도 안에서 욕망의 주체는 철저히 ‘나’다. 먹고 싶은 것은 ‘나’의 것이고, 그것을 포기하는 것도 ‘나’의 결단이다. 절제는 내가 가진 것을 나 스스로 빼앗는 일처럼 느껴진다.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이런 프레임 안에서 고통 없이 절제하게 해주겠다는 산업의 약속은 매혹적이다. 내 것을 빼앗기는 느낌을 없애주니까. 그러나 이 구도 자체가 하나의 착각일 수 있다. 애초에 욕망과 절제는 ‘내 것’이었는가?
나카자와 신이치는 자본주의 사회를 ‘증식’의 체계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단지 화폐가 증가하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욕망이 끊임없이 증식해야 유지되는 구조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와 이슬람의 라마단을 대비시킨다.
자본주의 시대에 그야말로 크리스마스가 자본주의 자체를 끓어오르게 하는 축제가 되는 것이다. 이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타클로스로 상징되는 ‘증여의 영’이 배회한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 호기롭게 증여의 정신으로 가득한 ‘성령’이 쏟아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의 목적은 증식이며 ‘매일이 크리스마스’야말로 자본주의의 꿈이다. (…)
같은 동절기(이슬람력 9월), 이슬람은 라마단 기간의 단식 의식을 준비한다. (…) 여기서는 증식 반대가 칭송되고 있다. 욕망을 끊는 것, 그것을 할 수는 없더라도 욕망을 줄이는 것은 신을 기쁘게 한다. “그대들이 소정의 날수만큼 단식의 의무를 지키고, 그대들을 인도한 알라를 찬미하면 그만이다. 어떻든 그대들은 감사하게 될 것이다.” (<녹색 자본론>, p.130~132)
크리스마스는 본래 로마의 농경 축제와 결합하면서 풍요와 증식을 기원하는 성격을 품고 있었는데 자본주의적 배치에서 마침내 소비와 증여의 축제로 완성되었다. 거리에는 캐럴이 흐르고, 산타클로스는 끊임없이 선물을 나른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더 사라, 더 즐겨라, 더 들떠라’는 명령처럼 작동한다.
반면 라마단은 전혀 다른 리듬 위에 놓여 있다. 라마단 기간에 무슬림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 먹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이 공동체 차원에서 제어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식이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식을 ‘먹지 않는 행위’로만 보면 그것은 결핍의 기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단식은 세계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끊임없는 증여로 유지되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고, 물질을 흡수하며 살아간다. 이 구조는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먹는다는 행위는 너무 자연스럽게 반복되기 때문에, 그것이 타자의 생명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은 쉽게 지워진다.
라마단의 단식은 바로 자연스러운 욕망을 중단함으로써 망각된 기억을 복원한다. 먹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사실을, 즉 내가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관계성을 일깨운다. “그대들은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는 쿠란의 구절처럼, 절제는 결핍의 괴로움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이 된다.
3. 마음을 단련하는 과욕(寡欲)
맹자는 말했다. “마음을 기르는 데 욕망을 줄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養心莫善於寡欲-盡心下 35)”라고. 여기서 욕망은 단순히 물질적 탐욕이 아니라 눈과 귀와 입과 몸이 끊임없이 외물로 치닫는 상태를 가리킨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생각 없이 이 자극만을 좇아 외물에 끌려가는 것이다. 맹자는 이를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放心)’라고 했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하염없이 보면서 스크롤을 멈추지 못하고, 배부른 줄 알면서도 음식에 손을 뻗는 것은 바로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다.
본래 우리 마음은 인(仁)에 바탕한다.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바로 구하려고 하는 것처럼, 인이란 어떤 계산 없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타자의 고통을 곧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자,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가 본래 없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나’의 소유를 극대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만물과 하나되는 방향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무수한 자극 속에 방치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곧 ‘나’인 양 느낀다. 마음이 사욕(私欲)에 가려지는 것이다. 사욕은 관계를 망각한 욕망, 즉 세계로부터 받기만 하고 그 흐름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잊은 상태의 욕망이다. 그러니 불쾌한 것은 싫고 쾌한 것만 취하려 한다.
‘100회 항심’은 수행의 시작이 아니라 감각적 자극마저 수행으로 전유하려는 욕심의 극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절제란 욕망을 억누르는 투쟁이 아니라, 마음이 본래 가려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일이다. 라마단의 단식이 관계성의 복원이듯 절제와 과욕(寡欲)은 본성을 회복하는 기예다.
‘을사오적’은 수공예 세미나에서 오늘도 저마다의 속도로 항심을 쌓아가고 있다. 세미나 시간은 번뇌의 소용돌이가 따로 없다. 어째 매주 같은 자신의 악업을 가져와도 매번 다르게 풀린다. 그 이유는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며 생각을 나누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 증여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절제가 괴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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