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옆에 옆에” 놓인 시간들
Yeonju(인문공간 세종)
베를린은 금·토·일, 짧은 주말 여행이었다. 온도는 영상 1도였는데 매서운 바람 때문에 감히 사진을 찍을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손을 꺼내는 순간부터 손끝이 먼저 굳는 느낌. 도시를 걷는 내내 “춥다”가 제일 앞에 있었고, 이상하게도 그 추위가 베를린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베를린에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꽂힌 건, 장소가 아니라 숫자였다. “30%.” 나치는 1932년 선거에서 겨우 30%대 지지를 받았고, 다수당이 아니었는데도 1933년 1월 히틀러는 총리로 임명되며 권력으로 들어갔다. 그 숫자가 무서웠던 건, ‘충분히 큰 지지’가 아니라 ‘충분히 작아 보이는 지지’로도 시대가 기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울어짐이, 공통의 미워할 대상을 만들어 결속을 단단하게 하는 방식으로 더 빨리 굴러갔다는 점이 더 서늘했다.
베를린은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이 옆에 옆에 서 있다. 몇 걸음만 옮겨도 장면 전환이 빠르다. 유대인 추모 공간을 지나며 이미 마음이 무거워졌는데, 곧이어 나치에 맞서다 살해된 국회의원 96명을 기억하는 장소가 나온다. 그리고 ‘집시’라는 말로 뭉뚱그려 배워왔던 신티·로마, 동성애자 박해 희생자를 위한 추모 공간도 가까운 동선 위에 나란히 있다. 베를린의 추모는 한곳에 모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바깥에 노출된 채로 일상 위에 올려두는 방식이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장 숨막히게 충격적이 었던 순간은 또 다른 시대인 동서독 사이 장벽에 있던 ‘죽음의 띠’의 모래였다. 발자국이 남게 만든 감시용 모래. 인간은 모른 척할 수 있다. 그런데 발자국이 남으면 “봤다”는 증거가 된다. 나는 거기서 공포를 느꼈다. 잔혹함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선택을 주지 않는 설계가 이렇게 간단할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개인의 판단을 막아버리는 전체주의는 거창한 구호보다 먼저, 이렇게 ‘판단할 여지’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걸 모래가 보여줬다.
이 도시가 정신없게 느껴진 이유는 시간이 너무 빨리 바뀌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 변화의 ‘나침반’처럼 서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거대한 나치 건물, 지금의 독일 연방재무부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35~36년에
제국항공성(나치 독일 항공/공군 행정의 중심) 본부로 지어졌고, 전쟁 뒤 동독 시기에는 정부의 집/부처 건물 역할을 바꿨다. 체제는 바뀌고, 이념은 바뀌고, 그 건물은 같은 자리에 남아 역할만 갈아끼운다. 그래서 나는 그 건물이 ‘상수’처럼 느껴졌다. 변수가 난무하는 베를린에서, 그 건물 하나가 시대 변화를 지도 위에서 가리키는 기준점처럼 서 있었다.
물론 베를린에서도 나는 힙한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고, 옷 쇼핑도 했다. 도시에는 언제나 현재의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다시 베를린에 간다면, 나는 더 많이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갈 것 같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과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를 읽고 간 베를린은, 내가 이미 가진 문장에 계속 덧문장을 얹어주듯이 말을 걸어왔다. 베를린은 “한번 보고 끝나는 곳”이 아니라 “또 읽어야 하는 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질문은 여기로 돌아온다. 과거는 정말 끝났을까, 아니면 형태만 바꿔 옆에 서 있을 뿐일까? 단 30%로도 권력이 가능했던 이유가 ‘공통의 적’을 만드는 데 있었다면, 지금 우리는 누구를 다수의 적으로 만들어내려 하고 있을까? 독일에서는2024년 튀링겐 주 선거에서 AfD가 32.8%로 1위를 했다. 스웨덴에서도 2022년 총선에서 스웨덴민주당(SD)이 20.5%를 얻고, 주류 우파 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도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집권당 이탈리아형제들(FdI)이 28.8%로 30%에 육박했다. 베를린에서 내가 느낀 불편한 마음은 과거를 봐서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의 문장으로 다시 읽히는 순간을 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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