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자본론』 리뷰 _ ‘숲’에서 모노의 목소리를 듣다
박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1. 곤경에 처한 예술과 사상
2001년 9월 11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에 두 대의 항공기가 충돌했다.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 알 카에다의 소행이었다. 그로부터 5일 뒤 9월 16일, 독일의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기자회견에서 9‧11 테러를 두고 “최고의 예술작품”이라고 말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다음날부터 예정되었던 공연 계획이 줄줄이 취소되었고, 사실상 사회적 공간에서 추방당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사건을 다르게 기록했다. 《녹색 자본론》의 세 번째 글 〈슈토크하우젠 사건―안전영역에 포섭된 예술의 시련〉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슈토크하우젠은 9‧11 테러를 지지한 것도, 극찬한 것도 아니다. 슈토크하우젠은 예술가다. 모든 것을 예술의 일종으로 바라보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된 사람이다. 이때 예술은 선악의 저편에 있는 것이었다. 빛과 어둠, 창조와 파괴로 판단해야 할 것이었다. 9‧11 테러 역시 예술이었다. 하지만 슈토크하우젠은 그것을 분명 “범죄”라고 했었고, “그러한 것에는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거부할 틈도 없이 대량으로 살해당”한 끔찍한 파괴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슈토크하우젠은 자신의 발언이 충분히 오해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자리에 있는 기자들에게 “오프더레코드”를 부탁했지만, 미디어는 그의 발언을 왜곡해 비난의 화살을 맹렬히 쐈다.
신이치는 슈토크하우젠을 엄습한 재난에서 “예술과 사상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읽어냈다.(15) “예술은 안전함이나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보호받는 세계에 언제나 도전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루틴에서 탈출을 모색하여, 사람들이 붙잡혀 있는 환영의 베일을 걷어 내어 현실(real)을 출현시키려는 일탈적인 모험을 시도한다. 예술은 치유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 내부에서는 도발과 파괴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150) 이것은 오래전부터 인류가 지성을 발명한 방식이기도 하다. 인간은 고통과 불쾌함을 체험하면서 “언어를 손에 넣고 상징화의 도구를 소유한다.”(153) 그리하여 부재와 상실을 다르게 의미화하고, 신체적 감각을 다양하게 실험해 왔다. 이것이 지성을 훈련한 오랜 방식이자 무의식에 새겨진 본능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더 이상 이런 식의 사유를 용인하지 않는다. 슬픈 건 슬픈 것이고,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다. 풍요롭고 안전한 세계를 굳이 질문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위험하고 불온하게 여겨질 만한 모든 것을 적대시하고 배척한다. 그 결과, 슈토크하우젠이란 예술가는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그런데 슈토크하우젠을 엄습한 이 곤경은 이 세계의 구조적인 위기이기도 하다. 신이치는 그 구조를 ‘압도적 비대칭’이라고 읽어냈다.
2. 비대칭을 회복하기 위한 사유의 실험
흥미롭게도 신이치는 첫 번째 글 〈압도적 비대칭―테러와 광우병에 대하여〉에서 9‧11 테러와 광우병을 대칭성이 파괴된 것에서 비롯된 동질적 테러로 분석했다. 이 세상은 너무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 한쪽은 지나치게 풍요롭고 안전한데, 다른 한쪽은 지나치게 빈곤하고 위태롭다. 이 비대칭적인 관계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간과 동물, 도시와 지방 등등. 문제는 이러한 비대칭이 한쪽의 다른 한쪽에 대한 착취로부터 유지‧심화되고 있다는 것이고, 착취당한 쪽은 공멸의 각오로 자폭을 시도한다는 사실이다. 9‧11 테러와 광우병은 비대칭적인 세상이 만든 파국의 징후인 것이다. “‘빈곤한 세계’의 주민들”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두 대의 항공기를 탈취해 “‘부유한 세계’”로 돌진했고(38), 고기로 상품화된 소들은 “인간이 먹을 수 없는 독극물로 변하여, 가축의 운명을 만드는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세계로부터 영원히 도주하려”고 결행했다.(30)
과거에는 “현실을 지배하는 비대칭이 만든 죄를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어왔다.”(28)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종류의 노력들이 모두 우습게 여겨지고 있다. 비대칭은 회복되기는커녕 심화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공멸의 테러가 감행되고 있으며, 슈토크하우젠 같은 예술‧사상가들이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신이치가 《녹색 자본론》을 쓰고 약 2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코로나19와 하마스의 과격한 테러도 비슷한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압도적인 비대칭적인 세상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끔찍한 파괴가 일어날지 걱정스럽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이치에게 그 작업은 사물과 새롭게 관계 맺는 법, 이 세상의 작동 원리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두 번째 글 〈녹색 자본론―이슬람을 위하여〉다. ‘녹색 자본론’이란 마르크스의 작업(자본론)을 이슬람의 일신교적 원리(녹색)에 따라 해석한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분석했다. 우선, 그는 기존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뒤집어야만 했다. 이른바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증식하는 것은 공장의 생산기계 같은 고정자본이며, 노동자들의 작업은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는 유동자본이라고 구분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뒤집었다. 노동자들의 활동이야말로 가치를 창조하는 ‘산 노동’이며, 공장의 생산기계는 ‘산 노동’에 의해 산출된 ‘죽은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흡혈한다. 그리하여 마치 ‘죽은 노동’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미고, 노동자들을 족쇄만 가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신이치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작업은 충분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탁월했다. 그는 가치가 창조되는 것은 노동자들의 활동, ‘산 노동’임을 밝혔다. 그러나 극도로 왜곡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가 상품이 되고, 상품이 된 화폐가 스스로 가치를 증식하는 마법을 일으켰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가 심화되어 노동자들이 단결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신이치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분석에서 가치의 증식에 관한 콤플렉스를 발견했다. 화폐-상품의 증식을 비판하면서 산 노동을 발굴했지만, 여전히 가치를 증식시키는 마술 같은 작용을 믿었던 것이다. “자본을 해명해도 자본주의의 ‘외부’로는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116)
신이치는 이슬람의 원리적 사유를 빌려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한다. 이슬람은 원리적으로 증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일한 존재인 알라의 표현이다. “삼라만상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모양도 색도 속성도 가지각색으로 다양하게 피어오르고 있으나 그 모든 것(있는 것)의 존재성은 ‘단 하나인 실체’로 수렴된다.”(82) “바람의 산들거림도 빛의 반짝임도 그 자체로 알라이며 마음에 떠올라 걷잡을 수 없는 이미지도 알라의 의지가 나타난 것이다.”(129) 이런 세상에서 “화폐는 사물의 대용이 아니면 안 된다.”(63) 편의상 어쩔 수 없이 화폐가 쓰이지만, 화폐가 존재들의 가치를 재단하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존재들의 가치는 측정될 수 없다. 알라의 직접적인 표현물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유하고 독특한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존재들을 하나의 가치에 따라 균질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이슬람의 사유는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슬림을 따를 필요는 없다. 이슬람의 사유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한 여러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인류학자로서 신이치의 통찰이 빛난다. 언젠가 신이치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경제 시스템이나 과학기술, 그리고 종교도 인간의 마음 즉 뇌의 보편적 구조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자본주의도, 이슬람도 모두 “보편적 구조”로부터 발생한 문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조상 이슬람을 발생시킨 “보편적 구조”는 애니미즘과도 매우 흡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슬람과 애니미즘을 통해 서양의 자본주의와 또 다른 “보편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그로부터 새로운 사회 원리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한 고민이 부록으로 추가된 네 번째 글 〈모노(モノ)와의 동맹―증식, 생명, 자본주의〉에 담겨 있다.
3. 모노와의 동맹, 세상에 대한 새로운 상상
‘모노(モノ)’는 “-것” 혹은 ‘사물(物)’을 뜻하는 일본어인데, 신이치는 이 단어와 관련된 역사를 분석하면서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적 실천을 제시한다. 근대적 인간은 자연을 철저히 대상화하고 도구화했다. 그러나 모노는 그런 인간중심적 관점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인간이 함부로 통제하거나 장악할 수 없는 잠재력이 있다. 모노는 양의적인 존재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 신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의 힘과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의 힘이 모노에 접혀 있다. 즉, 모노를 어떻게 현실에 펼쳐내느냐에 따라 9‧11 테러 같은 끔찍한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고, 녹색 자본론 같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얻어낼 수도 있다. 공멸이 아닌 공존을 위한 기예. 이것이 우리가 모노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 필연적 이유다.
이것은 서양의 자본주의적 관점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존재감이다.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사람들의 경쟁을 부추기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그보다는 존재의 고유한 의미를 이익과 손해, 가치의 효율적 증식이라는 논리로 왜곡하는 시스템이다. 모든 것을 균질화하고, 자원과 상품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계가 없다. 심지어 인간마저 자기 계발의 주체로 삼아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부추긴다.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모노와의 동맹’ 같은 윤리적 실천이 필요하다.
‘모노와의 동맹’에 담긴 사유는 최근 생태학 담론들과 많은 부분에서 공명한다. ‘모노’는 ‘인간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체’라는 오만한 사고를 무너트린다. ‘모노’는 생물을 넘어서 무기물까지 포함한다. 인간과 자연, 생물과 무생물, 주체와 객체의 분명한 경계와 위계가 흐려지는 존재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생태학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작업과 매우 유사하다. 생태학 또한 비인간 존재들을 함부로 착취하고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선다.
전체 제목인 녹색 자본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것은 단지 이슬람의 사유가 가미된 자본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만이 주체인 세상, 자본의 언어만이 유일한 질서가 된 사회를 넘어 존재의 다양성과 고유함을 회복하려는 사유의 전환이다. 어슐러 르 귄이 애용한 ‘숲’이 떠오른다. 르 귄에게 숲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숲으로 펼쳐지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과 매우 다르다. 숲은 비인간적 언어와 사유가 요동치는 공동체이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대로 존재하는 사회이며, 중심 없는 질서의 상징이다. 주체의 모습도 달라진다. 손끝에서 부서지는 마른 낙엽,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수백 년을 견뎌낸 매끈한 표면의 바위. 이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조작할 수 없는 예술 작품이며, 각각의 것이 자신의 존재를 펼쳐왔다는 증거다. 즉, 우리가 들을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충분히 존중한다면 침묵 속에서 그 존재들의 밀도를 느낄 수 있다.
신이치가 모노와의 동맹을 통해 시도하려고 했던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 또한 서양의 자본주의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고 억압당한 모든 존재의 해방을 염원했다. 존재들 간의 위계와 착취가 성립하지 않는 세상, 효율과 증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공동체를 상상했다. 녹색이란 바로 그 해방의 색깔, 난잡한 얽힘이 자아내는 빛깔이다. 요컨대, 녹색 자본론이란 숲처럼 다양한 존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얽혀 살아갈 새로운 질서를 발명하기 위한 시도다. 모노와의 동맹은 그러한 시도를 위한 조용하면서도 급진적인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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