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인류학인
이기헌(인문공간 세종)
나는 매주 진행된 인문세 글바다팀에서 공부하는 선생님들과 같이 글을 써왔다. 매달 지정된 한 명이 글을 써오면 다른 멤버들은 각자 의견을 내고 토론하고 수정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의 글을 같이 완성하는 것이었다. 모임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글을 인쇄해서 첨삭하고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글쓴이에게 보냈다. 4주에서 길게는 8주까지 이어진 그 시간을 보내면 어느새 마감날이 온다. 마감날 글을 보내면서는 좀 더 열심히 쓸 걸 하는 후회와 일단 끝냈다는 시원함이 교차한다. 그래도 글이 공개되는 날에는 보낼 때와 조금 다르게 작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혼자 썼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는 마음에 함께한 학인들에게 감사함도 느낀다. ‘함께’가 좋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여럿이 함께하면 힘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의견이 부딪히거나 좋지 않은 평가를 들을 때에는 이런저런 말을 듣지 않고 혼자 하면 속 편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 때 부딪치게 되는 그 사람은 나에게 번거로움의 대상이 된다. 같이 하면 좋지만 동시에, 같이 하면 힘들다. 힘들어도 서로 참고 희생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 ‘함께’하는 사람의 태도일까? 희생하는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하는 것도, 내가 잘 되려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라는 것도 공동체의 의미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동체는 같은 목적을 가진 구성원 모두가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 생각을 고집하느라 전체를 보지 못하고, 혼자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공동체도 나도 둥글둥글 잘 굴러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잘 지내고 싶은 나에게 해양 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은 헬렌 체르스키의 『블루 머신』은 구성원 간의 멋진 콜라보의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저자 헬렌은 수백 권의 과학책을 읽고, 3개의 학위를 따는 등 물리학 연구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는 다음 연구 주제를 찾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주제를 선택한 기준이 의외로 느껴졌다. 과학자의 연구라니 왠지 거창한 의도나 목적에서 시작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 기준은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하면서도 실험 후 뒷정리가 간편한 연구였다. 그렇게 선택된 주제는 거품이었다. 우연히 선택한 거품이라는 주제는 그를 의도치 않게 거대한 바다의 세계로 이끌었다. 헬렌은 바다를 알게 되면서 바다야말로 가장 방대한 물리학 이야기를 품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어쩌다 해양학자의 길로 들어선 헬렌은 놀란 마음을 억누르면서 닥치는 대로 글을 읽고 바다 탐구에 몰두했다.
『블루 머신』은 바다가 지구를 구성하는 하나의 커다란 엔진임을 설명한다. 이 책의 내용은 대기, 빙하, 생물, 육지와 더불어 해양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내용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그가 바다를 알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아우트리거 카누(Outrigger Canoe)를 배우는 과정이 분량은 작지만, 인상 깊었다. 아우트리거 카누는 길고 좁은 카누의 선체 옆에 물에 뜨는 얇은 부재(浮材)가 붙어있는 것으로, 부재는 파도와 바람에도 쉽게 뒤집히지 않도록 항해에 도움을 준다. 나는 그가 탄 카누의 팀워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함께 흐름을 타며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경이로워 보였다. 말을 하지 않고도 호흡만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았고, 팀원 한 명 한 명이 전체에 스며들어 합일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 어우러지는 이 연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헬렌이 그들 사이에 섞여들기까지 모든 과정을 관찰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팀워크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본다.
나를 바꾸다
헬렌의 관심사는 분명했다. 바다를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것. 관심은 호기심을 부르고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다에 관한 이론을 가리지 않고 흡수하던 그는 물에 직접 들어가기로 했다. 수영과 스쿠버 다이빙을 익히며 온몸으로 물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물속은 평소 우리가 생활하는 물 밖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소리도 잘 들리지 않으며 몸의 움직임은 둔하고 숨 쉬는 것도 곤란하다. 한계가 있지만 물의 환경에 적응하려면 계속 훈련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운 유영법들을 터득하게 되고, 숨을 참는 시간도 길어지고, 물속 수온과 압력에 익숙해져 몸의 반응도 보다 자연스러워진다. 헬렌은 몸으로 물을 직접 배웠다.
시간이 지나 그의 눈에 아우트리거 카누의 세계가 포착되었다. 자신이 방문했던 런던에서 우연히 지역의 태평양 카누 클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이다. 바다에 관심이 없었다면 스쳐 지났을 이야기지만 모든 관심이 바다로 향한 사람이기에 태평양에서 카누를 타는 상상은 매력적인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차갑고 탁한 템스강 하구에서 카누를 연습한다는 것은 보통의 열렬한 마음이 아니고서야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누구보다 강한 호기심을 가진 헬렌 자신도 못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책에서 묘사된 헬렌의 노 젓기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카누 코치들이 물과 노가 연결되어야 한다고 한 만큼 노의 무게, 각도, 방향에 따라 밀어내는 물에 의해 얻어지는 추진력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1년 동안 노를 저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태평양 카누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스텝은 카누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아우트리거 카누는 모든 행위에 하와이 문화가 녹아 있다. 오래전부터 카누는 낚시로 섬사람들의 식량을 공급하고 다른 섬으로 이동을 하는 수단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섬과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광활한 태평양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섬의 주민들은 모두가 잘 사는 방법이 타인과의 협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나 아닌 다른 이에 대한 환대와 존중, 포용을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겼다. 어디서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의미 없는 육체노동에 불과하다. 헬렌은 협력은 개개인의 위대함을 내세우는 일이 아니라 모두의 전진을 위해 같이 호흡을 맞추어 나아가는 것임을 배웠다.
변화에 소극적인 나는, 바다가 이끄는 곳을 따라 앎에 부딪히며 자신을 바꾸어 내는 헬렌의 모습이 좋았다. 문득 처음 인류학을 공부한다며 낯선 자리에 들어왔던 날이 떠오른다. 6명의 학인이 작은 공방에서 토론하고 있었는데, 나는 책도 어렵고 대화의 흐름에 참여하지 못해 난감했다. 입을 못 떼는 내가 답답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미래의 어떤 날 토론의 대열에 끼어드는 조금 달라진 나를 그려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함께 하나의 팀을 이루고 그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려면 생으로 덤빌 수 없는 일이다. 그 자리에 맞게, 분위기에 맞게 나를 바꾸면서 단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조건에 따라 다를 것 같다.
내가 카누팀의 팀워크의 비밀을 추적하는 데 먼저 만난 것은 변화에 적극적인 ‘훈련생’이었다. 헬렌의 적극성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건 타고난 체력도 아니고, 오랜 기간 축적한 지식도 아니다. 나는 그를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게 하고, 노를 들게 하고, 카누의 역사를 배우게 만든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나 묻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 앞에서는 될 방향으로 계속 이런 저런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니 보통은 그 과정이 재미없기 어렵다. 타인의 인정을 좋아하는 나에게 필요한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칫 타인의 바람을 나의 것이라 혼동하면 안 될 일이다.
정체성이 이끈다
드디어 헬렌은 카누 항해자가 되었다. 90km 떨어진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6인승 카누 3대가 동원된다. 각 카누에서는 선원 6명이 노를 젓고 나머지 6명은 보조 배에 탑승한다. 카누 앞부분이 해수면에 부딪히며 발생한 물보라가 카누를 덮칠 때면, 선원들은 노를 물속으로 더욱 깊숙이 밀어 넣는다. 카누 선원들은 노와 조종술을 바탕으로 바다에 밀착해서 한 몸이 된다. 목적지 도달까지 1시간마다 교대로 노를 젓는다. 나는 사실 속으로 여러 번 물었다. 이들이 왜 카누를 타고 그 먼 거리를 노를 저으며 힘들게 건너가는지. 혹시 배달 업무가 있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했다. 1시간 내내 허공에 팔을 저어도 힘들 것 같은데 노로 물을 밀어내려면 얼마나 힘들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 그의 항해를 주시했다. 1시간이 지나 교대 시간이 오면 카누의 선원들과 보조 배의 선원들이 능숙하고 신속하게 교대를 완료한다. 이제 노를 잡은 선원들은 탑승하자마자 모두가 개의치 않고 노를 젓는다. 교대해서 쉬는 타임이 오면 살 것 같겠다 하는 나의 마음과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바다와 하나가 된 덕분에 선원들은 절대적 기쁨과 활력을 듬뿍 보상받는다고 한다. 선원들의 손에 연결된 노는 카누와 바다를 하나로 묶는 도구다. 헬렌은 노를 통해 바다를 느끼며 과학에서 경험하지 못한 바다와의 연결 고리를 느꼈다. 그는 항해하는 데 9시간이 걸렸지만 보조 배에서 쉬는 1시간보다 직접 노를 젓는 1시간, 바다와 밀착된다는 그 시간 동안 아드레날린이 넘쳐흐르는 기쁨을 만끽했다고 말한다. 바다와 연결되고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경험, 파도와 또 이어지는 파도에 집중하느라 고된 육체적 노력이 잊혔다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마 내가 그 환희를 알 길은 없을 것 같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고통을 잊었다는 점에서 작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날 출전했던 마라톤 대회가 떠올랐다. 나는 반환점인 5km부터 이미 숨이 차고 땀을 뻘뻘 흘렸다. 초보인 나와 보폭을 맞추어준 언니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는데, 멀리서 목표인 결승점이 보일 때 정신이 집중되고 다리에 힘이 붙는 것을 느꼈었다. 함께 완주하고 벅찬 기분을 느꼈었다.
함께한다는 것은 같이 노를 젓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같이 노를 팍팍 저어야 하는 타이밍에 나만 힘들다고 요령을 피우면 이후에 벌어질 일은 노를 저어보지 않은 사람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바다에서 다 같이 빠지겠다는 마음이 아닌 이상 내가 누군가와 함께 노 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어, 건강한 몸과 마음은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서 노를 저어 건너가려면 카누에 탄 모든 사람이 서로 돕는 강한 팀을 이루어야 한다. 일단 카누에 타면 달리 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솔직하고 정중하게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누군가의 평가에 감정이 동요될 때 내가 함께 탄 카누의 선원임을 상기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아닌 우리의 목적지로 나아가는 항해에 집중해야 한다. 대충 가고 싶지 않고 좌초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카누팀의 멋진 팀워크를 보면서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협력을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협력을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항해를 떠나기 전 선원들의 의례가 떠올랐다. 선원 모두는 큰 원을 그리고 서서 손을 맞잡으며, 카누 전통을 몸과 마음에 새기는 의식을 치른다. 선장은 원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하늘과 바다와 땅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여기에서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누 항해자들의 고도의 집중력과 팀워크의 비밀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흐름을 잘 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친밀감으로 엮인 공동체가 아니라 공부하자는 목적으로 모였다. 목적지를 향해 각자 노를 젓지만 멤버 전체와 리듬을 맞추듯이, 어떻게 같이 이 공부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항해가 시작되다
나는 어쩌다 인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작은 관심이 도서관에서 이곳 인류학 공부의 장까지 이끌었다. 바다를 배우는 헬렌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가 바다를 항해하는 하나의 작은 카누처럼 느껴졌다. 나는 몇 년 호흡을 맞추어온 인류학 세미나 팀원들 사이에서 함께 광대한 앎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답사를 가고, 잡지를 만들면서 실험하는 사람들이다. 매주 하는 숙제가 우리를 단단히 엮는다. 올해 우리의 주제는 <해양 인류학>이다. 이번 시즌 우리는 인류가 관계 맺으며 살았던 바다를 연구하는 탐험가가 되었다. 일 년간 진행될 이번 주제로 어떤 파도를 타고 어느 섬에 닿게 될지,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지 설레고 기대된다.
화창한 하늘 아래로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이 느껴지는 듯했다. 내 바로 뒤의 여섯 번째 좌석에 앉아 카누 방향을 조종하던 캠Cam이 외쳤다. “Ho’omakauk며!”‘준비’를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노를 들어 올렸다. 찬란한 햇빛이 눈앞 바다에 닿는 순간 노가 공중에서 마지막 정적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무아Imua!”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구령과 함께 노 6개가 물에 들어갔다. 항해가 시작되었다. (헬렌 체르스키, 김주희 옮김,『블루 머신』(쌤앤파커스),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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