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인간
최수정(인문공간 세종)
인간과 노동
많은 사람은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이는 사회적 삶도 없으며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삶의 최우선이 되고, 노동으로 얻는 즐거움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노동을 하는 많은 사람은 돈이 충분하면 노동을 그만두고 취미 활동이나 하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노동이 삶의 자유를 속박하고, 노동하지 않는 일상이 훨씬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나의 노동 활동 경험은 비교적 짧지만 그래도 노동을 떠올리면 우선 고단함이 느껴진다. 노동의 가치라고 하는 자아실현, 타인과의 관계 맺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안정감보다 노동으로 인한 피로감이 더 크다. 어째서 인간의 생존 활동과 직결되는 노동이 나에게는 단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처럼 느껴질까?
노동은 인간만의 활동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의 인간성을 드러낸다. 인간성이란 자기 바깥의 존재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노동을 위해 자기 신체를 도구로 이용하여 사물을 변형시키고 자기도 변화한다. 노동으로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를 조직하며 자기 신뢰와 자기 효능감을 쌓아간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노동을 통해 스스로 자기 삶을 구성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념을 잃었다. 창조 활동과 연결된 노동이 돈의 가치 외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고 믿은 지 오래됐다.
나는 최근에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게 됐다. 책에서 저자는 직접 노동 현장에서 체험한 동사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전화받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청소하다’라는 동사를 통해 나라면 절대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극한의 노동을 몸소 체험한다. 그리고 저자는 밥벌이를 위해 격한 신체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 노동과는 다른 노동의 의미를 말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삶의 극한 체험 현장인 것 같은 그 노동이 사라지는 것을 아주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최저 임금과 같은 낮은 급여를 받으며 사회적 인정은커녕 정신과 신체의 마모를 부추기는 강도 높은 노동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는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가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 무엇이길래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 쓸쓸하다고까지 하는 것일까? 나는 저자가 말하는 노동과 인간성의 관계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로 인문세 인류학 세미나에서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태평양의 트로브리안인드인도 자신들의 노동을 강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경작한 작물들이 온전히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하고 심지어 수확물 전체를 다른 사람을 위해 주어야 하지만 수확물을 위해 부단히 갈고 닦는 자기 노동 능력을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로지 남을 위한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자부심의 정체가 무엇일까?
나는 위의 두 책의 저자가 말하는 노동에서 내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인간과 노동의 떼려야 뗄 수 없는 형식적 의미와 가치가 있어 보였다. 노동을 단지 고통스러운 활동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생각을 이어나가고 싶다.
말을 주고받는 노동 현장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 1부는 ‘전화받다’, 2부는 ‘운반하다’에 관한 이야기다. 특히 1부 ‘전화받다’의 콜센터는 저자가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는다고 할 정도로 모욕과 무시가 일상적인 노동 현장이다. 콜센터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입사할 때 ‘정체성 포기 각서’를 썼나 생각될 정도로 자기라는 정체성을 붙들고 있으면 견뎌낼 수 없는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가끔 상품 A/S를 위해 콜센터에 전화할 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많아졌다. 전화 받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건만 마치 그 사람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콜센터 직원은 수도 없이 죄송하다고 반복하고, 불편에 대해 사과하며 자존심조차 없는 사람처럼 끝없이 굽신거렸다. 그런데도 저자는 콜센터 전화 받는 노동 현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거리낌 없이 모욕과 무시를 일삼을 수 있는 이런 노동 환경이 사라지면 좋을 것 같은데, 저자는 왜 전화 받는 노동이 필요하다는지 의문이 들었다.
2부 ‘운반하다’는 택배 물류센터 이야기다. 모두가 잠든 밤 온몸이 땀에 젖어 후들거리는 몸을 버티고 택배 분류를 하는 저자의 모습은 집 앞까지 배달되는 택배의 가치를 알게 해 준다. 나의 일상적 편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나 대신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든 택배회사의 컨베이어벨트 소음 속에서도 동료가 좀 더 편안하고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걱정하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피로와 소음, 끝도 없이 밀려드는 택배 물품으로 서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동료를 위한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전하려는 목소리에 감동했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1, 2부의 극한 노동 이야기는 3, 4부로 이어지며 좀 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노동으로 확장된다. 마치 ‘나’를 잃어야만 다른 것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3부 ‘요리하다’는 뷔페식당에서 요리하는 저자가 ‘음식이라는 언어로 손님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정신없이 바쁜 주방 안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말들이 있지만, 저자는 외부와 격리된 듯한 주방에서 자기가 만든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이 만든 음식을 가리키며 맛있다고 너도 먹어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느끼던 뿌듯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고 했다.
4부 ‘청소하다’에서 나는 저자와 함께 청소일을 하는 동료가 저자가 더 나은 일을 하기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럴 때 인간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게도 한다는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평생 노동을 통해 먹고 살고, 먹고 산 분투의 흔적을 신체에 새긴다. 이 과정에서 점점 기존의 내 모습이 부서지고 깨지면서 매번 새로운 인간이 된다. 특히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은 노동 현장에서 오가는 말들이 인간의 인간성을 얼마나 깊이 보여주는지 묘사하고 있다. 나는 저자가 묘사하는 노동 현장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해 낯설었던 사람들이 단절되기도 연결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저자가 말했던 ‘특정한 종류의 인간형’을 생각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킨다. 인간 노동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하는 일이 아니다. 노동하는 인간 이전에도 인간은 생존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한 다른 것을 실현한다. 노동 현장에서 말을 통해 서로를 조직하고 재조정하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만든다. 노동 현장은 그야말로 생각을 주고받는 작은 하나의 공동체였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존한다고 할 때, 그 생존의 범위는 밥벌이만이 아니다. 노동 현장은 정체성을 포기할 정도로 힘들고 극한 상황에서도 서로 의지가 되고 기댈 수 있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이다.
관계 맺음의 능력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식용작물을 얻는 데 필요 이상의 노동을 하여 잉여를 생산한다. 그 잉여라는 것이 수확물을 필요 이상 생산하는 것도 있지만, 그들의 노동은 많은 부분이 실용적이기보다는 ‘심미적 측면’에 투입된다. 밭을 깨끗하게 하고 산뜻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깔끔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치며 강하고 큰 나무 지지대를 설치하는 등 밭을 보기 좋게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노동을 바친다.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을 하면서 대지 한쪽 귀퉁이의 미적 형태까지 신경 써서 노동의 양을 늘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책을 읽고 있을 당시에는 도무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더 해 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이 인간의 창조적 욕구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트로브리안드인에게 일과 노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들은 일 자체를 위해 일하고 노동에 대한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질문을 따로 하지 않는다. 단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 자체를 잘 해볼지 고민한다. 그들에게 노동이란 바로 자기와 세계를 연결하는 창조적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 자연물의 질을 향상하고 미적 아름다움을 더하는 그 자체 활동에서 인간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
트로브리안드인이 노동을 ‘심미적 측면’에 쏟는 이유는 자기 재능과 취미로 자신이 자연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두에게 확인받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다. 밭 노동으로 다양한 것들과 관계 맺는 능력을 과시하며 우주에 하나뿐인 나의 고유성과 독특함을 내세워 아름다운 조화를 생산할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명성을 얻는다. 위세와 명성은 타인이 나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자신의 창조성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다. 그들은 자기의 고유한 창조적 활동인 노동을 통해 스스로 공동체 속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유능한 자임을 과시한다.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관계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생산된 생산물을 어떻게 누구와 나누고 쓸지 생각하는 상호관계에 노동의 동기가 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협력하지 않고 변화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고, 생명을 돌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노동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자기와 연결된 세계와 함께 자신의 고유성을 조직해나가는 고귀하고 즐거운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을 통해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노동을 통해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갈 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됐다. 인간은 자기 삶을 위한 아이디어와 포부가 가득 차오를 때, 자기 삶의 미적 가치를 창조할 때, 인간이라는 자긍심에 차오르게 되는 것일까? 노동은 고된 것이지만 노동하는 사람의 창조성과 즐거움이 함의된 행위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될 때,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것 같다. 트로브리안드인은 노동을 통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신이 외부와 분리된 존재가 아닌 상호 의존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임을 상기한다. 각자의 능력과 본성에 맞는 이상적인 노동을 통해 밭을 꾸미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참여하며 기쁨을 보상으로 얻는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공동체 속에서 타인을 위한 자기 의무를 다 했다고 믿을 때 자기 효능감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나는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을 보며 인간 노동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 나와 남의 삶을 돌보고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관계를 생산
인간의 삶에 이토록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노동을 왜 현대인들은 싫어하게 됐을까? 어째서 돈이 많아지면,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왜 노동이 더 이상 사회적 관계와 자아실현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어떤 동사의 멸종』 2부 ‘운반하다’에서 택배 노동자가 택배회사의 강도 높은 밤샘 노동이 끝난 후 아침 해를 바라보며 삶의 기쁨과 자신감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 자기 정체성을 해체하는 듯한 극한 피로와 싸워 이긴 아침에 그는 삶의 기대감에 벅차 있었다. 긴 밤을 노동으로 지새우던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기 손으로 자기 먹을 것을 만들고 살아야 하는 인간성의 도전에 성공한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새로운 관계 속에 자리 잡게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택배물류센터 기사들은 자기 신체가 감당할 만큼의 노동이 가능하고, 돈의 힘에 의해 자아가 소외되는 것을 가장 최소화할 수 있는 노동의 장소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택배 기사들이 고된 노동에서도 자유를 느끼는 이유는 자기 신체의 힘만으로 거대한 무질서 형태로 쌓인 택배 상자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스스로 질서의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자긍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노동의 결과가 그들에게 직접적 자기 효능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내가 정신없이 어질러진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고 난 뒤 느끼는 즉각적인 성취감 같은 것이다. 스스로 내가 있는 장소의 질서를 재조정할 힘을 느낀 후의 가벼운 자신감 같은 것 말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택배 기사들에게 그 공간은 인간이 온전히 자기 신체의 힘으로 세상에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아실현의 장소였다. 낮의 그림자처럼 밤에 일하며 낮의 빛으로부터 소외된 것만 같은 장소에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부여할 자기 효능감의 불을 밝혔다. 그것은 바로 트로브리안드인이 밭을 아름답게 꾸미는 재능과 같은 것이었다.
트로브리안드인의 ‘심미적 측면’의 노동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인간의 자연화’를 염두에 둔다. 인간이 공동체적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기가 속한 자연 공동체의 기쁨을 위해 자기 힘을 발휘하는 노동을 즐거워한다. 트로브리안드인은 대지를 밭으로 가꾸고 작물을 키우면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땅과 작물과 대화하며 화합한다.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서로를 공동생산하는지 몸으로 체험한다. 자기 노동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확신하고 창조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감을 얻는다. 이것은 마치 예술가가 자기의 화폭에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 같다. 노동을 통해 자기의 창조성을 마음껏 과시하며 그 결과물과 접속되는 인간은 독특하고 고유한 자기만의 예술을 수행하는 사람과 닮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노동이 있다. 노동이 기쁘지 않고 고통스럽기만 한 노동이다. 노동을 떠올릴 때 고단하고 피하고 싶기만 한 노동은 모든 관계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연을 가공하고,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노동이다. 이런 노동은 자연에 말 걸고, 듣기를 거부하고 상대방과 내가 함께 하기 위해 어떤 리듬이 필요한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노동은 어떤 조화로운 미적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을 하는 인간도 견디기 힘들고, 인간의 힘을 고스란히 받는 자연도 서로가 고스란히 상대의 무자비한 힘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리고 두 작용하는 힘으로 서로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변형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받아들여지며 서로를 재창조하는 기회를 빼앗긴 노동은 고통만 남는다.
노동하는 인간은 완성되어가는 생산물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노동은 신체라는 도구를 이용해 신체와 만나는 사물을 변형하며 자기 신체의 구조와 기능도 변하지만, 인간이 사물과 맺는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노동을 통한 인정으로 활력과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꾸려갈 관계를 활용하는 능력도 얻는다. 그러나 노동에서 어떤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고 노동을 오히려 자기 삶의 관계를 억압하는 불안감으로 경험한 사람은 삶을 절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모든 관계가 단절된 채 자기 효능감을 경험할 수 없는 노동은 삶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싫지만 살아남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노동은 그 자체로 생명을 위협한다. 내가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것인지 보여줄 고유성을 스스로 창조할 기회가 없을 때 나는 그야말로 내 삶에서 소외된다. 인간의 인간성을 만드는 창조성에서 멀어질 때 아무런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나는 노동이 고통스럽게만 느껴진다.
공동체적 인간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현대의 자본에 속한 임금노동자이지만, 자기만의 고유한 이미지로 서로 끊임없이 누군가에 말하고 있었다. 말을 주고받는 삶의 현장에서 인간적 존재인 자기 삶의 질서를 만들고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 했다. 대화하며 함께하는 노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와 연결됐다는 안정감이 그들에게 자부심과 만족감을 주었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은 자기 존재를 자연에, 공동체에 각인하는 인간적 행위였다. 자기 밭을 아름답게 꾸미는 노동으로 자연에 자기 고유의 질서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성으로 공동체에서 자기 자리를 부여받았다. 이들에게 노동은 견뎌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도하고 창조하는 삶의 과정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기회였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 변화를 만드는 주체가 됨으로써 주도적인 자기 삶을 생산하고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수단이었다.
나는 왜 이들의 노동이 그토록 낯설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인간의 노동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고립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동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고립된 개인의 경제활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한승태 작가가 바라본 노동과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노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그들의 노동은 공동체 관계 안에서 함께 생산과 소비를 주고받는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반복되는 자기 노동의 인과에 자기와 세계가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믿고 실현하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들의 노동에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기와 자기 외부를 매개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위의 두 책에서 말하는 노동은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나와 남을 먹이고 살리며 공동체의 질서에 합류한다. 따라서 내가 노동이 삶의 자유를 억압하는 속박이라 생각하고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모습은 공동체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는 현대 사회 인간이 고립되고 불안해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 현대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관계인 노동을 그만두고, 책임 없이 홀로 즐기는 취미 활동을 꿈꾸는 이유도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어떤 관계에 대한 책임을 부담으로 여기고, 혼자 먹고 혼자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공동체와 접속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데 있었다. 인간은 가족, 이웃, 사회, 자연과 같은 공동체 안의 노동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갔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둘러싼 구체적 공동체 세계를 벗어나면 자기 자신을 실천할 기회도, 실천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노동은 공동체 속에서 자기 삶을 실천하며 그와 더불어 자신의 인간성을 만들어갈 기회가 되었다. 내가 노동을 고통과 환멸로 받아들일 때 내가 결여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볼 때 ‘나’는 나와 관계 맺는 것들과 끝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한승태 작가가 말했던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가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콜센터 직원과 택배 기사, 요리사, 청소부들의 노동을 통해 나는 나의 인간형을 바라볼 수 있었다.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의 심미적 측면을 비실용적이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서 내가 어떤 인간성을 가져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한승태 작가가 사라지는 노동을 아쉬워했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면 저자는 사라지는 노동을 통해 우리가 무엇과 단절하고 어떤 것과 연결되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것과 연결되고 싶은 지 나의 노동 형식이 말해준다.
*참고문헌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시대의 창)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최협 옮김,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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