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 세상과의 연결
진진(인문공간 세종)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먹는다. 먹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물을 마셔야 체내에 수분을 공급할 수 있고 음식을 먹어야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다. 이렇게 먹는 일은 내 생명을 유지하고 나를 살게 하기 위한 일이다. 나 또한 먹는 일을 내 입으로, 몸으로 무언가를 넣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먹는다는 행위를 이렇게 생각하며 먹거리를 고르고 음식을 먹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골라 먹었다. 배가 불러 도저히 못 먹겠다 싶으면 음식을 남겼고, 내 몸에 좋은 것만 골라서 먹으려고 했다. 내 안에 들어와 불쾌하고 탈이 나느니, 버리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장바구니 한가득 먹을 것을 사 모으고, 쓰레기통이 넘칠 만큼 음식물을 버리기가 일상이었다. 입을 즐겁게 해주고 배를 채워줄 먹거리들은 냉장고와 찬장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다 내 기억에서 잊혀 유통기간을 넘긴 음식들은 어느 날 쓰레기통에 가득 담겨 버려졌다. 패턴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버려지는 음식들에 불편한 마음이 계속되었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문공간 세종> 기술 인류학 세미나에서 『전쟁과 농업』(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최연희 옮김, 따비)을 읽었다. 책의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먹는다는 행위를 입으로 음식을 넣는 일로만 보지 말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일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보자고 했다. 먹는 일이 싸는 데까지 이어지는 일이라니, 나는 먹는 일에서 맞닥뜨렸던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식사란 나를 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한다. 내가 먹은 음식은 내 몸의 관을 통과해 항문 밖으로 나가고, 항문을 통해 배설된 똥과 오줌은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의 먹거리가 된다. 이때 내 몸은 먹거리가 다른 형태로 자연에 놓이게 하는 관으로서 역할을 한다. 내 몸이 자연 생태계를 위한 관이라니, 먹는 일을 내 몸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나를 위해 먹을 것과 아닌 것을 취사선택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후지하라의 ‘먹는다’의 재정의를 만나고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연의 식탁을 차리는 일
후지하라는 어느 날 산오징어를 먹으며, 과연 그 오징어가 언제 사체가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 경험으로부터 그는 먹는 행위가 단순히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끝나는 일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런 논의를 따라 생각을 이어가 보니, 실제로 내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식도를 통과해 위, 십이지장, 대장의 대사과정을 거쳐 항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이렇게 보면 먹는 일은 내 입안으로 들어가 내 몸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먹는 것들은 내 몸을 통과해 세상으로 다시 나간다. 내 몸의 관을 통해 세상을 여행한다.
지금은 똥차를 보거나 내가 싼 똥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기도 어려워 머릿속에 그려볼 수 없지만, 나의 배설물은 하수관을 통해 정화조 처리를 거쳐 자연으로 흘러들어간다. 자연의 벌레나 미생물들은 내 몸을 통과한 배설물들을 먹고 자란다. 이들이 다시 식물과 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으로, 자연 생태계의 연쇄를 거쳐 생명들은 다시 내 식탁 위에 놓이게 된다. 내가 싼 오줌과 똥이 언젠가 내가 다시 먹을 음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돌고 도는 연결고리의 일부분으로 내 몸의 관들이 자연의 생명들을 연결해 준다. 먹는다는 일은 이렇게 중단이 없이 생명과 생명을, 생태계 전체를 연결해 주며 자연에 먹거리를 제공한다.
내가 먹는 일이 자연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니, 먹거리를 고를 때 내 몸 안에서의 작용만 생각해서는 자연에게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자연의 여러 생명들과 이곳저곳을 잘 연결해 줘야 자연도 골고루 먹을 수 있다. 내 입맛만 생각해서 고기만 골라 먹고, 배가 안 고프니 아침은 굶고, 배부르다고 음식을 남기거나 버리면, 자연도 똑같이 편식하고 굶고 과식하게 된다. 건강을 생각해서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몸에 근육을 키우겠다고 고단백질만 섭취하는 것도 자연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극단적 채식이나 육식 같은 요즈음의 식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우리의 먹는 행위에서는 자연의 생명들이 연결된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먹는 일이 이렇게 단절된 행위가 돼버린 것은 먹거리가 세 가지 특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지하라는 ‘자연성, 비내구성, 정신의존성’을 먹거리의 특징으로 꼽으며, 지금의 먹거리가 이런 특징을 잃고 단순한 ‘물건’이 되었다며 안타까워한다. 이번에는 그의 논의를 따라 먹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생명을 먹는다
먼저 ‘자연성’이란, 먹거리가 자연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죽어서 맛있게 요리되어 내 식탁 위에 놓여 있지만, 내가 먹는 것은 한때 살아 있었던 자연의 동식물이다. 즉 내가 살고 내가 먹기 위해서는 자연의 생명인 돼지와 닭이 도살되어야 하고, 돼지와 닭이 살기 위해서는 목초와 곡식 등을 베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먹는 토양과 물에는 내가 먹고 싼 배설물이 흘러들어가 있다. 자연의 생명은 이렇게 연쇄하며 연결된다. 하지만 지금의 먹거리에는 그것이 한때 생명이었다는 감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 가고 누린내 나는 축산시장에 가야지만 생선을 사고 고기를 살 수 있을 때가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시장엘 가면 내 눈앞에서 고등어의 머리가 두 동강이 나고 정육점에는 도살된 돼지의 몸이 쫙 벌려진 채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자반고등어는 가시까지 손질되고 심지어는 이미 초벌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나온다. 육고기도 마찬가지다. 마트에 가면 고기는 부위별로 잘 손질이 돼 팩에 그램 수별로 담겨 있고, 아이들의 최애 메뉴 치킨은 주문만 하면 조리된 채로 바로 배달이 된다. 이처럼 내가 일상적으로 먹는 것들에는 그것이 ‘생명’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다. 그것이 한때는 나처럼 자연의 한 존재로 살아 숨쉬는 것이었으며, 내 식탁 위에 놓여지기 위해 뽑히고 잡히고 죽여졌다는 것을 나의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먹는다. 그렇기에 먹으면서 나는 배부르다, 맛있다 외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겪지 않는다.
처음 살아 있는 꽃게를 사서 꽃게탕을 끓였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하고 살이 꽉 찬 꽃게를 골라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게를 솔로 문질러 닦고 게딱지를 뒤집고 다리를 자르면서 나는 연신 게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물론 그전에 꽃게탕을 먹고 게장을 먹으며, 그 게가 한때는 바닷속을 유영하던 살아 있는 생명이었음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가서 살아 있는 꽃게를 직접 고르고 내 손으로 그 생을 마감시키는 경험은 내 안에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내가 먹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나는 원래도 게를 좋아하지만 그날은 특히 꽃게살과 국물을 더 열심히 맛있게, 남김없이 먹었다.
농학자 고이즈미의 산골 체험 에세이 『사냥꾼의 고기는 썩지 않는다』(고이즈미 다케오 지음, 박현석 옮김)에서 그의 친구 사냥꾼 욧상은 멧돼지를 사냥할 때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게’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잡은 멧돼지기에 대충 먹고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그는 멧돼지의 가죽, 고기, 내장, 뼈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이용하며, 자신이 잡은 멧돼지들에게 법명까지 지어 올린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 해체하면서도 그것이 자신과 다름없는 생명임을, 그리고 그 무게가 자신과 다르지 않기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썩을 것을 먹는다
‘비내구성’이란, 변질되기 쉬운 성질을 말한다. 즉 먹거리란 부패하기 쉬운 것이다. 음식이 상하는 속도는 그 식재료의 종류와 성질, 날씨 습도와 같은 주변의 상황과 상관성이 높고, 식재료에 따라 보관 방법도 다르다. 예를 들어 날이 덥고 습한 때에는 음식이 쉽게 상하고, 말려서 수분을 날리거나 염장이 된 식재료는 보관이 상대적으로 길다. 우리는 음식이 상하기 전에 먹어야 한다. 그러려면 식재료의 성질을 잘 알고 상태가 어떤지도 잘 살펴야 한다. 발효, 염장과 조림과 같이 식재료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법들을 다방면으로 생각해 보기도 해야 한다. 상하기 쉽다는 먹거리의 특징은 이처럼 먹거리, 식재료를 다른 조건들과 함께 생각해보게 한다.
반면에 지금 우리의 먹거리는 성능 좋은 냉장고와 길어진 식품의 유통기간으로 잘 썩지 않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이 기술 덕분에 나는 음식들이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그 상태로 그 자리에 있어줄 것만 같다. 그러다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조차 나는 잊고 만다. 덕분에 냉장고와 찬장에는 먹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나는 또 새로운 식재료와 먹거리들을 사다 나른다. 덕분에 집에는 항상 식재료와 먹거리들이 쟁여져 있다. 지금 당장 재난이 일어난다 해도 온가족이 냉장고와 찬장을 구석구석 파먹으면 한 달은 족히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적어도 이삼일에 한 번은 장을 보고 외식을 한다. 몇 년째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냉동실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봉지들과 유통기간이 지난 채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각종 가공식품과 조미료들은 언젠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이쯤 되니 냉장고와 방부제 등으로 늘어난 유통기한이 과연 득인가 독인가 싶다. 마치 그것들이 언제고 구입할 때의 상태로 유지될 것처럼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우리 집 식탁 위에는 절대 썩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식품이 있다. 바로 건강기능식품이다. 물론 유통기간이 있지만, 말 그대로 유통기간일 뿐이지 그 기한이 지난다고 해서 그것이 상하거나 부패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영양 섭취나 건강 증진을 위해 이런 건강식품에 많이들 의존한다. 후지하라라면 썩지도 않고 자연의 생명과 연관도 없는 건강식품을 먹거리로 취급해줬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관계를 먹는다
마지막으로 ‘정신의존성’이란 먹거리에는 ‘신앙심이나 가족애 등 다양한 감정이 개입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식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종교나 문화마다 금기시되는 음식이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이라 생각해 금기하고 힌두교도들은 소를 사바신이 타고 다니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여겨 금기한다. 북아메리카 남서부의 주니족과 호피족은 생선이 물의 신성함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 생선 먹기를 거부하고, 반대로 남부 이집트의 쿠시족은 생선을 경멸해서 먹지 않는다. 실제로 그 동물을 먹는다고 해서 재앙이 생기느냐, 그런 비이성적인 이유로 먹고 안 먹고를 결정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의 식문화에는 이런 금기들이 거의 사라졌다.
금기뿐만 아니라 특정한 날에 먹는 음식도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는 정월대보름에 오곡밥과 묶은 나물을 먹고 부럼을 깬다. 그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곡밥을 먹고 묶은 나물을 먹으면 더위를 피해갈 거라, 부럼을 깨면 일 년간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지금은 이런 전통들이 실제로 인과가 있는지만을 따져 거의 사라지고 있다. 전통적 문화에서 인간이 먹는 음식은 신과 주변의 자연, 다른 사건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내가 먹는 것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가 식사에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식문화에서 음식은 단지 내 몸에 들어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묶은 나물을 먹는 이유는 겨우내 말려지는 과정에서 비타민 함량이 높아져서 영양에 좋다는 식으로 해석될 뿐이다.
인문세에서 기술인류학을 함께 공부하는 김유리 선생님께서 봄에는 직접 농사지으신 보리를, 가을에는 쌀을 보내주셨다. 얼마 전 오선민 선생님의 북토크에는 김동운 선생님께서 직접 농사지어 첫 수확하신 곶감과 사과를 보내주셨다. 김유리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보리와 쌀, 김동운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곶감을 먹으며 이전과는 달리 그것이 내게 오기까지의 과정들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마트에 가면 언제나 살 수 있는 보리와 쌀, 명절에만 내 눈에 띄는 곶감이 모두 수확되는 데도 때가 있다는 것을, 이들이 어떻게 자라 내 식탁 위에 놓여졌을지를 그려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 나와 함께 공부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려지고, 그들의 노고와 그 수확을 나눠준 데에 대한 감사함이 더해졌다.
상품과 생명의 위계
후지하라는 먹거리가 상품이 돼버린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 먹거리란 한때 자연의 생명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먹거리를 만날 때 먹거리는 생명이라는 감각을 찾아보기 힘들다. 돼지는 잘 손질되어 삼겹살, 목살, 항정살, 등갈비와 같은 식으로 진열대 위에 놓이고, 닭은 후라이드, 양념통닭, 전기구이와 같이 완조리된 상태로 식탁 위에 올려진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감각이 모두 제거되어 상품으로 둔갑된 먹거리를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 인류학에서 함께 읽었던 또 다른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E. F. 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에서 저자는 우주의 존재들에는 위계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수준이 다른 존재들의 위계 안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위치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자신의 자리에 의해 인간은 더 고귀해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상품인 삼겹살과 돼지는 존재의 수준에서 같은 위계에 있을 수 없다. 인간 또한 생명인 만큼 상품과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고, 동물인 돼지보다도 더 상위에 있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달리 고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위계의 동물과 상품을 어떤 수준에서 대하고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돼지와 삼겹살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먹는다는 행위가 나에 국한된 일이 아님을, 내가 먹는 것이 나를 통과해 자연으로 나가서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을 연결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먹을 때 나는 좀 더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순환하고, 생명과 부패는 선순환 과정이다. 우리 몸은 이 과정의 시작과 끝을 모두 통과시키는 연결된 관이다. 그런데 우리는 먹기만 하고 싸는 것은 더럽다고 돌아보지 않는다.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 들어갔으면 나오는 것, 태어났으면 죽는 것은 하나다.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순환 과정에서 위치가 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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