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간의 뇌-근육통, 하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8주의 ‘철학PT’
정사랑
원래 북드라망은 제가 좋아하던 출판사입니다. 제가 즐겨 읽는 책들을 많이 출간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책들은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거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들을 일상과 접목시켜 친숙하게 느끼게 해주는 책들입니다. 대개 북드라망 책들은 이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평소에 북드라망 출판사의 신간 소식을 sns를 통해 듣고 있었죠. 그러다가 ‘철학PT’에 대한 안내문을 보게 됩니다. 긴 책을 읽기 힘들어하는, 도파민 중독자인 저에게 갱생 프로그램으로 딱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과연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죠. 도파민 중독자답게 이런 것 끝까지 못하거든요. 그러나 대개 제 인생에 중요한 일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했다는 제 인생의 축적된 데이터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의심과 망설임을 뒤로 하고 신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철학PT(철학사고 훈련)’이었습니다.
PT(퍼스널 트레이닝)이라는 말은 신체의 근력을 키우는 데에만 쓰이는 줄 알았는데 이 단어를 철학과 사고로 연결지은 것이 신선했습니다. 책을 읽고 있지만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고, 좀 어렵다 싶은 글은 끝까지 읽기 힘들었어요. 어떻게 꾸역꾸역 글을 읽고 나면 그 글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남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내 생각이라 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읽기, 사유, 판단을 남에게 떠맡긴 것이죠. 저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외주 준 것이라 여겼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에 예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주차부터 마지막 8주차까지 관통한 주제, 이 수업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강연자인 정승연 선생님은 이 수업을 통해 참가자들이 ‘공부하는 몸’,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죠. 여기서 말하는 공부란 자신의 삶을 변형하는 것이고, 그러한 변형은 여러 텍스트를 읽고, 데이터를 쌓아서 거기서 우발적인 것들을 최대한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읽기와 질문 만들기가 필요하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과제는 정해진 텍스트를 읽고, 질문이나 책 읽은 후의 단상을 간단히 메모하여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텍스트에 집중하고, 그 의미를 새기고 잘 모르겠는 것, 알고 싶은 것을 찾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것과 연결하여 의문을 품어 질문을 만들어 보라고 하셨는데요, 이제까지는 주어진 문제에 정해진 답을 찾던 내가 질문을 해야 된다는 것이 막막했습니다. 질문의 주체가 된 것이 무척 어색했거든요.
그런데 그 막막함과 어색함을 뒤로 하고 억지로라도 의문을 품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내가 지금껏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고, 써 보지 않았던 언어들을 쓰게 하더라고요. 이런 익숙하지 않은 감각들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운동을 안했던 사람이 운동을 하게 되면 근육통이 나듯, 이번 8주의 ‘철학PT’ 동안 사고하는 법을 배우면서 뇌의 근육통을 처절하게 앓았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뇌의 근육통이 자괴감으로 오더군요. 이해 안 되는 책을 꾸역꾸역 읽으면서 질문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가, 다른 흥밋거리로 도망치는 나를 발견했을 때 오는 현타, 이 나이를 먹고도 이 따위 질문밖에 만들지 못하나라는 그런 생각들이요. 끙끙 앓는 근육통으로 고생하며 운동을 포기할까 고민하는 이의 심정이 이런 것이려나 싶었습니다. 정승연 선생님이 공부와 헬스가 비슷하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생각할 때 ‘하나 더’를 외치듯 진짜 이거 아무리 읽어도 이해 못하겠다 싶을 때 ‘반복’해서 읽어 보는 것.(그러나 헬스할 때 마지막 한 번은 간신히 해내듯 철학책 역시도 간신히 읽는 것...)
이 8주 수업 동안 저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이 세상을 해석하려 했던 여러 철학자들, 세계 1,2차 대전이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적 상황을 대하고 왜 이런 문제가 생겼나를 분석하고, 반성했던 철학자를 만났지만 이런 철학자들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애를 걸고 저술하거나 고민했던 그들의 사상을 제가 8주의 수업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죠.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공명할 수는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지혜’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모름, 어떤 자의식도 들어가 있지 않은 ‘투명한 모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저의 모름은 자의식이 있는 모름이거든요. 무언가에 대해 회피하고 싶을 때 모른다고 하고, 또 어떤 지식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창피해서 괜히 아는 척하는 것. 저의 공부에 큰 방해물이 되는 것이 이 자의식입니다. 의식을 내려놓고 읽고 써야 한다는 것, 읽고 쓰는 것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고 그냥 읽고 쓰기. 이런 삶은 얼마나 홀가분할까. 이런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천은 잘 안 될 것이라는 걸 알아요. 제가 절 잘 알거든요. 도파민 중독자가 갱생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바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늘 같은 감각을 경험해서 거기에 익숙하니까요. 그러나 계속 반복해보려 합니다. 안 해본 것을 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실천이 매끄럽지 않고 자꾸 넘어질 것인데요. 그 좌절을 계속 경험해 보려고 합니다. 이게 이 8주 철학 훈련을 하고난 후의 진정한 결심이 되겠네요.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읽고, 질문하고, 쓰기의 좌절을 반복해보겠다.’ 이 후기를 쓰는 과정도 처절한 좌절의 과정이었답니다. 생존을 위한 노동과 그래도 이제까지 안 해 본 읽기와 쓰기의 병행.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둘 사이의 줄타기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6주차 <소크라테스의 변론> 수업에서는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하이데거로 이어졌지요. 이게 ‘철학PT’의 묘미였고 제가 알게 된 철학의 새로운 면이기도 했습니다. 고대철학을 고대에 국한된 철학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고대 철학의 사유 방식이 현대철학과도 연결되더라고요.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는 연결을 경험하는 것이 이 수업의 큰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시간>에서 다스만(das man, 세인(世人))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인은 운명에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비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익명의 타인들입니다. 그러한 세인이 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현존재(現存在)’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해야 한다고 합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 스스로만이 오롯이 경험할 수 있는 나의 고유함입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과거의 비본래적 삶을 반성하고,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나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정승연 선생님께서는 또 마지막 수업에서 내 삶의 변화를 바란다면 삶의 상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셨죠. 삶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즉 탈영토화를 하려면 우리의 사고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언어의 상투성을 의식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동화된 감각, 언어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써온 표현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고요. 많은 단어를 알고 정확한 문장을 쓰도록 연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것도 읽기와 생각으로 귀결되는 사항이네요.
‘읽고 쓰기를 통해 삶의 상투성에 벗어나 나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은 제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철학PT’가 끝난 지금 저에게는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볼 생각입니다. 먼저 저를 관찰해보고 좌절에 대한 내성을 길러야겠어요. 어려움과 실패를 반복하려면 진지한 태도보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고, 계속되는 도전을 버틸 신체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언어의 상투성에서 벗어나 결코 상투적이지 않은 특별함을 담고 싶은데 아무래도 상투적일 것 같은 끝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8주 동안 재미있게 강연을 이끌어주신 정승연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고 유쾌한 수업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철학을 다른 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미 있는 질문과 생각 나눔으로 수업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신, 같이 공부했던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8주의 ‘철학PT’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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