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가 좋다

[불교가 좋다] 지금 나를 그대로, 그럴 수 있다고 보는 훈련

by 북드라망 2024. 11. 22.

지금 나를 그대로, 그럴 수 있다고 보는 훈련


질문자1: 저는 아버지를 많이 미워하고 어머니한테는 되게 많이 미안해하는 게 있어요. 이번에 화성에서 니체를 공부하고 있는데, 원한과 양심의 가책이 같은 심리적 매커니즘에서 나온 거라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정화스님: 앞서 말한 대로 미워하고 내가 고마워하고 하는 두 가지 맥락이 어떤가를 떠나서, 그것 자체에서 지금 나한테 어떻게 당장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예를 들어 아버지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미워하는 감정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내가 쌓으려고 해서 쌓은 것도 아니고, 미워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30년 살다 보면 언제 그렇게 되어있는 거예요. 같은 상황인데 그 상황을 아버지를 안 미워하는 딸도 있을 수 있고, 같은 상황인데 미워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어요.

제가 생물학책을 읽으면서 자주 말하는 게 뭐냐면,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서 ‘넌 나처럼 살지 마,’ 라고 하는 유전자의 변이를 만들어줘요. 절대적으로 같은 생각과 같은 방법으로 살 수가 없어요. 더 나아가서 형제들끼리도 다 달리 살아요. 생각 자체가 다르게 되어있어요. 같은 상황인데 나는 아버지가 좋아 보일 수 있고, 같은 상황인데 나는 아버지가 싫을 수가 있어요. 이 두 감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고, 싫어하는 것은 나쁜 판단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여러 가지 집안이나 사회적 관계 때문에 자기한테 억압을 하고 페르소나처럼 조율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이것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25살 때까지는 그것이 주로 중심이 되어서 자기가 부모나 가족을 보는 생각의 루트가 만들어져요. 사람한테는 가장 큰 특징이 자기 생각을 지금처럼 반조해서 볼 수 있는 기능이 생겼어요. 유전적으로 진화과정에서. 다른 동물도 그걸 보는 데 그 기운이 약해요. 사람은 그게 엄청 커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본인 생각의 루트가 만들어지는데, 25살 넘어서는 그 생각의 지도를 반조해보는 기능을 확대시켜서 불필요하게 자기를 괴롭게 하지 않는 생각의 능력을 길러가는 거예요. 그럴 때 중요한 게, 몇 번 말했지만 지금 있는 상황에 대해서 ‘너는 왜 그래?’라고 말하면 안 돼요. 그것은 똑같은 투명한 마음이 하는 말이 아니고 만들어진 생각의 루트들이 하는 거예요. 생각의 길들이. 그래서 ‘아, 나는 아버지를 좀 안 좋아하고 있구나’ 나한테는 정답이에요. 아버지를 안 좋아하는데 좀 힘들어, ‘아 그래서 힘들어하고 있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자꾸 그렇게 하면서 이제 “아 그래, 그래, 그래,” 하다 보면 “그래”라고 자기를 이해해 주는 이 이해력이 무의식층에 계속 심어지는 거예요. “안 돼”라고 말하면 “안 돼”라는 것이 무의식층에 심어져요. “아버지가 나빠”라고 말하면 “아버지가 나빠”라고 하는 것이 심어져요. “아, 그렇구나”라고 하면 “아, 그렇구나”라는 게 심어져요. 즉, 자기가 자기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힘이 심어지는 거예요. 미워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되는, 딸이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아, 그렇게 될 수 있구나”라고 하면 그 힘이 심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다시 또 어느 날 갑자기 별로 그렇게 미운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안에서 생각의 길이 바뀌는 순간이에요. 바로 이것은 불을 켜는데, 예를 들면 100이 올라야 불이 켜지잖아요. 99까지는 불이 안 켜져요. 내가 99까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계속 안 켜져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계속 하다보면 어느 순간 99에서 100이 딱 될 때만 생각이 바뀌어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이 노력은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도 아니고, 나를 어떻게 해서가 아니고, 지금 있는 나를 그대로 그럴 수 있다고 보는 훈련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훈련이면서 그 훈련이 되면 묘하게도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도 줄어들게 돼요. 그래서 아까 어떤 보살님한테 하는 말과 똑같아요. 무슨 생각이 일어나서 마음이 혼란하면 가만히 앉아서 그 혼란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어떻게 머물렀다 가는지, 앉아서 그것만 보는 거예요. 이것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다른 생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안에서 막 일어나버려요. 예를 들면 내 신체가 편안하고 뭔가 안에서 조건이 좋으면 그런 생각이 잘 안 일어나요. 그런데 힘들고 불편하면 안에서 힘들고 불편한 것의 이미지를, 갑자기 아버지를 떠올려서 미워하는 감정으로 내부 심상을 만들어 줘버리면 그것이 떠올라요. 그때는 이미 몸이 막 그런 어떤 불편한 감정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해요. 그럴 때는 편히 쉬면서 불편한 감정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도록 보고 있는 것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거기까지만 하면 돼요. 그것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에요. 네 그래요.

 


질문자2: 자살이 나쁘다고 하는데 왜 나쁜 건가요? 사람이 태어나는 건 선택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몸이 안 좋아지거나 상태가 나빠졌을 때 죽음을 제가 선택할 수 있을지…

정화스님: 지금은 우리가 말하는 그런 ‘자살’에 대한 선진국의 몇 나라들은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놨어요. 이 조건에 맞는 사람은 의료적 자살을 선택하도록 했어요. 바꿔 말하면 다른 자살이 아니고 신체적으로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닌(이건 사회적 정의니까. 이 정의는 맞는 건 아니에요. 정한 거예요. 사회적으로) 이 사람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지금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가치를 높인다’라고 판단된 순간 죽도록 합시다.”라고 하는 선택지가 지금 지구상에서는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한 몇십 년 뒤에 우리나라도 선택적으로 의료적 자살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아까 말한 자살의 의미가 상당히 바뀔 것이에요.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런 식의 자살은 거의 드물고 다른 것을 통해서 자기를 죽여요. 그런데 이 죽음 행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다르게 놓고 보는, 즉 내가 죽을 만한 이유를 만들어놨는데 그 이유의 설정이 왜곡돼있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잘못된 이유를 죽음의 정당한 이유로 만들어놓고 죽어요. 그런 자살은 좋다고 말할 수가 없죠.

질문자2: 아니 ‘죽음을 자기가 선택했을 경우’에 종교에서 말하는 죽고 난 다음의 생에 대해서요.

정화스님: 불교에서는 오역죄라고 자살하는 것도 오역죄에 들어가요. 원효스님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참회되지 않는 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어요. 오역죄라고 해서 가장 안 좋은 죄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살도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조차도 참회되지 않는 이유는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어버린 사람은 현재 우리 같은 참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살아있으면서 오역죄란 죄를 지은 사람도, 사회 통념상으로 보면 힘들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다른 내적 변화가 일어나면 참회가 일어난다고 원효스님은 보고 있어요. 그래서 완벽하게 전환되지 않는 사건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거기서도 자살은 가장 안 좋은 선택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 이유가 대부분 이러이러해서 죽은 사람인데, 이러이러한 게 그 사람한테는 죽을 이유가 되지만, 삶의 가치에 비해서 그 이유가 현저히 낮은 거예요. 생물의 생존, 생명 활동 자체에 비해서 그 이유가 좀 비굴해요. 그래서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없는 판단에다가 등급을 해놓고 자기 삶을 마감하는 거니까 좋게 보질 않죠. 그 사람한테는 ‘거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약 40억 년을 살아온 생명의 생존과 번식이라고 하는 것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현상 전체의 기한보다는 이런 것을 자기 스스로 부정할 만큼 더 귀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살을 안 좋게 보는 거죠. 그런데 자살에 버금가는 죄가 한 네 가지가 더 있어요. 그런데 원효스님은 그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절대 참회가 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여하튼 거기까지입니다.

 


질문자3: 어떤 마음으로 친구를 도와야 할까요?


제 주변 친구들이 요새 우울증이 많이 심각한 수준에 있어서요. 제가 친구들한테도 되게 무관심한데, 친구들을 좀 챙겨야겠다고 해서 마음을 좀 냈는데 결과적으로는 마음을 썼다는 게 친구들한테 여기서 공부한 걸 이렇게 들이밀면서 공부하자고 얘기하는 거였어요. ‘세상 이렇게 계속 살 거야? 공부해야지!’ 꼰대짓을 한 거예요. 화를 내고. 그리고 자책을 엄청 많이 했어요. 그게 한두 명이 아니었거든요. ‘내가 꼰대짓을 하고 있구나’ 알았는데도 얼마 전에 또 그랬더라구요. 친구가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를 했어요.

원래 무관심했는데, 밸런스를 못 맞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원래 무관심하니까 사람한테 뭔가를 예쁘게 부드럽게 얘기를 해주는 것과 이 사이에 중간을 못 맞춘다는. 뭔가를 하려고 발심을 했는데 의외로 역효과가 나니까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도와야 하는지’ 제가 묻고 싶지만 이게 돕는다고 되는 문젠가 싶어요.

 



정화스님: 제가 송광사 선원에 살 때, 70년대쯤이었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그다음에 일본에서는 국제선원이라는 데서 또 살았어요. 거기서 보면 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았어요. 거기서 (누군가를) 도와주잖아요. 우리나라는 어른이나 먼저 아는 사람이 답을 제시해주면 따르려고 하는 경향이 많아요. 같이 모이면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이 ‘너는 이것 하고, 너는 이것 하고’ 일일이 지정을 해요.

그런데 얘들(외국인들)은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다섯 가지 있는데 이 중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어봐요. 다섯 가지 일을 똑같이 해요. 근데 우리는 정해요. 엄마가 아빠가 상사가 정해요. 근데 그 사람들은 ‘이런 일을 우리가 해야 하는데, 알았어, 내가 밥하겠어요. 나는 청소하겠습니다.’ 아무도 기분이 안 나빠요.

공부하는 게 좋긴 하죠. 그런데 선택을 그 사람이 하는 게 아니었잖아요. ‘내가 봤을 때 이런 일이 있다’가 아니고. 내가 이런 일을 선택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항상 누군가가 나한테 일을 시켜서 수동적으로, 그 일이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으로 해야 할 처지에서 너무나 많이 하니까 그냥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불편해져 버린 거예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되잖아요. 그럼 또 그렇게 하고. 보살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는 반장 부반장을 다 시켜요. 우리는 그냥 청소하고 뭐하고 다 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런 거 자체에 굉장히 거부감을 느껴요. 왜 내 일을 네가 시키냐는 거에요. 공동체도 반장 부반장이면 일을 시키는 게 아니고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할 거냐’라고 제시하는 사람이지 나한테 청소하라고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반장이 되면 청소를 시키는 사람이 돼요.

우리가 점점 사람하고 관계 맺기가 어려워지는 이유 중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가 할 것입니다’라는 시대로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꼰대라는 사람들이 자꾸 반장 노릇을 하려고 하니까 잘 안 되는 것이죠. 이게 나쁜 게 아니고 거기도 알게 모르게 일의 방향성을 그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배워서 익혀왔던 거예요. 나는 싫었으니까 안 해야 하는데 남들한테 그렇게 하고 있는 거지요. 싫으면서 닮아간다고 그러잖아요. 미워하면서 닮아간다는 이유는 그냥 그런 사람들과 생활의 폭이 넓어졌다는 거죠. 한국 사람들은 내 말 안 들으면 기분 나빠해요. 말도 안 되는 것이지요. 방향을 듣다 보면,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가 아니고 본인이 정해와서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사회적으로 문제 되는 갑을관계가 나타나는 거죠.

질문자3: 선택의 여지를 줘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정화스님: 그렇죠. 여지를 줘야 한다는 게 당연하죠. 그러니까 반장의 역할이 바뀌었다니까요. 옛날에는 정해주는 역할이었는데 지금은 조원이 모여서 정하는 역할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장은 ‘이런 일이 있습니다’라는 통지를 해주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기분이 안 좋죠.

그런데 보살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들도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나이 많은 사람들 막상 사실 다 그렇게 하고 있을 거예요. 거기처럼 ‘야, 이거니 저거니’ 그러고 말 안 들으면 기분 나빠하고, ‘왜 어른 말 안 들어’ 막 이러고 있을 판인 거지요. 제가 뭐 주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직책도 없으니까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을 뿐이니까 안 그런 척 보이지, 막상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것이 훨씬 익숙한 업이에요. 거기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히 익숙하다니까요. 엄마 아빠가 나한테 그렇게 선택지를 여러 개 주고 ‘네가 선택하세요’라고 말한 적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관계를 설정할 때는 다른 사람이 그 관계에 끼었을 때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야 해요. 월급도 안 주면서 시키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월급 주고 시켜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 그래서 요즘 좋은 직장으로 갔다는 사람들이 3년 안에 3분에 1은 퇴사해요. 보나 마나 그런 꼰대들 여럿이 있을 거예요.

저는 외국에 나이 들어서 갔지만, 덜 어렸을 때 온 사람들도 이러더라니까요. 이렇게 하면 기분 안 좋아한다고. 어차피 청소해야 하거든. 본인이 청소를 선택하느냐 내가 청소를 하라고 했느냐 이 차이가 굉장히 기분이 안 좋더라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니까요.

그래서 관계를 끊는 것은 주변에서 일방적으로 나한테 뭘 하라는 사람이 많았을 거예요. ‘별로 존경도 받지 못하고, 내가 이용당하고 있나?’라는 느낌이 무의식적으로 생겨서 관계 맺기가 굉장히 어렵죠. 거기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좀 그런 게 있어요. 지금의 20대부터는 밀레니엄이니 Z세대라느니 이상한 이름 붙은 사람들은 그런 거 받아들이지 않죠. 그러니 20대가 갑자기 임계점을 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죽고 지금 20대가 어른이 되고 손자들이 살 때 보면 이것이 한국인가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 날이 있을 거예요. 그래요.

 

 

정리_ 감이당 화요대중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