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물 들이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
참, 이상하다. 예전에는 여름이면 동네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봉숭아꽃이 딸아이 손톱을 물들여 주려고 마음먹은 2년 전부터 도통 잘 보이지가 않는다. 찾다 못해 재작년에는 인터넷으로 씨앗부터 부랴부랴 구입해서 꽃 피우기를 기다렸고 앙상한 줄기에 달린 가는 이파리와 꽃 한 송이로 완두콩만 한 아이 손톱을 겨우 몇 개 물들일 수 있었다. 작년에는 다행하게도 이런 사정을 아는 후배가 우연히 서울 근교의 식당에 갔다가 봉숭아꽃을 발견하고 따다 줘서 비교적 수월하게 들일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 된 올해는, 방학 때 하고 싶은 일에 ‘봉숭아 물 들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기’를 체크했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속으로 ‘헉’ 하며 그날부터 봉숭아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역시 내가 다니는 길에는 집 근처든 사무실 근처든 발견하기 어려웠다. 몇몇 사람에게 눈에 띄면 좀 보내 달라 부탁도 했지만 며칠간 별 소식이 없던 차, 집단의 힘을 빌릴 곳이 떠올랐다.
공동체 단톡방에 속한 아빠가 있지 않나. 봉숭아꽃을 구하는 사연을 올리자마자 봉숭아꽃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가져다주겠다는 소식이 바로 올라왔는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한마디. “아이가 봉숭아 물 들이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군요.”^^ 하루 만에 엄청난 양의 봉숭아꽃과 잎을 한 선생님께 받았고, 공동체의 마음이 모인 봉숭아 물을 들일 수 있었다.
봉숭아 물 든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일부러 해주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듣고 남아 있길 바라는 딸에게 농반진반 “그러면 큰일 나”라고 했지만,^^ 이번에 물들인 손톱은 오래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다. 마을이 함께 물들인 손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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