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을 만나다 : 믿지 말고 공부할 것
경아 쌤을 처음 만난 건 감이당의 살림 멤버들을 인터뷰하면서였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라는 가톨릭교의 수도사를 공부하고 계신다고 했다. 시간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듣다가 끊었더니 갈증이 났다. 분명 저기에 커다랗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물장구를 쳐보기는 커녕 발가락만 담근 기분이었다.
나는 토마스 머튼이 쓴 베스트셀러 『칠층산』이나 '20세기 가톨릭의 영적 스승'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몰랐다. 그럼에도 묘하게 끌렸던 건 토마스 머튼이 생전에 방대한 양의 책을 집필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평생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경아 쌤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경아 쌤도 토마스 머튼의 존재를 잘 몰랐다고 했다. 회사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열심히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감이당에 들어오게 된 것처럼,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니체 등의 철학자를 읽다가 어느날 갑자기 토마스 머튼이 그의 삶에 들어왔다.
지인 분이 한국을 떠나며 책을 넘겨줬는데, 거기에 토마스 머튼의 책이 있었다. 지하철로 감이당을 오갈 때 읽으며 그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을 때 고미숙 선생님에게서 그를 스승으로 삼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주가 경아 쌤에게 토마스 머튼을 데려다 준 셈이다.
1. 믿지 말고 공부할 것
토마스 머튼은 어떤 삶을 살았나요?
이분은 삶이 참 버라이어티해요. 54년을 사셨는데 그중 딱 절반은 수도원 밖에서, 절반은 수도원에서 사셨어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어요. 술도 자주 먹고 사생아도 얻고요. 친구들도 다 먹고 노는 이들이었죠. 그러다가 대부가 참다 못해서 영국을 떠나라고 해서 외갓집이 있는 미국으로 가요.
그런데 특이한 게, 영국에서 방황하면서도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고등학생 때 간디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죠. 그런데 자기한테 맞는 도시, 나라가 있잖아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이 격식을 갖춘 편이라면, 미국 컬럼비아 대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어요. 여기서 지적으로 폭발을 해요. 책을 엄청나게 읽죠.
엄청나게 지적인 분이셨군요! 미국에서 영적인 영향은 안 받으셨나요?
미국에 가서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적이고 글을 쓰는 친구들을 만나요. 대학 표어가 또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다(In lumine Tuo videbimus lumen)'였죠.
일찍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화가이자 성공회 신자였는데 영적인 분이셨어요. 그림을 그리시다가도 영적인 게 생각나면 머튼에게 이야기를 해줬대요. 제도 종교가 아니라 종교성을 심어준 거죠. [그래서인지] 머튼은 신비 체험을 많이 해요. 가령 고등학생 때 로마로 여행을 갔을 때 한 성당에서 그리스도 벽화를 보는데, 거기에 있는 빛이 자기에게 오는 느낌을 받은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순례자에 대한 열정이 생기죠.
그래도 세례를 받지는 않았는데요. 미국에서 친구 소개로 만난 힌두교 수도승에게서 너의 전통 안에서 빛을 찾으라는 조언을 들어요. 가톨릭 안에도 좋은 책이 많다면서 추천을 해줬는데, 거기서 머튼이 충격을 받고 가톨릭 책을 다 찾아 읽어요. 가톨릭의 타락한 모습 때문에 실망해서 동양 신비주의에 빠져있을 때였거든요.
지금도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거세잖아요. 아예 욕과 결합한 단어도 있고요.
그래서 감이당 토마스 머튼 세미나에도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면서 답답했던 사람들이 많이 와요. 그런데 머튼은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게 아니라 책으로 먼저 만났어요. 그러면서 하느님을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능력'이라고 새롭게 보게 돼요.
보통 하느님에 대해 의심하거나 질문하지 않잖아요. 머튼은 우리에게 믿지 말고 이해하고 깨치고 질문하라고 하거든요. 공부하고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꾸라고요. 신을 보는 관점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더라고요. 신이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라고 봤을 때는 저도 아래로 사람들을 내려다봤어요. 그런데 신이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보니까 나하고 저 사람이 다르지 않구나, 우리가 연결되어 있구나 싶어요.
저도 그랬고 기독교인들이 공부를 너무 안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선악 이분법으로만 살게 되죠. 대학을 가고 공부를 하면서 지식은 늘렸는데 영적인 성장은 못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세미나에는 진짜 영적인 길을 가고 싶은 분들이 남아 있어요.
세미나를 통해서 영적인 길을 간다는 건 어떤 거예요?
그동안 성당에 갔다가 나오면 탐욕적으로 되고, 신앙을 일상으로 옮겨 올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 시각이 많이 바뀌더라고요. 세미나에서는 어떻게 일상 속 생각을 바꿔볼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2. 움켜쥐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충만함
토마스 머튼은 어떻게 수도회 생활을 하게 됐나요?
처음에는 예전 사생활 때문에 수도회에서 거부를 당해요. 그래도 수도자처럼 살겠다, 자발적 가난과 글쓰기를 하겠다, 하면서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쳐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수도자처럼 살고 있는데도 머튼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서 할렘에 가요. 거기서 그동안 안락하게 살았구나, 희생한 게 없었구나 하죠. 그쯤 침묵 수도원인 겟세마네에 피정을 갔는데, 하느님을 향한 삶에 대한 열망이 커진 거예요. 겟세마네에서 받아줘서 수도원 생활이 시작되죠.
수도사라고 하면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을 것만 같은데, 토마스 머튼 책 중에 <<머튼의 평화론(원제: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머튼이 전쟁과 관련이 깊어요.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1차 세계대전이 터진 지 1년이 됐을 무렵이죠. 자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도 있었어요. 머튼이 수도원에 들어갈 결심을 한 게 세계 2차 대전 때예요. 후에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동생이 죽기도 했고요.
그동안 머튼이 성공을 위해 달려도 봤고 세례도 받았고 교리도 공부를 했지만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충격을 받고 실존적으로 위기를 느껴요. 이 전쟁의 원인이 히틀러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통찰을 해요.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 히틀러만이 이 전쟁을 일으킨 유일한 인물이 아니다. 나도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칠층산>> 515쪽)
어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진짜 감동이죠. 솔직히 우리 우크라이나 전쟁에 내가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생각 안 해보잖아요. 근데 사실 다들 자기 거 안 뺏기고 더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판이니까, 전쟁이 안 일어날 수가 없는 건데요. 그래서 이때부터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꿔요. 소유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거죠.
"사람들처럼 전쟁에 대해 아는 체하지 않고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이 순간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토마스 머튼의 시간>> 60쪽)
저도 예전에는 많은 걸 가졌는데 움켜쥐고 있으니까 오히려 허무했어요. 사람 만나기도 싫었고요. 지금은 나라고 할 것 없이, 태도를 바꾸게 되니까 보람 있어요. 계속 비우고 깨지면서 충만함을 느낄 수밖에 없구나 싶어요. 삶이 허무할 틈이 없죠.
당시 카톨릭은 전쟁에 어떤 입장이었나요?
카톨릭은 전쟁을 승인했어요. 머튼이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죠. 근데 머튼은 하느님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고 하면서 평화 운동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도 해줬고, 작가들에게 편지도 써줬어요.
사실 머튼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10년 동안은 하느님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사람들이 나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정의 사도가 되겠다고 하면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게 적극적으로 개입한 거거든요.
우리가 성당에서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는데, 보통은 내 일상은 안 깨지면서 평화롭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이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바탕이 되어 있어요. 안일함을 평화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게 엄청나게 와닿더라고요.
3. 좌절은 하겠지만
한국에 다 번역되진 않았지만, 토마스 머튼이 다작을 했다면서요.
처음 수도원에 들어가서 27년간 거의 70편의 글을 썼어요. 이분이 좋은 게 뭐냐면요, 너무 솔직해요. 글도 워낙 잘 쓰시니까 우리 안에 있는 모순을 다 파헤쳐요.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싶을 정도로요.
보면 에너지를 많이 쓰시는데 먹는 것도 시원치 않으니까 맨날 감기에 걸리시더라고요. 그러다 허리 수술을 받으러 시내 병원에 갔는데 26살 연하의 간호사랑 사랑에 빠져요.
사실 신의 현존을 느끼며 자신을 다 비워내는 게 고독한 삶이잖아요. 너무 고민하는 거죠. 수도원 안에서 수련장도 맡으셨고 스승 위치에 있는데, 사랑을 숨길 수도 없어요. 15살 때부터 돌아가신 날까지 일기를 쓰셨는데 거기에 사랑 얘기도 구구절절해요.
일기는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글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요. 토마스 머튼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는 걸까요?
이분은 공과 사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지성과 윤리가 같이 가는 거죠. 에고가 환상이라고 말하니까, 내가 느끼는 것들을 다 드러낼 수 있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까지 솔직하지 못하지만, 열정적이라는 점은 비슷해요. 감이당에 와보니 사람들이 저보고 굉장히 열정적이라고 그러더라고요. 토마스 머튼을 보면서 이 사람도 이렇게 열정적인데 너무 많은 좌절을 하고 심지어 사랑에도 빠지잖아요. 그럼에도 그냥 간다는 거, 살아낸다는 걸 배워요. 머튼의 삶이 일사천리였다면 존경 안 했을 거예요.
머튼처럼 좌절하면서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거, 하느님에게서 얻은 것을 세상과 나누는 거는 따라가 볼 만하겠다 싶어요. 수준은 다르겠지만 저는 머튼이 수도원에 있는 거랑 제가 감이당에 있는 거랑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남들이 내 삶에 개입을 해주고, 덕분에 내가 하나 또 알게 되고, 그걸 글로 쓰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잖아요. 근데 평탄하지 않고 엄청난 부침을 겪어요. 그럴 때 머튼에게서 배워요. 공부한 걸 세상에 나누겠다고, 그 과정에서 좌절을 하겠지만 포기는 안 하겠다고요.
연애 사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렇게 6개월 만나시다가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헤어져요. 그러고는 이 외로움을 종교 간의 교류와 화합에 헌신하겠다고 하죠.
6개월 만에 일대일 사랑에서 종교 화합으로 갔군요! 그런데 종교 간에 차이가 있지 않나요?
머튼은 교리가 아니라 영적인 면으로 접근해요. 예수 이전에 동양의 현자들에게 복음이 먼저 있었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하죠. 근데 서양이 그걸 무시하면서 자연에 대한 지혜를 놓쳤다고, 동양의 현자들에게서 그걸 배워야 한다고 해요. 굉장히 파격적이죠.
처음 읽을 때 이건 뭐지? 왜 이렇게 동양적이지? 그랬어요. 가톨릭 책을 읽는 건데 너무 편하게 다가왔어요. 서구가 동양을 침범한 건 서구의 불안을 가지고 동양으로 들어가서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과도 해요. 장자에 대한 책도 쓰고 선불교에 대한 책도 쓰고 달라이라마도 만나러 가시고요.
천국이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천국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은 이분법이 해체된 세계라고 해요. 기독교 같은 경우 초자연적인 종교라 자연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머튼은 자연에서 배워야 된다는 주의에요. 나중에는 허름한 오두막인 은수처에 들어가서 자연과 소통하며 살아가시죠.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는 쉽게 비판 혹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이전에 만났던 나의 인터뷰 중 두 명은 신학대학원에서 동성애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 보수성이 곧 기독교의 모든 것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경아 쌤이 불교와 니체를 공부하고, 오늘날 기독교 문제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신앙을 놓지 못했던 건 그의 몸에 어려서부터 새겨진 예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만난 토마스 머튼이 어찌나 좋았던지, '내가 이렇게 목이 마른 상태였던가'하는 생각도 했단다.
경아 쌤의 말마따나 "버리는 건 쉽"지만, 놓지 않은 채로 새롭게 만나는 것은 몇백 배는 더 어렵다. 그는 그 여정을 지적이고 영적인 스승과 함께하려고 한다. 좌절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경아 쌤이 피워낼 사랑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인터뷰_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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