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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연산군일기』 풀어 읽은이 김석연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4. 4. 29.

『낭송 연산군일기』 풀어 읽은이 김석연 선생님 인터뷰

 

 


1. 『연산군일기』를 『낭송 연산군일기』로 풀어 읽고 엮으셨는데요, 다른 실록과 다른 『연산군일기』만의 특징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실록은 선대 왕이 죽으면, 실록청이 설치되고 일정 기간 안에 사초와 시정기 등의 자료를 취합해서, 1차·2차·3차의 검증 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연산군은 쫓겨난 왕이라 격을 낮춰 일기청이 설치됐고 『연산군일기』로 편찬됐습니다. 『연산군일기』만의 특징을 꼽자면 편찬자가 중종반정을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연산군일기』에는 반정의 명분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실록의 첫머리인 총서도 연산군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는지, 임금으로서 얼마나 패악질을 일삼았는지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기사로 들어가면 즉위 10년까지의 연산군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의 모습은 갑자사화 이후 2년간의 기록에 집약되어 있는데, 내용 중에는 객관성이 결여된 것,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장된 것,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어떻게 남겨진 건지 의아한 것도 꽤 눈에 띕니다. 예로 임사홍과 흥청을 들 수 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건을 밀고하고 부추겨서 갑자사화를 일어나게 만든 간신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연산군일기』에는 이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이 야밤에 자기 집에 찾아오자, 술상을 앞에 놓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폐서인됐고, 사사됐다고 비밀리에 알려 줍니다.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요. 이 일로 연산군을 등에 업은 임사홍은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자신과 척을 진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도 쓰여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도대체 누가 어떻게 알고,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걸까요? 절로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일기』에 임사홍이 주도해서 살육을 저지른 기사는 없습니다. 되레 임사홍도 갑자사화 때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임사홍을 두고 연산군을 극악무도한 폭군으로 이끈 간신이라는 평가는 억울해 보입니다.


또 ‘연산군’ 하면 1만 명의 흥청(興淸, 음악을 잘하는 기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연산 11년 기사를 보면 흥청은 300명이 목표였고 실제로 뽑힌 흥청은 45명, 가흥청(假興淸, 예비 흥청)은 48명으로 207명이 부족한데, 음악에 재능 있는 기녀 찾기가 어렵다는 기사가 있습니다(4월 4일). 그런데 12일 후에 연산군이 흥청 3백 명을 한 달 후인 단오까지 채우라고 명하는 기사가 나오고(4월 16일), 1년 후에는 흥청 1만 명에게 줄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는 기사가 나옵니다(연산 12년 3월 27일). 문제는 연산군이 흥청을 뽑는 기준이 아주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외모만으로 뽑는 게 아니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야 합니다. 흥청 1만 명 이야기는 연산군이 얼마나 향락에 빠졌는지 알리려는 의도로 과장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갑자사화 이전의 기사들은 다소 허술하게 기록된 면이 있습니다. 맥락 없이 기사가 툭 튀어나오거나, 중요한 사건의 결말이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 기사가 있습니다. 갑자년 이후로, 연산군이 전에 있었던 일을 소급해서 죄 주고, 임금의 과실을 비판하면 귀양 보내거나 죽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관에게 부탁해서 사초를 없애 버렸다는 겁니다. 또 연산군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후세에 전해질 걸 염려해서 시정기를 삭제하고 불태웠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세태를 논한 상소와 임금에게 간한 말들이 많이 빠지고 생략된 것이라면서 임금의 악행이 전해지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이렇게 해서 화를 면한 사람이 많은 건 다행이라는 겁니다(연산 6년 5월 5일). 그런데 갑자년 이후 2년간은 절대 권력을 쥔 연산군 치하인데도, 이때의 기사에는 놀랍도록 자세하게 폭군 연산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무도한 시절의 기사들은 남겨진 걸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연산군일기』를 읽으면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 그림을 완성하는 것 같은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2. 『낭송 연산군일기』에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꼽아주시고 이유도 말씀해 주세요.
즉위 10년간의 연산군은 뛰어난 명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암군도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의 연산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달리 지극히 평범한 왕이었습니다. 이런 평범함이 되레 특별함으로 여겨질 정도로요. 이랬던 사람이 순식간에 희대의 폭군으로 변합니다. 무엇이 연산군을 변하게 만든 것인지, 절로 의문이 듭니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성종이고, 어머니는 남편인 성종 손에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사사된 폐비 윤씨입니다. 즉,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이자 동시에 죄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안고 10년간의 세자 시절을 보냈고, 조선의 10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연산군은 감성이 풍부해서 백 편이 넘는 시(詩)를 남겼고, 음악과 춤, 공예 등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임금이 아니라 대군으로 살았다면 예술가로서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폭군의 이미지와 달리 가족을 무척 챙깁니다. 아내와 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서모인 장현왕후(중종의 어머니)와 훗날 중종이 된 이복동생 진성대군 등 27명의 배다른 동생들까지요.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연산군은 관록이 붙은 왕이 됐습니다. 모든 게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이때 연산군은 갑자사화로 왕실과 조정에 피를 뿌립니다. 모후 사건을 꺼내 들고 내명부부터 시작해서 조정까지 백 명이 넘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숙청합니다. 왕후를 참소해서 죽인 죄, 왕후가 쫓겨나고 죽임당하는데 신하로서 극렬히 막지 않은 죄… 이것이야말로 위를 능멸한 죄라면서요. 그렇게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며 자신이 파멸할 때까지 공포 정치를 멈추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지독히도 집요한 연산군의 성정이 한몫합니다. 얼마나 집요한 구석이 있는지, 이세좌의 죽음을 예로 보겠습니다.


이세좌는 능상 죄의 원흉으로 지목돼서 귀양 가던 중에 교형을 당합니다. 이때 연산군은 이세좌의 죽음을 보고하는 의금부도사에게 아주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이세좌가 어떤 차림으로 귀양처로 가고 있었는지, 죽음의 명을 받고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죽기 전에 어떤 말을 남겼는지. 그리고 이세좌가 평상시와 같은 낯빛으로 죽었다는 대답에 연산군은 불쾌해합니다. 이세좌가 죽을 때 울지 않고 표정이 전과 같았다는 것은 죽으면서도 기세를 꺾지 않은 것이라면서요. 그리고 이런 사람을 어질다고 볼 수 있냐고 승정원에 묻습니다. 겁에 질린 승지는 절개와 의로움을 지키다 죽는 게 아니니 이세좌는 이렇게 죽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연산 10년, 4월 9일). 이세좌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한 달 후 연산군은 이세좌의 머리와 사지를 베어오라고 명합니다(연산 10년 5월 2일).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7개월 후에는 이세좌 등 4명의 시체를 파내서 해골을 분쇄해서 형적을 없애라고 명합니다. 땅에는 영험한 풀이 있고 하늘에는 신통한 새가 있기 때문에 간신이 하늘과 땅에 의지할 수 없도록 해골을 바람에 날려서 없애야 한다면서요(연산 10년 12월 15일). 연산군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고, 이런 집요함이 결국 연산군 자신마저 파괴시킵니다.


3. ‘조선왕조실록 읽기 세미나’가 10년째 계속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실록을 읽으시면서 선생님께서 가장 다르게 보게 된 왕이 있을까요? 있다면 이유와 함께 말씀해 주시고, 없다면 인상적인 왕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태조부터 지금 읽고 있는 선조까지, 실록을 읽으면 각 왕한테서 매번 새로운 면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다르게 보게 된 왕을 한 명만 꼽을 수 없기에 이번 낭송집의 주인공인 연산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언제까지 살았을까요? 『중종실록』에는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두 달 후에 유배지인 강화도 교동에서 역질에 걸려 죽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건 연산군이 명나라와 조선의 조정에서 양로왕으로 불리며 명종 17년(1562년)까지 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연산의 나이는 87세입니다. 연산군이 90세를 바라보게 살았다니,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요? 그건 중종과 반정공신들이 왕이 바뀐 것을 명나라에 보고할 때, 연산군이 폭정을 해서 쫓아냈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몸이 아파서 동생(중종)에게 스스로 선위하고 요양 중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중종 16년, 명나라에서 세자(인종) 책봉문과 선물을 보내왔는데 여기에 양로왕과 그의 왕비의 것도 있었습니다. 당사자는 죽고 없는데 황제가 선물을 보내왔으니, 조정에서는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이런 상황은 인종을 지나서 명종 17년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의 말로는 달랐을 것이고 이 나이까지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의미 없는 상상입니다. 연산군은 피의 숙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인 연산군은 어머니의 추존에 집착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죄인의 아들이라는 결함을 지울 수 있으니까요. 성종의 적장자이니 어머니만 추존되면 연산군은 왕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누구나 허점이 있기보다는 완벽하길 원합니다. 연산군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연산군은 즉위 직후부터 모후를 추존하려 합니다. 하지만 선왕의 유지를 받들라는 대간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을 때 연산군은 추존 문제를 다시 꺼냅니다. 문제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대간이 여전히 선왕의 유지를 들먹이며 반대했다는 겁니다. 연산군은 임금인 자신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하들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그래서 일시에 쓸어버릴 패로 폐비 건을 꺼내서 갑자사화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능상’으로 규정하고, 죽음의 공포로 조정을 장악합니다. 상황은 연산군의 의도대로 흘러갑니다. 절대 권력을 쥔 연산군은 자신의 말에 일절 토를 달지 않고 고개 숙인 신하들을 보며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었다고, 태평성대를 이뤘다고 자찬합니다. 그게 상상 속 세계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요. 더 큰 문제는 연산군한테는 살육과 공포를 멈출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부족했고, 손에 쥔 절대 권력으로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비전도 없었다는 겁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하늘이 준 권력을 대신 행사하는 것인데, 연산군은 권력을 소유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권력을 소유한 순간 여기에 매몰됩니다. 단적인 예가 경연 폐지입니다. 경연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는 명을 내리고 거둘 수 있다고 말하는 연산군. 그런데 임금에게 경연은 단순히 공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부의 장 안에서 신하들과 함께 현 시국을 알아가고, 정세를 분석하고, 정책을 만드는 것, 그게 경연입니다. 그러니 연산군의 경연 폐지는 정치를 포기한 것이고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킨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조선을 뒤덮은 죽음의 공포가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극단의 공포 정치로 치닫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연산군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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