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포뇨》 ①배경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
사라진 직선
《벼랑 위의 포뇨》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림체의 변화 때문에 초반 몇 분 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야자키하면 디테일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유치원 아이들 보는 교육방송처럼 간단히 형태만 살린 바다 생물이 잔뜩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동물들은 다 귀엽고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서사도 기대 밖으로 단순했다. 인간이 되고 싶은 물고기 때문에 멀쩡했던 바닷가 마을이 물에 잠겼다가 다시 원상복귀되는 이야기였다. 마녀도 안나오고 지구가 멸망할 일은 더더구나 없다. 해일이 일어난다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주인공 인어공주도 예쁘지가 않았다. 심지어 얼굴형이 평범한 네모여서 나는 그것도 충격이었다. 엽기발랄한 사랑스러움이 빠진 것이다. 4살 소녀 소년은 원하는 것 모두를 갖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쉬운 세계처럼 보였다.
일상의 애니미즘을 연구하기로 하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쇼스케와 포뇨가 집에서 차와 라면을 먹을 때였다. 부엌 타일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엄마 리사가 어부 아빠의 귀환을 기다리며 시금치 삶을 때를 보면 아주 반듯한 녹색 타일이 가지런하다. 그런데 나중에 포뇨가 찾아와 바닥 식탁에서 쇼스케와 라면을 먹을 때 보니, 그 타일의 개수가 줄어 있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달라져 있었다. 가스레인지 밑에 있는 오븐 문도 그 윤곽이 조금 더 둥그스름해져 있었다. 그때부터 이 영화의 소박한 그림체와 파스텔톤의 색감에 미야자키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실측 불가 규모라고 하는 온천장이 나온다. 우리의 편협한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쇼스케의 방은 다르다. 우리가 볼 때마다 풍경이 변한다는 것이다. 미야자키는 다듬어지지 않은 선들이 변주되는 그림체 위에 물고기가 인간이 되는 동화를 얹었다. 알 만한 이야기를 지탱한 것은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는 불안정한 배경이었다. 오프닝씬을 보면 파도가 계속 움직이는 모습이 나온다. 바람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듯 파도도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다. 포뇨는 하늘이 아니라 바다를 다룬 이야기지만 만물이 움직인다는 것을, 변한다는 것을 테마로 하고 있었다.
‘변한다’에 초점을 맞추면 《벼랑 위의 포뇨》가 다양한 장면으로 고정관념을 뭉개면서 비튼다는 것이 보인다. 우선 우리는 《벼랑 위의 포뇨》에서 도입부에 주의해야 한다. 둥근 보름달이 뜬 바다 아래로 양쪽에서 둥글게 휜 바다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그 경계선 위로 어선들이 뿌웅 소리를 내며 작업중이다. 직후 화면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는데 해파리들이 피웅피웅 올라오는 것을 비춰주다가 더 아래를 유영하는 많은 바다 생물을 보여준다. 거대 오징어가 장엄히 헤엄을 치고 그 주위에서 팍팍 터지는 미생물들의 모습을 보면 한창 바쁘게 진화중인 바닷속이다. 그런데 바로 이어 나타나는 것은 에어 캡슐 안에서 신비한 액체를 스포일러로 떨어뜨리고 있는 마법사다. 세상에! 그는 레이저 총 같은 것을 쏘아 오징어의 살을 통통 찌우고 있다. 나중에 이 마법사 후지모토의 실험실도 나오는데, 그런 것을 보면 진화는 자연의 힘이 아니라 인공적 노력으로 진행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미야자키는 자연과 인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후지모토가 탄 배를 보자. 몇 분 동안 워낙 많은 바다 생물이 나와서 정신이 없지만 그 와중에도 선체를 더듬거리고 있는 삼엽충은 알아볼 수 있다. 해양 절지동물의 일종으로 고생대에 살다 멸종한 바다 생물이다. 위에서는 현대의 어부가 조업을 하고 있는데, 아래에서는 고생대가 펼쳐져 있는 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도 바닷속에서 섞어 버린다.
이때 놀랍게도 갑자기 얼굴은 사람인데 짧은 팔에 다리는 드레스처럼 펄럭이는 인면어(人面漁) 포뇨가 나타나 해파리 위에서 느긋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물고기도 사람도 아닐 뿐만 아니라 바닷속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육지를 꿈꾸는 아이다. 그리고 바다 자체가 동물처럼 움직인다. 물로 된 바다에는 형태가 없다. 하지만 포뇨가 밟고 뛸 수 있는 이 바다는 수어(水魚)들로 넘쳐난다. 물인데 물고기, 물질인데 생명이다. 게다가 수어에는 성격이 있다. 간교하기도 하고 순종적이기도 하다. 인간처럼 하지모토의 수하가 되어 시키는 것만 비굴하게 할 때도 있지만, 인간이 되려는 포뇨를 응원하며 힘껏 해안가 도로를 함께 달릴 때에는 스스로 기뻐한다. 미야자키는 종의 경계, 각자가 처한 삶의 한계 같은 것도 포뇨로 하여금 쉽게 넘도록 한다.
아직 놀랄 일은 남았다. 미야자키는 포뇨가 바닷가 마을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육지에 가까워진 바다 바닥을 보여준다. 이때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지 끔찍하다면 끔찍하다. 고생대 생물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한 쓰레기가 묘사된다. 타이어, 씽크대, 자동차 옆문, 운동화, 마요네즈 병, 치약통, 온갖 캔과 유리병까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5살 아이들이 보기를 기대한 만화 영화 아닌가? 그런데 미야자키는 주인공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가 쓰레기 천지라고 한다. 어린이는 순수하고 소중하므로 귀하고 아름다운 세계 속에 처해 있어야 하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작품에서 미야자키는 바닷가를 묘사할 때 정말 철저하게 구석구석 꽉 찬 쓰레기를 놓치지 않는다. 토토로가 지켜주는 녹나무의 싱그러움이라든가 모노노케 히메가 살아가는 원시의 숲이라든가를 미야자키 자연관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그는 쓰레기가 있는 바로 그 세계가 우리의 자연이라고 한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인간과 자연, 과거와 현재, 물고기와 인간, 순수와 더러움이라고 하는 이분법을 온갖 수준에서 내려놓는다.
그리고 오프닝씬이 시작된다. 바다를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병렬적으로 놓여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는 선들이 하나의 면처럼 보인다. 그런 면들이 파란색이나 핑크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조합을 만든다. 여러 겹의 파도가 하나의 면 위에 동시에 표현된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의 조잡한 그림체를 흉내낸 것 같기도 한 단순한 선들은 《이웃집 토토로》의 오프닝과도 닮았다.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메이가 깡통이나 벌레, 도마뱀과 나비, 고양이 모양을 계속 지나가는 식이어서 아이가 다양한 존재들과 만난다는 사건성이 부각된다면, 《벼랑 위의 포뇨》의 오프닝은 파도의 느긋한 패턴이 모든 것을 움직인다는 점이 강조된다. 여러 층의 파도들 사이로 고래와 오징어,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지나가는데 전체적으로 느리고 우아한 반복이다. 일견 유치해 보이는 이 파도들을 휘감는 것은 성악 가수의 울림이 큰 가곡풍 노래이다. 소박하지만 장엄한 리듬 속으로 이분법이 빨려 들어가고 만다. 포뇨의 바다에는 ‘해양이라는 장대함과 광대함’이 추구되지 않는다(『반환점』, 414쪽). 하지만 이 경계의 바다는 모든 규정을 넘어가므로 다양하다.
벼랑, 탈영토화의 첨점
바닷가 마을을 상징하는 공간은 두 곳이다. 하나는 유치원과 노인들의 데이케어센터 ‘해바라기집’이 붙어 있는 보육+요양원이다. 매일 쇼스케는 놀고 배우기 위해 유치원으로, 엄마는 돌보며 일하기 위해 요양원으로 등원한다. 그런데 어린이와 노인이 다니는 곳이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는 겨우 키 작은 나무들로 담을 쳤을 뿐이며 개구멍이 잘 뚫려 있다. 쇼스케는 두 공간을 마음대로 오간다. 가끔은 유치원 시간인데도 몰래 빠져나가 할머니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작품 안에서 나오는 공간 자체로만 보면 유치원은 신발장까지만 보여주는 데 반해 해바라기집은 현관 입구라든가 할머니들이 쉬시는 발코니까지 고루고루 보여준다. 해바라기집이 유치원을 감싸는 모습이다.
쇼스케 입장에서 유치원 친구나 할머니들은 다를 바가 없다. 포뇨를 처음 보여주었을 때 쿠미코짱은 자기가 키우는 금붕어보다 못생겼다며 놀렸고 포뇨의 물뿌림 공격을 받았을 때는 울면서 신경질을 냈다. 토키 할머니도 포뇨를 보고 ‘인면어’는 재수 없다며 벌벌 떠시다가 역시 물 뿌림 공격을 받아 까무러치시고 말았다. 아이나 노인이나 싫은 것 두려운 것을 보면 설레발을 치면서 오바하는데 그 모습이 닮았다. 사실 쇼스케는 모두를, 심지어 엄마까지도 이름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런 일도 있나보다 하면 그만인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쇼스케가 모두를 관계나 지위로 부르지 않고 공평히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나이, 성별, 위치 같은 것은 편의적이고 임시적인 구분 같은 것임을 이해해서다. 쇼스케는 상식적인 구별에 상관하지 않는다.
사랑꾼 포뇨, 욕망 덩어리 포뇨 덕분에 생태계 교란이 와서 해일이 마을을 덮친다. 그런데 포뇨가 쇼스케의 집을 찾은 그 다음날 아침, 벼랑 위 쇼스케 집 마당까지 차오른 물은 평화롭기만 하다. 엄마가 차로 다니는 길은 물에 잠겨 데본기의 보트라오레피스, 딥노린쿠스가 느긋이 따라가는 길이 되어 있다. 데보넨쿠스는 물 속에 잠긴 나무들 사이로 헤엄친다. 보트라오레피스나 딥노린쿠스는 실제 데본기에 활약하다 멸종한 동물이며 데보넨쿠스는 새로 창작해서 넣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진짜 가짜라는 경계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마법의 힘, 활력의 바다로 가득찬 세상에서는 이상할 일도 없고 불가능할 일도 없다. 그래서 장난감 배에 아이들이 오르게 되고, 다이쇼기에 살았을 것 같은 가족들에게 리사의 행방을 물을 수도 있다.
포뇨의 욕망 덕분에 일어난 해일이다. 그 덕분에 경계는 더욱 허물어진다. 전날 밤 아빠가 탄 배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배들의 무덤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란만마레의 풍요로운 헤엄으로 생명력 넘치는 황금 수어가 배 위로 쏟아진 덕분에 다시 순항하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해일이 덮친 바다를 아이들이 좋아하는 입욕제 색깔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작품 속 해일은 인간이 고통받는 재난이 아니라 아이들이 즐거운 사건이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두 아이의 눈빛이 신기해서 반짝인다. 경계를 고집하지 않을 때 좋은 일 안 좋은 일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물고기와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제목이 왜 ‘벼랑 위의 포뇨’일까? 쇼스케와 포뇨의 눈높이에서 제일 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시타카가 출발했던 동쪽의 깊은 산도 아니고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천공의 성 라퓨타도 아니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 벼랑은 어느 나라 해안가에서나 삐죽 솟아 있는 조금 높은 언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약간의 높이에 대한 포뇨의 욕망이 해일을 일으킨다. 해수면은 물고기에게 제일 높은 곳이었다. 바로 그 높은 곳보다 약간만 높은 곳을 보는 일로도 온 세상의 질서가 다 흔들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에베레스트처럼 누구에게나 어려워보이는 봉우리를 정복해야만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눈높이를 조금만 높이기만 해도 삶에 지각변동이 찾아온다. 사소한 일상의 돌출부가 우리 일생을 변화시키는 일이 있지 않은가? 소피가 화덕의 재 하나 치웠을 뿐인데 움직이는 성의 걸음걸이가 훨씬 가벼워졌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작은 높이’를 존중하고 거기에 이끌리는 나를 사랑하자. 벼랑은 붙박힌 자리에서 내가 이탈할 수 있는 기회의 자리다.
곡선의 혁명
미야자키가 강조하는 것은 곡선이다. 그동안 직선의 정교함을 강조해왔다면 포뇨에는 직선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전체 그림을 인간이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움직이는 선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집이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굴곡이 진다. 굴곡이 질 뿐만 아니라, 특히 리사 부엌의 오븐은 장면마다 다른 형태의 문을 보여주고 벽에 붙은 타일은 개수마저 달라진다. 이런 기법은 작화 도중 더욱 강화되어 결국 작화 감독은 크레용을, 미야자키는 파스텔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배경 담당 화가 요시다 노보루(『아트북 벼랑 위의 포뇨』, 22쪽)는 지브리 사상 처음으로 크레용을 사용해서 배경을 표현했다. 사물을 칼로 자르듯 나누는 직선을 없앤 것으로도 모자라 선들이 뭉개지면서 넓게 번지는 질감의 크레용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작품 전면에 깔리면서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을 따뜻하게 긍정하도록 만든다. 1139장의 배경. 게다가 크레용은 그것을 쥔 사람의 손이 어디에 힘을 주었는지마저 느끼게 해준다.
이런 시도는, 그림 이면에 그것을 창조한 신의 손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풍경도 인간이, 존재가, 사물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가운데 그 각각의 인상이 겹치고 뒤섞이며 만들어진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폭풍우 치는 날에 집이 더욱 기울어지게 그린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집이 그렇게 기울어져서가 아니다. 집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누군가가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장편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토르의 성》(1967)의 자동차씬 같은 데에서도 여러 번 확인된 바 있다. 미야자키는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 같은 것을 그릴 때 폭탄의 사출구를 일부러 과장해서 부풀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작품 일부 장면에서의 활용이었지 공간 전체가 곡률을 가지고 꿀렁대는 식까지는 아니었다.
곡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자기 감정에 다가오는 바라 하나의 크레용을 쥐고 과감하게 슥슥 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은, 애니메이터의 신체가 사물과 관계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하는 바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경험이 없으면 곡선을 창조할 수가 없다.
Q) 미술감독으로서 각자에게 따로 지시를 하지 않으셨군요
요시다) 저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작업하고 있으므로, 여기는 이런 느낌으로. 재료는 이런 식으로 써 달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저도 모르니까. 포스터컬러 위에 크레용을 칠하고 그 위에 또 포스터컬러를 입히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그런 것은 각자 애드리브로 처리합니다. 그 결과 신중한 사람은 하나하나 예상을 해 가면서 그리고. 대담한 사람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해 보는 등 제각각입니다.
Q) 성격이 그림에 반영되는군요?
요시다) 네. 성격이 드러나서 재미있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레이아웃을 중심에 두고 보드의 색감 같은 방향성을 잡아 두면 스태프가 자유롭게 여러 가지 시도를 해도 통일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감안하고 모두에게 모험을 시켰습니다.(『아트북 벼랑 위의 포뇨』, 24)
미야자키 하야오는 《벼랑 위의 포뇨》에서 그때까지 지브리가 추구했던 정밀한 정확성, 디테일의 복잡성이 주는 사실성으로부터 극단적으로 멀어진다. 이 무렵 일본의 애니메이션계는 자세히 더 자세히, 정확히 더 정확히 구현하기 위해서 디지털의 힘까지 최대한 빌리는 것이 하나의 풍조였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그렇게 해서 도대체 무엇이 남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다. ‘자세히, 더 정확히’라는 것에는 어떤 재미도 의미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링크; 13초 28).
미야자키는 포뇨를 구상하며 애니메이션이란 본디 연필로 그리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그동안 지브리는 최대한 현실 구석구석을 채우는 세부를 포착하려 했다. 미야자키는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면서 이런 리얼리즘을 내려놓았다. 단순한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림체에 있어서도 직선을 배제한 곡선 위주로, 파스텔을 사용한 면감을 강조하는 방식을 적극 도입했다.
미야자키는 그동안 초당 프레임의 수를 되도록 줄이려고 애썼다. 애니메이션은 그림 장수가 많아질수록 더 부드러운 동작감을 줄 수 있다. 미야자키가 프레임 수를 줄이려고 했다는 것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동급의 다른 스튜디오보다 월등히 장면 수가 많아서다. 그런데 진짜 같은 이미지를 추구할수록 그림 장수가 올라가고, 그림 장수만큼 인건비가 들고, 그렇게 제작비가 높아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디지털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초당 프레임수를 높인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다 정교하게 포착하기 위한 강박, 자연스러운 재현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다. 이것이 디지털이라는 계산 가능한 화면으로 직결된다는 점은 미야자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초당 그림 수에 구애받지 않고 스텝 각자 느끼는 대로 그려보자! 재현해야 할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이미지를 어디까지 내려놓을 수 있냐를 시험해보자! 미야자키와 그의 스텝들이 도대체 파도에 대해 어디까지 그릴 수 있는지 전부 시험해보자는 각오로 작업한 작품이 바로 《벼랑 위의 포뇨》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활동일까? 애니메이션이란 뭘까? 그것은 결국 선으로 하는 작업이고, 펜을 든 인간이 손으로 하는 작업이며, 그 인간이 걷고 달리면서 느낀 세상을 다시 내어놓는 일이다. 애니메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대상을 해석하는 능력이며, 그 대상과 함께 변용되는 능력이다. 사물에 대한 깊은 감수성은 그 사물과 어느 정도로 구체적인 관계를 만드는가에 따라 나온다. 미야자키는 다시 손으로 선을 그리면서, 활발발한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정지함 없이 변용하고 변용되는 생명을 이야기하려 했다.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어 최신작《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제작 기간 7년, 전부 손으로 그리게 된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철학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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