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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소]인문공간 세종의 인류학 세미나를 소개합니다⚊인류학, 신체 체조

by 북드라망 2024. 3. 11.

인문공간 세종의 인류학 세미나를 소개합니다⚊인류학, 신체 체조

 

강평

 


3단 콤보를 시작하기까지
3년 전 인류학 책을 읽으며 원시 사회를 접했다. 치우친 것의 균형을 맞추는 ‘야생의 사고’, 거친 풍랑을 가르며 목숨을 걸고 목걸이와 팔찌로 전하는 ‘증여’, 덜 생산하고 덜 먹으면서 누리는 ‘원초적 풍요’ 개념을 통해 삶에는 ‘다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른 방향’이 왠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세계는 구석기-신석기-산업혁명-과학혁명으로 일률적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었다. 수만 년 전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라 나와 동시대, 세계 곳곳에서 수렵 채집하는 구석기인의 자료를 접하고는 원시 부족이 가깝게 느껴졌다. 원시 부족을 신비화하며 영웅시하기도 했다. 내 외관은 ‘나 중심’과 ‘효율’의 세계에 붙잡혀 있더라도 내 안에는 ‘온 세계와 관계 맺는’ 구석기인의 DNA가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신체는 내가 사는 세계에 생각보다 단단히 묶여 있었고, 모든 감각은 그 신체를 통해서 나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내 생활에서 막상 대할 때면 나의 이해가 피상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시 사회에 대한 신비화는 구경꾼으로 방에 앉아서 다른 사회를 남으로 본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인류학은 다른 세계를 바깥에서 머리로, 혼자 이해하는 공부가 아니다. 다른 세계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익히는 공부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에서 인류학을 신체적 체조라고 한다. 다른 사회를 연구할 때는 참조 체계를 바꾸어야 하며, 이는 과거에 살아온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으로서 다른 신체로 바꾸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체조에 이미 신체적 활동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신체적 체조’는 신체 활동을 강조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을 말하면서 왜 신체의 고통을 말했을까. 웃으면서, 머리로는 안되는 것인가. 참조 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에 다른 세계 하나를 추가로 장착하는 것이 아니다. 있던 것을 덜고, 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당장 웃음기는 사라지고 땀이 난다. 이걸 왜 해야 하냐고 분노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체계의 동작을 할 수 있냐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 봐야 안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혼자서 다른 사회를 신비화하지 않으려면, 아니면 아예 알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려면 일단 시작해야 한다. 


인문세 인류학 팀은 책 읽기로 시작했지만 점차 책상과 현장을 오가며 몸을 써서 다른 사회와 만나게 되었다. 현장감을 불어 넣기 위한 여러 시도를 했다. 지금은 답사라는 ‘주요리’뿐만 아니라 답사 전후로 답사를 준비하고 글쓰기로 마무리하는, 일명 3단 콤보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익숙한 반응,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수면으로 드러난다. 글쓰기를 통해서 준비 과정, 답사에서 드러난 익숙했던 생각들을 되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겪었던 ‘사건’의 의미를 집중 해석하는 것으로 3단 콤보를 마무리한다. 다음은 인문세에서 작년에 다녀온 북해도 답사를 중심으로 한 인류학 체조 이야기이다. 3단 콤보를 통해 익숙한 것들을 덜어내느라 몸이 부대끼고 그 자리에 근육을 만드는 체조에 한창인, 인문세 인류학 체육관을 소개한다. 

 

출처 - 인문공간세종 카페

 

 

답사 준비 ; 근육 이완시키기
운동을 하려면 본격적인 운동에 앞서 먼저 운동을 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근육을 이완시킨다. 가벼운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운동을 위한 준비만으로도, 이것이 가볍다면 ‘본격’ 운동은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벌써 힘들다. 나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몸을 풀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몸을 푸는 것은 여태껏 몰랐던 내 몸의 경직도를 알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건 내에서 최대한 몸을 이완시켜 근육 만드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답사의 세부적인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 경직된 근육의 현주소를 마주한다.

 

인류학 답사 준비의 특별함은 익숙한 돈 대신 시간과 정성을 다해 몸을 써보는 방식에 있다. 여행사, 기사를 쓰지 않고 모든 것을 셀프로 해본다. 물론 일부러 고생을 만들어서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공부하러 간 곳은 도쿄와 멀리 떨어진 북해도, 그중에서도 외딴 아칸 호수와 땅끝이라는 뜻의 시레토코라는 오지였다. 일본인들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소수민족의 땅이었다. 여행사도 관심이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가능성, 가성비 대신 ‘공부’를 먼저 정해놓고 나머지는 함께 힘을 모아 차차 마련하는, 우리 식의 기획을 해본다. 우리 식의 기획. 들을 때는 멋져 보이지만 실상은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느라 삐걱대고 준비 속도도 더디기만 하다. ‘공부’를 하기 위한 사전 과정이 이래서야 과연 시작은 할 수 있나 걱정이다.  


나는 이번 답사의 반장을 맡았다. 차량 인원 배치부터 해본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주제로 바로 난관에 봉착한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운전이 쉽지 않다. 답사 5일간 이동 거리는 1,000Km가 넘어 교대 운전이 필요하다. 차량 4인승을 4대 구하면 운전자 8명이 필요하다. 운전을 할 수 있다고 나선 사람은 6명이다. 차량은 3대로 하기로 한다. 카니발처럼 큰 차로 하면 간단하다. 한국에서 카니발을 운전해 본 사람은 2명이고 나머지는 소형차 경력만 있다. 6인승 1대, 나머지 2대는 승용차로 결정한다. 6+4+4=14이고 우리는 15명이다. 어쩔 수 없이 1대의 차 뒷좌석에는 3명이 타야 한다. 장거리라 좁고 불편함이 예상된다. 누가 그 3명이 될 것인가. 차량별로 운전자, 보조자를 고정하고 일본어 능력자, 여기에 체구까지 고려한 좌석 조합을 엑셀에 적는다. 복잡한 조건 탓에 퍼즐 하나를 옮기면 자리의 1:1 교환이 되지 않고 연쇄적으로 이동한다. 이번에는 운전자, 보조자까지 포함해서 교체 작업을 해본다. 이 작업만 몇 시간을 한다. 아니, 고작 자리 배치가 이렇게 어려울 문제, 더 정확히는 시간을 이렇게 잡아먹을 문제인가. 분통이 터진다. 자리 배치의 무엇이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리 배치라는 사건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조합이 필요한 낯선 조건, 그리고 나의 일에 대한 고정된 위계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몇 번 갔던 단체 여행을 떠올렸다. 내 기억에 그때마다 자리 배치가 문제된 적은 없었다. 뭐지. 시계를 돌려보니 그때는 띄엄띄엄 앉아도 될 정도로 넓은 차였고 고용된 현지 기사가 있었다. 그러니 운전자, 보조자, 일본어 능력자, 심지어 체구까지는 고려 대상이 될 여지가 없었다. 20인승에 15명이 타고 고용 기사도 있으면 누구나, 아무 자리에나 앉으면 된다. 나는 인문세에서 답사를 가기 전까지 패키지여행이나 동행자가 다 짠 밥상에 숟가락만 얻는 방식만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여행과 짜인 밥상은 대부분 돈을 더 내고 편리하고 익숙한 것을 택하는 방식이었다. 20인승에 기사 포함 15명 탑승이면 15명의 고유한 특징과 조건, 그에 대한 조합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여기서 돈으로 덮어버렸던 것을 치우면 15명 조합 수는 많아진다. 익숙한 것을 치워야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차량 자리 배치를 고민하면서 그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이런 데’나 붙잡혀 있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시간대별 이동 경로를 구글 내비게이션으로 적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나의 머리는 내 기준에 의한 중요도에 따라 ‘공부’와 ‘이런 데’를 분류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의 인류학 글쓰기 주제의 대부분이 총무, 답사 반장을 하면서 겪은 일이라는 점이다. ‘이런 데’가 없었다면 인류학으로 글을 쓸 수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이 일들은 빠뜨릴 수 없는, 글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머리는 뭐든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몸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낯선 것들을 만나 부대끼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다른 몸을 만들기 위한 예열을 하고 있었다.   

 

 

현지답사 ; 근육 만들기
몸은 준비 운동으로 이완시켰다. 이제 근육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한 방에 만들 수 없고, 조금씩 만든다. 부위별 근육량도 다르고 그에 따른 운동 방법도 다르다. 푸시업은 등 근력이, 윗몸 일으키기는 코어 근력이 필요한 운동이다. 푸시업을 잘한다고 윗몸 일으키기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근력이 특히 부족한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취약한 근력은 생활 습관, 그리고 아픈 것을 피하려 그 근육을 쓰지 않는 경우에 생긴다. 안 쓰던 근육을 쓰려면 훨씬 힘이 많이 든다. 운동 다음 날 통증도 있다. 그렇다고 계속 힘들다고 피하면 고통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답사에서는 ‘공부 위주’로 다 같이 공부하는 리듬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인류학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려 길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돈 내고 서비스를 즐기러 온 관광객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나는 지금’이라는 말로 익숙한 여행사 패키지 방식의 개별 행동을 하기가 어렵다. 개별 행동이란 익숙한 신체의 반응이고 이것이 어렵다는 것 자체가 신체적 부대낌을 만든다. 그리고 이 불편함, 고통에서 근육이 생긴다. 


답사 5일이면 긴 시간이다. 같이 밥 먹고, 차 타고, 잠잔다. 밀착된 환경이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모자란 모습은 숨겨두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인문세는 밥도 해서 먹고 오랜 시간 공간에 머무르는 다른 공동체 대비 온라인 위주라서 일상에서 부딪칠 기회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답사 전까지는 적당히 잘 감춰왔더라도 서로가 모르던 면이 나오게 마련이다. 나도 초반에는 표정 관리를 잘했다. 하지만 점차 체력이 떨어지자 평소 욱하는 성정이 나왔다. 일행 중 한 명이 공지사항 확인 대신 개인 톡으로 문의하고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등 개별 행동을 반복한 것이 발단이었다. 나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부글부글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원래’ 좀 개인적이고, 지금 개인적인 일이 있다는 한 사람과 ‘나는 원래’ 이런 건 못 참아, 그럼 나는 ‘이런 거’ 하는 사람이야?, 나도 지금 몹시 피곤한 상태라는 다른 한 사람이 로비 한가운데서 마주 보고 불을 뿜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로비에 서 있는 나머지 13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디 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창피했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밥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방으로 돌아가 혼자 있고 싶었다. 나는 평소 싫은 사람이나 하기 싫은 일을 되도록 피해왔다. 이번에도 그 회로가 곧바로 작동했다. 대면하는 근력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늘 피하기만 했으니 그 근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인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하던 대로 익숙하게 도망을 가버리면 내가 참을 수 없다던 ‘개별 행동’을 내가 하는 셈이 된다. 게다가 나는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인류학 공부를 하고, 그 뜻을 함께 한 사람들과 여기 땅끝까지 함께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굳어진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일행 중 누가 나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손을 건넨다. 나는 얼굴은 여전히 펼 수 없었지만 천근같은 발을 떼서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향한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날 저녁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당장 앉기도 불편하고 소화도 어려웠지만 시도해 봤다. 그렇다고 다음날 둘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현장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하던 일을 하는 시도는 그날 이후 계속하고 있다. 불편하고 싫은 일이 생기면 여전히 피하고 싶고 자리 지키기는 어렵지만 자리도 몇 번 지켜보니 아주 못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근육 만들기 참 힘들다. 

 

 

 


그날 저녁 이후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답사 내내 폐쇄된 차에서 하루 4시간 이상 같은 멤버들과 보내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일이 멤버들에게 묻지 못했지만 모르기는 해도 다들 동승의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왜 아니겠는가. 동승자들은 본인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배정표로 결정되었다. 차 안은 따로 위계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이 새로운 조합에 따라 애매한 관계 지도가 펼쳐진다. 직장 상사와 함께 탔다면 위계가 확실해서 애매할 여지가 없다. 직장 상사 계열로는 시어머니, 장인어른, 거래처 갑님 등이 있다. 또 어떤 자리, 예를 들어 뒷자리 3명 좌석의 경우는 자리 면적을 두고 소리 없이 다툴 수도 없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배려를 매 순간해야 하는 특수한 조건이 될 수 있다. TMI이지만 마지막까지 내가 배정에 고심했던 뒷자리 3명 좌석 중 한 명은 줌에서 상체만 봐서 몰랐는데 실제 공항에서 보니 조금 과장해서 배구 선수처럼 키가 컸다. 공항에서 실물을 처음 보고 다들 반가움 일색이었지만 나만 그 배구 선수가 겪을 불편함에 좌불안석이 되어 제대로 반기지도 못했다. 폐쇄된 차, 장시간, 그리고 위계를 따질 수 없는, 의사와 무관한 배정표 조합이기에 서로의 사태 파악과 관계 매김에 대한 시험의 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원시림 시레토코는 곰의 서식지였다. 그곳에서는 밖으로 나가면 진짜 곰이 있고 차를 타면 곰 같은 누군가가 있거나 점점 곰처럼 무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서운 곰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체력이 떨어졌을 때, 약한 근력이 드러났을 때, ‘원래 나’를 고집하는 사람이 곰이 ‘된다’. 만약 배구 선수나 나머지 2명이 ‘원래 나’는 이런 자리가 싫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무서운 곰, 피하고 싶은 곰이 된다. 다들 공부하는 친구가 되고 싶어서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각자 안 쓰던 근육을 움직여 근육을 만들었다. 너무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차가 고속도로 요금소에 바짝 붙지 못하면 뒷문을 열고 통행권을 뽑고, 휴게소에 들렀을 때 알아서 차량 쓰레기를 정리해서 버리고, 운전자가 졸지 않도록 피곤해도 잠을 청하지 않았다. 답사를 하며 모두 전체 관계 속에서 무엇이 될지 고심하고 뭐라도 시도하고 있었다. 좁은 차에서 근육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여행기 쓰기 ; 마무리 운동
이제 3단 콤보의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마지막 단계는 근육을 이완시키고 안 쓰던 근육을 쓴 탓에 체력에 바닥이 보이는 시기이다. 답사를 준비하고 예상치 못한 안팎의 곰을 만나느라고 안 쓰던 근력이 자극돼서 통증이 있다. 이럴 때면 덮어 놓고 좋은 추억이라 치고 일단 쉬고 싶다. 하지만 아직 글쓰기라는 어려운 관문이 남아 있다. 인문세 인류학 콤보 마지막은 여행기를 쓰고 고치고, 잡지로 만드는 것이다. 어렴풋하고 막연했던 생각은 이 글쓰기 단계에서 해석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답사 준비나 답사에서 느낀 것들을 현장에서 바로 그 의미를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에도 숙성이 필요하다. 벌어진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니라 ‘사건화’를 구성해야 한다. 이 글쓰기는 일필휘지가 아니라 소의 되새김질에 가깝다.  


인문세의 여행기는 답사 준비부터 답사 전과정에서 염두에 두는 부분이다. 되새김을 오래,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수시로 서로 무엇에 대해서 쓸 것인지 이야기 나눈다. 차에서도, 걸으면서도, 안되면 꿈에서라도 무엇을 쓸지 계속 생각한다. 사전 세미나 때의 생각을 발전시켜 쓸 수도 있고 답사를 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은 것을 쓸 수도 있다. 3단 콤보 각 단계 모두 연결되기 때문에 어느 단계도 건너 뛰거나 소홀하게 지날 수 없다. 답사 준비, 답사 과정에서 낯선 것을 많이 만날수록, 몸에 익숙했던 것과 크게 충돌할수록, 그리고 그 만남과 충돌을 사건화하는 되새김질을 많이 할수록 근육량은 커진다. 

 

글쓰기도, 그 글쓰기를 하기 위한 사유 모두 몸에 익숙하거나 잘하는 일이라서 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낯선 일이다. 다만 생각하고 싶은 것, 글을 쓰고 싶은 것은, 내가 모르고 있었지만 나뿐만 아니라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글쓰기를 통해 있는 줄도 몰랐던 낯선 사유를 깨우고 자극한다. 나는 북해도 시레토코에서 그 욕망의 현장을 목격했다. 원래 계획은 원시림 초입 야간 산책이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몇 시간 전 곰이 출현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숙소 바깥출입이 금지되었다. 예상치 못한 빈 시간에 여행 중반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글감을 10분간 생각해 보고 돌아가며 글감을 발표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에이~ 뭘 그런 걸 하냐며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반대는 없었고, 정해진 시간에 로비에 있는 탁자에서 만났다. 단 10분간이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정적이 흐르는 집중의 시간이었다.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는데 이미 글감을 잡은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부러움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조언과 응원이 이어졌다. 이 사유가 넘치는 장면을 보며 글쓰기 운동, 글쓰기 체육관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체력을 갈고닦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학을 책으로만 공부할 때는 원시 사회의 야생적 사고, 증여, 원초적 부라는 것을 금방이라도 이해할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남 이야기 듣듯 그들의 바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신비화하는 데에 그쳤다. 3단 콤보를 하고 난 후, 내 신체는 전과 조금은 달라졌다. 낯선 것을 접하며 돈, 편리, 효율 대신 고유한 특성을 고려한 ‘조합’을 해봤다. 고작 ‘이런 것’을 짜느라 정작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내 안의 익숙한 위계를 마주했다. 피하던 습관 대신 불편하지만 ‘자리 지키기’라는 안해보던 시도를 했다. 그때마다 내 신체는 낯선 것과 충돌하느라 비명을 질렀다. 필수적이라 생각했던, 돈이 지배하는 세계를 걷어내면 야생적 사고, 증여, 원초적 부의 개념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다. 조건마다 달라지는 조합이 가능하고 세상의 대부분은 ‘이런 것’들을 빼고는 돌아가지 않으며, 지금, 여기서 자리를 지켜야 비로소 관계는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것을 고통을 겪으며 몸으로 느꼈다. 인류학 글쓰기의 특별함은 글쓰기 전 1, 2단계에서 겪는 신체적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며 되새김질하는 데에 있다.  

 

출처 - 인문공간 세종 카페

 


신체 체조를 계속하며 
내가 다음 답사를 가면 3단 콤보에서 생긴 근력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아마도 갑자기 자리 배치에 곤란함을 겪지 않고 기꺼이 ‘이런 데’ 힘을 쓰고, 불편한 자리를 피하지 않고 당당히 자리를 지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미 한번 겪은 일이니 덜 불편한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아닐 수도 있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도 다음번 답사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떤 안 쓰던 근력이 새롭게 나를 시험에 들게 할지 몹시 궁금하다. 뭐든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따위는 없다.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익숙한 심리적 방어도 고개를 든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향한 걸음을 떼는 데는 문제없을 것 같다. 


3년 전 카페에서 3명이서 인류학 책을 읽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 사이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 보자는 뜻에서 강의, 대담 형식의 영상을 제작해서 유튜브에 올리기도 하고, 글을 묶어 잡지를 만들어보았다. 학술제도 해보고 잡지도 만들어보고 박물관 답사, 현장 답사, 사전 답사 등 이것저것 시도해 봤다.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시도해 봤다. 나는 시도 때마다 지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만족한다는 말로, 일단 거부부터 했던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편하고 또 못하는 것을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느덧 불편하다는 감각, 거부라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빠짐없이 인류학 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 공부 방법 자체도, 공부했던 사람들도 구간 동승했다. 공부 열차 구간 동승자들과 몸으로 부대끼고 글로 사유를 만나며 이미 내 참조 체계에 균열이 생겼다. 3단 콤보가 어떻게 변형될지, 또 어떤 사람들이 타고 내릴지 궁금하다. 나는 오늘도 운동화 끈을 매고 인류학 체육관을 향한다.  

 

*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었던 주요 텍스트들 

시즌 0 : “증여론을 읽어보자” 
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동아시아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한길사
마셜 살린스, 『석기시대 경제학』, 한울

2021년
시즌 1 : “의식과 무의식을 탐사하다”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알마
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 책세상
프란스 드 발,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세종서적
줄리언 제인스, 『의식의 기원』, 연암서가

시즌 2 :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묻다”
가라타니 고진, 『철학의 기원』, 비
루이스 멈퍼드, 『기술과 문명』, 책세상
사토 요시유키, 『탈원전의 철학』, 비

2022년
시즌 1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읽기

시즌 2 : “무-지배와 자율의 정치적 상상력”
표트르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 자서전』,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클리퍼드 기어츠, 『극장국가 느가라』,  
제인스 C. 스콧,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시즌 3 : “대칭성 인류학, 증여라는 기술”
부리노 라튀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갈무리
마르셀 모스, 『증여론』,  한길사
피에르 클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울력
데이비드 그레이브,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부글북스
마르셀 예나프, 『진리의 가격』, 눌민 

2023년 
시즌 1: “마음의 인류학-빛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오강남, 『오강남의 생각』, 현암사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동아시아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교양인
빅터 플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시즌 2: “몸의 인류학-신체에서 자연으로”
올리버 색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알마
마르셀 그리올, 『물의 신』, 영림카디널
알폰소 링기스, 『낯선 육체』, 새움
미셸 푸코, 『성의 역사3』, 나남

2024
시즌 1 : “빙하이후-구석기와 신석기 탐구”(진행 중)
레비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의 말』, 마음산책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뿌리와 이파리
스티븐 마이든, 『빙하 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워크룸프레스
제임스 C. 스콧, 『농경의 배신』, 책과 함께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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