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 ③ 캐릭터
증오를 이기는 흔들림
숲에는 얼굴이 있다
《모노노케 히메》의 캐릭터 창조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고매한 신에서부터 비루한 인간까지 각자의 감정이 풍부하게 묘사된 점에 있다. 이전까지 미야자키는 해적인 할머니라든가 정원사 거신병, 저주에 걸린 돼지 인간 등 비인간적 캐릭터의 다양한 실험을 해 왔다.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숲에 사는 다양한 신들, 정령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 도전을 한다.
특히 미야자키가 주목하는 감정은 증오다. 미야자키는 증오의 다양한 수준을 보여준다. 차례로 살펴보자. 맨 먼저 엄청나게 화가 많이 난 멧돼지 신 나고가 등장한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물속 장어처럼 힘차게 약동하는 분노의 촉수들은 사방으로 먹잇감을 찾듯 뻗어 나간다. 재앙신이 된 뒤 나고는 멧돼지로서 달리지 않고 분노 자체가 되어 돌진한다. 소용돌이치며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그 마음의 화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두렵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고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그 자의 숨통을 끊어놓기만을 바란다. 고통을 되갚아주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멈추지 않을 기세다.
증오는 인내와 결합한다. 나고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멀리 바다 건너 친제이산에서부터 온 멧돼지의 신 옷코토누시가 이를 보여준다. 옷코토누시는 나고보다는 훨씬 더 위엄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 회색빛 털과 네 개의 엄니, 작지만 쪽 찢어진 매서운 눈매는 그가 얼마나 화를 자제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옷코토누시는 유명한 산들의 주인인 여러 멧돼지를 거느리고 사슴신에게 운명을 의논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누런 눈곱이 잔뜩 끼어 있어 그가 오랫동안 아팠다는 것을 말해주며, 벼랑 위에서 절규하듯 찢어지는 목소리로 일족을 격려하고 이끄는 모습은 숲의 고통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옷코토누시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일족의 고통을 멈춰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자기 분노를 삭히고 또 삭히는 중이다. 그의 무거운 걸음을 보라.
증오는 인내에 이어 자애심까지를 품는다. 모노노케 히메의 엄마인 들개의 신 모로를 보자. 흰 들개의 신은 옷코토누시만큼이나 큰 몸을 지녔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에보시의 총알을 맞은 충격으로 붉어졌다가 조금 병색이 나아질 때마다 흰 색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직접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사나워 보인다. 모로 역시 증오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녀의 분노가 자애심을 누르지는 못했다. 모로는 인간이 버린 여자 아기를 자기 딸로 먹이고 재우며 훌륭히 키워냈고,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딸의 원한을 이해하며 그 옆에서 묵묵히 딸을 지켜왔다. 모로는 미야자키가 줄곧 그려온 모성의 계보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만한데 겁나도록 무섭게 자식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털 없는 인간에게 숲에서 살도록 가르친 뛰어난 지혜와 기술의 전수자이기 때문이다. 아마 모로는 인간 어머니들 그 이상으로 상냥하게 딸을 데리고 다녔으리라. 딸에게 위협이 될 숲의 나쁜 것들을 무섭게 내쳤으리라.
모로 역시 에보시의 총알을 맞고 고통받는 와중이었기에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모로는 재앙신이 된 옷콧토누시의 몸 안에 빨려 들어간 딸을 구하기 위해 죽기 직전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썼다. 모로에게는 복수보다 새끼를 구하는 일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래서 모로는 운명론자다. 그는 들개의 신으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을 증오를 앞세우는 일보다 중요시한다. 어미로서 새끼를 구하는 일을 자기 원한보다 중요시한다. 그래서 나고나 옷콧토누시와는 달리 죽어야 할 운명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오래 살았으며, 남은 생은 숲에서 울리는 동물들의 괴로운 신음 소리를 들으며 사라져갈 동물의 왕국에 대해 명상을 하겠다고 한다. 모로의 바람은 그러다가 좋은 기회를 보아 에보시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모로는 숲이 철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아시타카는 이런 모로에게 인간과 숲의 공존을 물었는데, 이때 모로의 대답이 겁나기 이를 데 없다. “닥쳐!” 모로는 타협을 모르는 들개의 신으로서 들개답게 살다 죽고자 한다. 그렇기에 인간에 대해 분노하지만 증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런 모로가 교조주의자는 아닌데, 인간인 딸에게 들개처럼 네 발로 걷기를 종용하는 대신 인간-들개로서의 운명에 충실할 길을 스스로 찾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증오는 자기 본분을 잊게 하기에 위험하다. 하지만 모로는 이 위험을 자기 긍지로 다스리며 재앙신이 될 길을 피해간다.
여담이지만 모로의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가 녹음을 하는 장면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이 배우는 나중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황야의 마녀를 연기하기도 한다. 미야자키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노인이면서 아이로 다중적인데 개성 충만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정말 기쁜 미소를 지으며 감탄한다(링크)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는 인간에 대한 분노와 인간-딸에 대한 사랑이 모순 없이 결합되어 있는 모로의 자애심을 인생의 간난신고를 온몸으로 겪은 노인의 굵게 떨리는 성대로 완벽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숲의 신이지만 증오를 하나도 모르는 듯한 캐릭터가 있다. 바로 사슴신이다. 생명을 주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사슴신은 초승달에 태어나 달이 차고 기움과 함께 그 자신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한다고 한다.(『모노노케 히메 아트북』, 100~103쪽 참고). 그러니 증오를 모른다기보다 생명의 빠른 순환과 함께 그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순식간에 지나간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트북의 설명은 이렇게 되어 있다. “나무의 작은 가지 앞에 멈춰선 시시신, 아시타카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무를 보고 있는 것인지 ……. 그 표정은 자애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잔인해 보이기도 한다.”(『아트북』, 101쪽)
사슴신과 함께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코다마다. 맑은 숲의 정령으로 사슴신을 부르는 존재인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 배경 연구를 위해 탐방했던 일본의 원시림 야쿠시마 도처에는 코다마 인형이 놓여 있다고도 한다. 이 코다마 얼굴에 표정이 없는데 이 점이 얼굴에서 생각을 잘 읽을 수 없는 사슴신과 비슷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체 작품에서 코다마와 비슷한 계열로 팔다리가 짧고 얼굴이 크고 대규모 무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같이 나오는 검댕먼지씨들이 있고,《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아랫세계에서 생명의 씨앗으로 나오는 와라와라들이 있다. 와라와라가 생명력으로 충만해서 몸뚱이 전체가 부푼 빵처럼 포동한 것과 달리 코다마는 움직일 때 작은 뼈다귀들이 부딪치며 다글다글 소리를 내는 등 좀더 유령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코다마쪽이 훨씬 더 유머 감각이 있어, 아시타카가 다친 소몰이꾼을 업고 사슴신의 숲을 통과할 때 그 뒤를 따라다니며 함께 노는 등 까르르 여유가 있다. 코다마의 작고 귀여운 몸짓은 증오를 모르는 숲의 근원적인 마음을 보여준다.
앗! 아시타카의 야쿠르에 대해서도 빠트릴 수 없다. 야쿠르는 우아하게 큰 두 개의 뿔을 단 영양인데 그 표정의 변화는 많지 않다. 하지만 새까맣게 맑은 녀석의 두 눈은 부드럽고 털은 따뜻해서 모로처럼 아시타카를 돌봐주는 느낌을 준다. 미야자키는 야쿠르에게는 높은 기상이 있다고 한다. 아마 야쿠르의 마음에는 아시타카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 충만할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
신들의 얼굴에 분노와 너그러움이 역동적으로 지나가는 것과 달리 인간의 얼굴은 애매하다. 이제 인간의 표정을 그 불확실한 수준에서부터 읽어보자. 먼저 에보시다. 에보시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크샤나처럼 거침없이 자기 왕국을 이끄는 대장이다. 에보시가 크샤나와 다른 점은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적어도 크샤나는 부해의 한 가운데에서 오무의 무리를 만났을 때 두려워서 총을 쏘는 실수를 했다. 하지만 에보시는 사슴신을 쏠 때에도 두 눈을 번쩍 뜨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눈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에보시는 모로처럼 자비로우면서도 무자비하다. 논밭이 있는 마을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쫓겨난 사람들을 한정 없이 거두고, 심지어 저주받은 아시타카에게까지 일자리를 주려고 한다. 하지만 전투 중에 낙오한 병사를 거두어 마을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에보시에게 버림받은 소물이꾼들이 흙탕의 강물에서 죽어가던 것을 구해준 이는 그들과 아무 상관 없던 아시타카였다. 놀라운 점은 이 소몰이꾼들이 마을에 돌아와서 에보시에게 한 톨의 원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몰이꾼들은 자신들을 데리고 오지 못해 미안했다는 에보시의 사과에 감동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으로 받는 에보시에 대한 지지는 그녀가 타타라 마을 자체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써 왔음을 의미한다. 이런 에보시는 증오 자체를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타인에게 원망을 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적의로 자신이 죽는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타타라 마을이 안녕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불사한다.
그렇지만 에보시도 화가 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센병 환자들이나 거리의 여자들을 보호하려는 에보시의 의지는 도대체 이 여자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다만 에보시는 자신의 증오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다.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화장이 진하다. 무로마치 시대를 철저히 고증한 미야자키의 입장에서, 당시 립스틱이 지금의 그것처럼 발색이 잘 될 리 없음에도 에보시의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 이유는 그녀의 성격을 확실히 표현하기 위해서다. 선명하게 붉은 입술은 그녀의 단호함, 극단적임, 자신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신 그녀가 느끼는 불안과 기쁨은 감춘다. 우리는 사슴신의 얼굴에서 증오를 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보시의 얼굴에서 어떤 희로애락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슴신이 생명의 부단한 정서를 활발하게 표현 중인 것과 달리 에보시는 생명이기를 거부하려는 듯 붉게 화장한다.
희로애락이 없다는 점에서 에보시와 같은 계열에 있는 인물은 지코 스님이다. 네모난 얼굴에 살이 처진 스님의 얼굴은 탐욕스러워 보인다. 가끔 실눈을 뜨며 의중을 알 수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사기꾼 캐릭터다. 그런데 굼떠 보이는 외모와 달리 굽 높은 게다를 신고 계곡을 뛰어다니고, 잔머리를 굴릴 것 같지만 철저히 문서에 의존하는 관료 타입인 점이 반전이다. ‘왕이 시키는 대로 산다’를 좌우명으로 달고 있지만 아시타카가 사슴신의 목을 돌려주자고 하자 또 그렇게 한다. 일차적으로 생각하면 숲에 불행을 몰고 온 이는 지코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 캐릭터를 악마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의 얼굴에 자기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숲의 신들이 확실하게 찡그리고 노하며 웃는 것과 비교하면 에보시와 지코는 애매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타타라 마을의 소몰이꾼과 제철소 여인들은 낮밤을 모르는 성실한 사람들이고, 동료의 안위를 자기의 문제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슴신의 목을 베는 악당이라지만 지코도 성실한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왕명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는 처세술을 따랐을 뿐이다. 미야자키는 지코나 에보시가 작품 끝에서 장렬히 벌받는 것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코나 에보시를 벌주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 누구도 그 엄격한 심판의 잣대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키려다 보니 남을 해치게 되고, 시키는 것을 잘 따랐을 뿐인데 재앙의 물길을 내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들이다. 일부러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에게는 숲을 파헤치는 일이 선이었다. 미야자키는 나쁜 의도가 딱히 없었는데도 악마가 되어버리는 현실을 보라고 한다.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미야자와 겐지라는 일본의 동화작가가 있다. 그가 쓴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라는 작품을 보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벌목을 했고 수렁논을 잘 키우기 위해 밭에 석유를 뿌리고 마침내 경작을 돕기 위해 하늘에서 제초제를 고루 뿌리게 되는 성실한 농부와 과학자가 나온다. 구스코 부도리씨는 그 중 으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그 일념으로 하늘에서 질소비료를 엄청 뿌려 사람들 먹을 빵을 모두 돌덩이로 만들고 만다. 부도리는 경작에 도움이 되고자 대기의 온도를 높일 궁리까지 하게 되는데, 화산을 억지로 폭발시켜 그 가스로 대순환의 대기에 교란을 일으켜 지구 온도를 평균 5도 정도 높인다. 그는 이 숭고한 과업을 위해, 인공적으로 터질 화산 속으로 홀로 걸어 들어간다.
기후 위기의 지금에서 보면 정말 뜨악하기 그지없는 동화다. 행복 전도사 구스토 부도리야말로 지구 멸망을 가속화시킨 주범이니까 말이다. 미야자와 겐지는 이토록 착한 이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할 때마다 악화되는 상황을 그린다. 흥미롭게도 미야자와 겐지도 미야자키처럼 바로 이와 같이 난처한 파국을 직시하면서 나쁜 사람을 색출하자고 하지 않는다. 부도리도 지구를 멸망시킬 줄은 몰랐으리라. 누가 물으면 그는, 자신에게는 어떤 나쁜 의도도 없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오직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럼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미야자와 겐지는,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절박한 상황이 당장의 도구에만 매달리게 한다고 본다. 하지만 미야자와 겐지는, 그렇게 생존에 내몰리더라 해도 자기 인식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부도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 만약 그가 자기 생각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다고 여겼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자신이 죽을 일도 없을 것이고, 지구의 온도는 더이상 올라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도처에서 굶주림으로 고통받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또 다른 방도를,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찾게 되지는 않았을까?
에보시의 입술은 붉다. 이 붉음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확신이다. 한번도 누군가를 향해 화내지 않았지만, 에보시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당위 만큼이나 사슴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당위도 확신했다. 물론 어떤 당위가 가장 옳은가는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어떤 것에도 한 번쯤 발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에보시는 아시타카에게 산이랑 결혼해서 숲에서 살 거냐고 물었다. 아시타카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모노노케 히메는 아시타카에게 저토록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인간을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시타카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시타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에게는 믿고 따라야 할 정답이 없다. 그 답 없음 때문에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쏜 총을 맞고, 산으로부터는 칼을 맞는다. 하지만 결국 에보시와 산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시타카의 그런 답 없음, 길 위에서의 흔들림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토록 뭔가 잘 모르는 아시타카의 표정이 제일 확실하다는 것이다. 자기 답이든 왕의 답이든 어떤 해답을 믿고 있었던 에보시와 지코는 애매했는데 말이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인간이지만 확실한 표정을 가진 이가 둘이다. 바로 아시타카와 모노노케 히메다. 아시타카는 활활 타는 증오의 화염에 먹히지 않는다. 그가 절제를 배웠기 때문이다. 아시타카에게 절제란 애써서 뭔가를 참는 계율 같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아시타카는 ‘자기’ 증오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에보시를 죽인다 해도, 철을 만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을 것이다. 아시타카는 에보시에게도 나고에게도 물었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길은 없는 거냐고. 에보시도 나고도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시타카는 함께 살아갈 최종적인 해법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길은 의외로 많이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아시타카는 이해의 길 위에서 상처와 슬픔을 모두 품고 함께 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타타라 사람들은 아시타카의 설득에 의해 자기들이 쏘아 죽인 멧돼지 시신 더미 속에서 죽기 직전인 들개를 구했다. 붉은 입술의 에보시 역시 더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고 결심하며 모노노케 히메와의 공존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이다.
이런 아시타카의 표정은 확실하다. 에미시 마을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아끼는 동생 앞에서는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웃어주었다. 자기를 잡아서 어떻게 할 수도 있을 타타라마을의 수장 에보시 앞에서나, 인간쯤은 얼마든지 씹어 먹을 수도 있을 모로 앞에서 당당히 화내기도 했다. 모로를 잃고 사슴신의 죽음 앞에서 고통스런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모노노케 히메 앞에서는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남자 주인공들 중에 눈 사이즈로는 최강이지 싶은데, 아시타카의 큰 눈은 자기 마음에 든 모든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거울과도 같다. 그렇게 진솔한 아시타카와 마주하면 아무리 큰 분노에 사로잡히더라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고, 아무리 복잡하고 애매하더라도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겁쟁이 지코 스님도 태양이 뜨기 전에 인간의 손으로 사슴신의 목을 돌려주자는 아시타카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게 된다.
모노노케 히메도 아시타카만큼 눈이 크다. 표정 변화로만 놓고 보면 신과 인간 중에서 최고로 으뜸이 바로 모노노케 히메다. 그녀는 증오에 사로잡힌 눈으로 아시타카를 노려보았으나, 나중에는 싫은 인간과 좋아하는 아시타카를 모두 인정하면서 기쁜 얼굴로 숲으로 돌아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은 모노노케 히메가 들개를 타고 아시타카를 내려보며 함께 살아갈 것을 약속할 때이다. 이때 히메의 얼굴에 편안하게 퍼지는 미소는 압권이다. 분노와 적대를 넘어선 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인간이 앞으로는 숲을 잘 돌보게 될까? 모노노케 히메는 자기 원망을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모로처럼 자식에 대한 자애로 미움을 감싸지 않고 아시타카에 대한 사랑으로 적의를 품는다. 덮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므로 모노노케 히메는 그 적의로 뭔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절망이나 잔인함 같은 부정적 정서를 틀렸다거나 없애야 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 안에 있는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화에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 적대심이 들어가 있다. 미야자키는 이런 적대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그것이 낳는 증오의 감정과 함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자고 한다. 원망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로에 대해 남긴 시를 읽어보자.
녀석의 눈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녀석은 너를 절망으로 갈기갈기 찢을 테니.
녀석은 네 마음을 산 채로 잡아먹을 테니.
들개 신은 옛 세상의 생존자.
은빛 강철 털과 두 개의 꼬리는 태고 신들의 어렴풋한 징표.
모로는 있는 그대로인 자연의 한 조각, 세상의 거울.
절망은 생명의 본질,
잔인함은 생명의 본성.
녀석의 상냥함은 생명의 상냥함.
그리고 녀석은 인간에게 증오를 배우고 있다.(《아트북》)
사슴신이 사라지고 난 뒤, 아시타카와 헤어지게 된 시점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숲에서 자기 할 일을 찾은 듯하다. 그녀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의 무례를 경고하는 정령들의 파수꾼이 될 수도 있다. 사슴신이 죽었을 때 에보시는 모로의 공격을 받아 팔을 잃고 고통에 잠겨 버렸다. 모노노케 히메도 모든 것이 끝났다며 두려워 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타카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고 했다. 아시타카는 사슴신의 목을 들고 달아나는 지코를 설득해 신에게 목을 돌려주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석유 문명이 인간을 종말로 몰아댈지라도, 최후의 그 순간이 코앞에 닥쳐왔더라도, 아직 우리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다. 이것은 미야자키의 커다란 생명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미야자키의 전 작품이 묵시록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벼랑 위의 포뇨》처럼 물고기가 인간이 되려고 모험을 한다는 동화에도, 그 배경에 온갖 쓰레기가 차고 넘치게 그려져 있다. 사람이 되고 싶은 인어의 꿈을 말리고 싶을 정도다. 포뇨가 되고 싶어하는 ‘인간’은 쓰레기나 양산하는 우매한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묵시록으로의 진행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해야 할 일이 넘쳐 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개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순환의 거대한 파도를 끊임없이 일으킨다. 삶은 부단히 전개된다. 사슴신이 죽어도 숲이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악하고 나쁜 일 하나만 붙들고 부들부들 떨 필요는 없다. 어리석은 내가 어떤 악마를 불러오게 될지, 전체의 부분인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내 몸을 틀어야 한다. 모노노케 히메의 여유로운 표정은 막연한 낙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수 말고도 할 일이 많음을 알게 된 이의 넓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아시타카와 모노노케 히메는 온누리에 증오와 적대가 없는 곳이 없을지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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