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공주》② 사건
신은 죽었다
《모노노케 히메》는 신의 죽음을 다룬다. 정확히 말하면 신의 자연사가 아니라 신의 살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전에도 숲이 죽어가고 있음을 경고하며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라퓨타》를 만들었다. 그리고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아래세계의 주재자가 실제로 죽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이 모티프를 다시 한번 사용한다.
신의 살해란 무궁무진한 신화의 바다에는 드물지 않는 일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들 하는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영원한 생을 꿈꾸는 길가메쉬는 자신의 위업을 새기기 위해 삼나무 숲의 거인 훔바바(Humbaba)를 베기 위한 전쟁을 한다. 그는 도끼를 들고 치고 또 치면서 훔바바를 쓰러뜨렸다. 물론 이 덕분에 훔바바에게만 깃들었던 일곱 광채와 화염이 강과 사자, 재앙의 바위, 지옥의 공주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신의 살해로는 『북유럽 신화』도 떠올릴 수 있다. 망치를 들고 무자비하게 거인들에게 덤비는 토르는 마블이 사랑하는 영웅 주인공이다. 신화에서 토르가 거인들을 물리치려고 하는 이유는 많은 동물과 풍요로운 식물을 한정없이 거느렸음에도 그들이 신들의 세계를 자꾸 넘보아서다. 토르는 방어자다. 길가메쉬와 토르의 도끼질, 망치질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두 영웅 모두 숲의 살해자라는 점에서 농경과 도시, 국가의 탄생을 예고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따라 걸어갈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지도를 그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게오르크 루카치,《소설의 이론》). 어디에서 시작할 것이며 어디에서 끝낼 것인가? 수많은 장애물들은 어떻게 발견할 것이며 다양한 지세(地勢) 속에서 살 길은 또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모노노케 히메》는 아시타카에게 이와 같은 미션을 부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에고이즘의 신
신과 인간의 대전쟁이다. 우선 신의 죽음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과연 신은 왜 죽는가? 어떻게 죽는가? 먼저 아시타카가 재앙신 나고를 죽인다. 숲의 나무를 하나하나 쓰러뜨리면서 에미시 마을에까지 이르는 멧돼지-재앙신 나고는 몸의 온 구멍으로 뱀장어같은 증오를 뿜어내었기 때문이다. 나고가 지나다니는 모든 곳은 풀이 썩고 사람이 죽는다. 나고의 노란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나고의 막힌 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을 가로막으며 몇 번이나 말했다. ‘진정해요, 마음을 가라앉혀요.’ 하지만 나고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더욱 빨리 돌진할 뿐이었다. 그런 채로 마을로 돌진하려 했기 때문에 아시타카는 그의 눈에 화살을 쏘지 않을 수 없었다.
들개의 신을 비롯, 규슈 지방의 맷돼지 신 옷콧토누시, 그리고 사슴신까지를 모두 죽이는 이는 타타라 마을의 수장 에보시다. 그녀는 강력한 화승총으로 동물의 신들을 가리지 않고 죽인다. 에보시는 모두를 벌벌 떨게 하는 사슴신 앞에서조차 꿈쩍도 하지 않고 그 목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있다. 그 어마무시한 공격력이 나고의 돌진하는 힘과 맞먹는다. 불타는 에보시의 눈빛, 붉게 빛나는 에보시의 입술! 재앙신이 된 나고의 검붉은 몸만큼이나 에보시의 몸도 피처럼 붉다. 에보시도 무척 큰 분노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죽임을 당하는 자나 죽이는 자 모두 엄청나게 화가 나 있다. 둘 모두 상대를 이빨로 물어 뜯으려 하면서도 망설임과 미안함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의 수호자인 숲의 신과 문명의 방어자인 인간 사이의 대결 구도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노노케 히메》는 숲과 마을을, 자연과 문명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숲의 주재자인 사슴신을 두고 맞서는 이들은 에보시와 숲속 동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사슴신 때문에 적대 관계에 들어섰다고 보기 어렵다. 에보시에게는 신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크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슴신이 죽으면 그를 따르는 동물들의 기세도 꺾일 테고, 큰 방해 없이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쓸 수는 있다. 또 사슴신의 피가 병자를 치유해준다고들 하니 마을의 한센병 환자를 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에보시에게 사슴신은 마을의 안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에보시는 성능 좋은 총을 만들어 도시 사람들에게 팔아 쌀을 얻어 와야 하는 중요한 미션이 있다. 총을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 철을 녹이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니 숲을 벤 것이다. 신의 살해가 아니어도 방법이 있다면 에보시는 무리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을 테다. 사슴신의 목을 따서 왕에게 가져가려는 이는 비밀조직의 승려 지코다. 그에게는 사슴신의 목이 필요 없다. 지코는 자신이 모시는 왕이 사슴신을 원한다고 하니, 다만 그 뜻을 따랐을 뿐이다. 성실한 공무원 타입인 것이다. 에보시는 사슴신의 목이 불로불사의 명약이라고 믿지 않았음에도, 왕이 제철권을 확보해줄 것임을 믿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굳이 신의 목에 총을 겨누었다.
이렇게 보면 숲과 인간의 대립이라고 하지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에보시나 지코도 사슴신과 굳이 대립할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사슴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자기가 어떤 대상을 향해 분노를 태우는지를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는 이들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번에는 숲속 동물들 쪽을 살펴보자. 재앙신이 된 멧돼지 나고, 규슈의 옷코토누시, 들개의 신인 모로와 그의 자식들은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특히 모로와 그의 아들, 딸인 모노노케 히메는 단 하룻밤도 예외 없이 타타라 마을을 공격하는 모양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에보시를 죽일 수 있다면 자기가 죽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다. 동물들은 사슴신을 지키기 위해 에보시의 군대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에보시에 대한 증오를 푸는 것이다. 이 증오를 푸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멧돼지들은 자신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아시타카의 총상을 치유해주었다는 이유로 사슴신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내가 미워하는 이를 나의 신이 돕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은 고기가 되기보다는 자존심을 잃지 않은 채로 죽기를 원하며 장렬하게 모두 에보시의 총구를 향해 달려갔다. 너의 먹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동물들 역시 사슴신의 뜻을 헤아릴 생각은 하나도 없다.
에보시의 타타라 마을 사람들과 숲속 동물들은 닮았다. 양쪽 모두 엄청나게 화가 나 있고, 상대가 없어져야 자존이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네가 없어져야 내가 산다는 결론을 붙들고 한 치의 의심 없이 적의를 불태운다. 둘은 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아니, 자기들만 존귀하고 자기들만 살아 있어야 하니 그들에게는 ‘자기’가 신이다.
일신교적 세계관이란 단 하나의 신을 절대적으로 숭배한다. 그 바탕에는 나의 신만이 전적으로 옳다는 생각이 작동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신교적 세계관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보시도 동물들도 벌주지 않는다. 신은 죽을 수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신이 죽어서는 안된다’는 그 맹목이다. 작품의 콘티 단계에서나 제작 중반을 넘어갔을 때 스튜디오에서는 에보시나 지코가 벌을 받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미야자키는 두 사람이 전쟁에서 지고 후회를 하는 듯한 장면은 넣지 않기로 했다. 이 영화에서는 옳고 그름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선한 신’의 자리야말로 필요 없기 때문이다. 후회와 반성을 할 수 있는 정의의 지평을 붙들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아시타카가 재앙신 나고를 죽이고, 에보시가 사슴신을 죽인다고는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야말로 유일신 사상을 끝내려 한다.
죽는 자가 죽인다
미야자키는 전쟁을 각자 자기를 신으로 모시는 이들의 싸움이라고 한다. 《모노노케 히메》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고 하는 인류사적 사건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종교전쟁을 다룬다.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탐구가 아예 없는, 유일신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전쟁 말이다. 과연 이 싸움은 어떻게 종식될 수 있을까? 유일신적 사고를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장판의 한 가운데에서 이상한 전투를 치르는 자가 있다. 맑은 눈의 소년 아시타카다. 아시타카는 사슴신을 쏘아 쓰러뜨린 에보시가 죽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아시타카의 팔에 증오의 문신을 새긴 자가 바로 에보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아시타카는 옷코노누시에게 먹혀 증오의 힘으로 빨려 들어간 원령공주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 다시 원망의 화염에 노출되면 자신도 재앙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 아시타카는 평화의 화신인가? 그것도 아니다. 아시타카가 재앙신으로 변한 맷돼지 나고의 한쪽 눈을 쏜 것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몸을 던져 막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증오의 신을 최고로 빨리 멈추게 하는 방법은 활쏘기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아시타카도 신을 죽인 자라는 점에서는 에보시와 다르다 할 수 없다. 따지고보면 아시타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원령공주보다는 에보시에 가깝다. 그는 재앙신이 된 나고를 쏘아죽인 탓에 그 재앙을 받아 한쪽 팔을 잃는다. 에보시도 사슴신을 쏘아 죽은 뒤로 늑대에게 물려 한쪽 팔을 잃는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전쟁은 장기나 바둑처럼 같은 테이블에 앉아 공유된 규칙을 놓고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벌이는 진퇴양난의 싸움이며, 여기서는 이기는 자도 지는 자도 없다. 자기 목적을 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바로 자신이 망가진다. 아시타카와 에보시 모두 팔을 잃고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사슴신의 몸이 대지 위로 쓰러지면서 온누리에 생명의 기운이 다시 감돌 때 아시타카 팔에 붙은 저주는 약해진다. 아시타카는 신이 자신을 회복시켜주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잘 보면 그는 다 낫지 않았다. 아시타카는 증오에 다시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시타카는 어떻게 적대의 신학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아시타카는 증오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서쪽이다. 재앙신이 서쪽에서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시타카는 나고가 누구의 총에 맞았는지를 알아내어 대신 복수를 할 생각도 있었다. 도중에 숲의 모든 일을 주재하는 사슴신에게 찾아가 저주를 풀 방법을 물을 수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런데 돌아다녀 보니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겨우 찾아간 타타라 마을의 소물이꾼은 목숨을 걸고 쌀을 구해 성 안으로 돌아와야 했고, 마을 사람들은 늦은 밤까지 철을 만들고 총기를 개발하기 위해 쉬지를 못했다. 이들은 성실한 일꾼들이고 웬만해서는 타인들에게 악한 일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철을 만들어야만 쌀을 얻을 수 있고, 쌀을 얻어야만 떳떳히 자기들 터전을 꾸릴 수 있으며, 그 철로 인근 성주들의 간섭과 박해로부터 자주권을 지켜낼 수 있다. 생존의 절박함에 갇힌 채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숲을 베면서 동물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다. 타타라 마을에서의 저녁 식사 시간에 사람들은 아시타카 주위에 몰려 앉아 멧돼지 나고를 총을 쏘아 죽이게 되었을 때를 자랑한다. 이때 아시타카의 왼쪽에 앉은 머리가 조금 벗겨지고 콧수염이 난 중년의 아저씨가 인간이 나무를 베고 숲을 해쳐 멧돼지의 원한이 깊어진 점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러나 그 틈을 주지 않고 저편에서 누가 몸개그를 한다. 미야자키의 절묘한 시점 이동이다. 미야자키는 숲에 대한 애도가 나올 법한 자리를 금방 개그판으로 바꾸는 사람들의 도덕심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들 틈에서 아시타카의 저주받은 팔은 분노로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 타타라 마을의 총기 기술자들은 모두 한센병 환자들이다. 이들은 짓물이 흘러내리는 피부를 흰 붕대로 겨우 감싸 막고서 최후의 생명력을 짜 총기 기술을 높인다. 그들이 비참한 운명에 대한 절망을 딛고, 조금이나마 마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애쓴 결과가 멧돼지와 아시타카를 재앙신의 먹이로 만든 총알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숲과 동물들을 죽이고 끝내는 인간에게까지 총구를 겨누는 죽음의 화신인 것이다. 남을 죽이면서 남들처럼 살고 싶어하는 모순에 찬 존재들이다.
저주를 몰고 온 이들은 악하지 않다. 그들도 결국 원한 속에서 죽어가리라. 하지만 되도록 끝까지 살려고 한다. 이런 아이러니가 비밀 정원의 모습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에보시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비밀 정원에서 약초를 재배하기도 하고 닭도 키운다. 특히 환자들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는 밤에도 노랗게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들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다. 총알을 키우는 정원에서 풀과 동물이 자랄 뿐만 아니라 그런 저주받은 삶을 축복이라도 하듯 꽃이 피어 있다.
구원은 이해로 닦는다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이들에게 복수할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에미시 마을을 떠났을 때, 샤먼 할머니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될 운명을 바꿀 수는 없으리라고 했다. 이때 아시타카는 덤덤히 그것을 각오했다고 말했다. 다만 왜 그렇게 재앙에 먹혀 죽어야 하는지, 신에게 물어 이유를 알면 살아갈 다른 방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서쪽으로 운명의 방향을 틀었을 뿐이다. 사태의 인과를 알고보니 더 막막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타카의 눈에 어떤 장면이 들어 온다. 바로 제철소의 일하는 여성들이다.
제철소는 에보시가 거리에서 구한 여인들의 일터다. 5일 낮밤을 꼬박 열 명 이상씩 풀무질을 해야 겨우 불씨를 피울 수 있는 곳이다보니, 늦은밤까지 교대로 땀 흘리며 일해야 한다. 그런데도 제철소에서는 끊임없이 노동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화염의 산실이라지만, 따지고보면 여기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타타라 마을 밖에서는 끝도 없는 천시와 차별을 받던 이들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부정탄다며 만질 수도 없게 하는 철이, 여기서는 여성이 아니면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이 되어 있다. 여성들은 타타라 마을에서는 배를 곯지 않아도 되고, 남자들에게 구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 총은 여성들의 자존심과 활기를 회복시켜 주었다.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자를 찾으려 했다. 그들을 보니 끝없이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도 저주받은 불쌍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미야자키는 아시타카 마음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아마 아시타카는 함께 고통을 나누며 어떻게든 살 길을 만들려는 이들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꼈으리라. 에보시의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제철소의 열린 문 앞에 머물렀는데, 숲을 향한 증오를 태우는 에보시를 만나고 나서는 더욱 마음이 갔는지 아예 일터로 걸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아시타카는 윗옷을 벗고 이들과 함께 풀무질을 한다.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총이고, 자신이 그 화를 입어 지금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총을 만들지 말라고는 할 수 없고, 풀무질을 하면서 갖게 된 삶에 대한 자신감을 거두라고도 할 수 없다. 아시타카는 이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는다. 선악이 따로 없으나 증오만 남은 상황 속에서 해야 할 일은, 저주받은 이들끼리 함께 손을 모으는 것뿐이니까.
신의 살해와 함께 아시타카의 여행이 시작된다. 만약 재앙신의 습격이 없었더라면 아시타카는 동쪽 마을의 추장이 되어 마을을 이끌며 평화롭게 일생을 마무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주를 입은 덕분에 서쪽으로의 여행을 하게 되고 타인을 해치면서 자신의 안녕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픈 숙명과 난폭한 신들의 헤아릴 길 없는 분노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증오 없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지만, 미워하는 이들끼리도 함께 살 길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런 아시타카 덕분에 타타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인 멧돼지 시체 속에서 겨우 숨이 붙어 있던 들개를 구할 수 있게 되고, 불의 여인 에보시는 더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며 자기 화를 누르게 된다. 사슴신이 죽기는 하지만 온 누리에 새로운 풀이 돋아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원망으로 똘똘 뭉쳐 있던 모노노케 히메의 마음에 따뜻한 사랑이 깃들게 되기까지 한다.
증오의 전쟁을 멈추는 길은 심판자를 찾는 데에 있지 않다. 모노노케 히메는 말한다, 인간은 싫지만 아시타카는 좋다고. 에보시의 입장에서 보면 숲이 여전히 싫을 수 있다. 하지만 숲의 공주를 좋아하는 아시타카에게 목숨의 빚을 졌기에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선악을 결정하는 초월적인 시점에서 보면 온통 착한 사람, 나쁜 사람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까이 더욱 자세히 보면 다 그럴 만한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고, 그 한계에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음이 드러난다. 신의 죽음이란 초월자의 시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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