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돼지》 ③캐릭터
선글라스와 양복의 저주
얼굴은 돼지인데 몸은 양복을 입은 신사!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의 괴상한 캐릭터 중에서도 으뜸이다. 마법 때문에 변신하는 계열로 따지자면 키키(마음의 변신)가 앞서고, 이후로는 인간이 되고 싶은 물고기 포뇨(몸의 변신)가 있다. 붉은 돼지는 위아래가 상이한 종(種)으로 종합되어 있는 캐릭터로는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왜가리 남자와 가장 가깝다. 왜가리 남자는 하체는 새인데, 위로는 왜가리와 인간의 탈을 번갈아 쓴다. 변신체, 반인반수, 이러한 독특한 조합을 통해 미야자키가 풀어보려한 문제는 무엇인가? 인간은 왜 돼지가 되며, 돼지는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돼지코와 검은 구멍
붉은 돼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얼굴에 있다. 돼지이니까 코가 결정적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문제는 눈이다. 《붉은 돼지》에서 오직 그만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미야자키의 영화 중에 안경을 낀 자가 또 있던가? 《바람이 분다》의 지로가 있다. 그는 근시이기 때문에 조종사가 될 수 없어서 결국 비행기 설계사가 된다. 지로를 통해 검토해본다면,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비행은 멀리 볼 줄 아는 즉 목적을 설정하고 비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인간일 때는 평범한 안경조차 쓰지 않았던, 맑고 큰 눈을 지닌 청년은 왜 선글라스를 쓰고 돼지가 될 수밖에 없었나? 돼지의 선글라스는 그가 목적을 상실했음을 말해준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얼굴은 중요하다.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양육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어떤 아들로, 어떤 학생으로, 어떤 직장인으로서 자기를 만들어간다. 인간에게 얼굴은 자기를 특정한 문화의 주체로 만들기 위한 도구다. 동시에, 자기와 마주하는 이에게 특정한 모습이 되기를 요구하는 장치이다. 그러니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는 눈이다. 표정의 공명이란 결국 눈빛의 교환이기 때문이다(알폰소 링기스,『낯선 육체』참고). 야생의 부족들이 성공적인 수렵이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신의 가면을 쓰고 멋진 춤을 추며 의례를 했던 것은 가면의 눈을 통해 만물의 주재자인 신과 대면하려 해서다. 눈은 자신과 마주하는 상대의 눈과 끊임없이 의미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관계 속에 묶어 낸다.
포르코는 선글라스를 낀다. 그렇게 누구와도 직접 공명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그 ‘누구’란 누구일까? 바로 파시스트다. 그가 도시에 상륙하자마자 감시의 눈총을 쏘았던 경찰들을 떠올려보자. 붉은 돼지는 모두가 한 방향만 바라보고 같은 노래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감시자들의 눈빛에 호응하지 않았다. 애국은 인간들이나 하는 거라며 냉소할 때, 그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인간들과는 눈빛도 교환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셈이다. 이런 공명 거절의 장치는 다음 작품 《모노노케 히메》에도 나온다. 인간에게 버려지고 늑대의 품에서 자란 원령공주는 세 개의 구멍이 뚫린 괴기스러운 붉은 가면을 하고 나타나 제철 마을 사람들과 싸운다. 원령공주는 가면을 쓰고 인간과는 마주하기 싫지만 늑대일 수도 없는 자신의 모호한 처지를 표현한다.
그런데 선글라스 쓰기에는 함정이 있다. 포르코는 지나의 호텔 레스토랑 구석에서 혼자 밥 먹을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못한다. 붉은 돼지의 상태로는 적과 대립하지 않아도 되지만 연인과 대면할 수도 없다. 붉은 돼지는 선글라스를 쓰면서 미워하는 이들의 세계로부터도 사랑하는 이들의 세계로부터도 도망쳤던 것이다. 결말에서 포르코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안경알이 깨져 눈이 드러난다. 이것은 맞아서 퉁퉁 부어 있을지라도 그에게 어떤 방향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원령공주도 결국 가면을 벗고 맑은 눈을 지닌 아시타카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봐주는 아시타카의 맑은 눈에 응답하면서 말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도 거절해야 한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악의나 부정을 직시하는 가운데 마주하고 싶은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구겨진 옷과 펴진 얼굴
붉은 돼지라는 괴물의 성격은 양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흥적인 자기 욕망에만 충실하느라 애초에 애국이니 뭐니 어떤 방향도 설정하지 않았던 해적들은 선글라스를 낄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비행기 외관을 장식하거나 뭔가 화려하고 멋있는 옷이나 음식을 쫓기는 하지만 잘 씻지를 않았다. 포르코도 피오도 해적들이 씻지 않는다는 점을 아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반면 포르코는 잘 씻는다. 피콜로씨의 공장에서 처음 잠을 청한 다음날, 그는 말쑥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깔끔하게 세수를 한다. 뿐만 아니다. 혼자 아지트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때에도 그는 언제든 하늘을 날아오르거나 누구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단정히 비행복을 입고 있다. 돼지로 변신했다고 하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추락했다는 뜻 같지만, 포르코의 양복은 군복보다 훨씬 우아하다. 돼지는 왜 양복을 입어야 했나?
셔츠를 입는다는 것은 집에 다리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복잡하고 정교한 다림질에 시간을 들일 정도로 사회적 관계에 민감함을 뜻한다. 확실히 포르코의 양복은 커티스가 지나에게 청혼하려고 입은 자뻑의 흰양복과도 다르다. 물론 공군의 군복과도 다르다. 포르코의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빨간 넥타이는 비행에 대한 자신의 꿈이 모두의 꿈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을 암시한다.
여기서 서양 복식사에서 양복이 차지하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다. 작품 속에서 포르코는 여성이 공장에서 일한다거나 소녀가 비행기를 설계한다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에 대단히 놀랐다. 하지만 이는 포르코가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다. 포르코는 사람들 사이에는 각자에게 맞는 역할이 있고 그런 한에서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감수성이 있다. 게다가 포르코는 피오에게 밤샘을 하지 말라고도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미모를 해쳐서는 안된다는 충고는, 그가 돈이나 일보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건강한 생활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포르코 혼자 사는 아지트에서도 와인이라든가 사과 같은 것을 잘 챙겨 먹고 있다. 그는 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변 사람들이나 환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입은 잘 다린 양복은 자기 삶을 잘 가꾸면서 어른이나 아이, 여성이나 동료와 같이 주변에 튼튼한 관계들을 많이 만들고 싶다는 그의 일상 철학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 양복에도 어떤 한계가 있다. 양복에는 사회적 관계를 중화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성별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다채로운 각자의 처지에서 살아간다. 잘 다려진 양복은 그 각각의 처지를 향해 똑같은 거리를 갖겠다는 의미도 된다. 좋은 말로 하면 모두에게 잘 맞추겠다는 뜻이고 나쁜 말로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야생의 부족들은 신을 만나야 했을 때, 신과 대등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꿀 줄 알았다. 결혼을 할 때, 혹은 장례 때에 다른 옷을 입는 이유는 인생의 국면마다 마주할 대상과 바라보아야 할 문제가 다름을 뜻한다. 포르코는 선글라스를 씀으로써 그 누구와도 시선을 주고받지 못했다. 그처럼 한결같이 단벌 양복을 고수함으로써 그 누구와도 적당한 거리 취하고 있다.
양복의 경직된 관계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작품 초반에 주인공 마히토는 공습으로 불에 탄 엄마의 병원에 가기 위해 급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교복을 갈아 입는다. 미야자키는 마히토가 교복 바지의 지퍼를 올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모자까지 쓰는 소년의 태도를 놓치지 않는다. 도심이 불타고 엄마가 돌아가시는 와중에도 옷을 제대로 갖춰 입으려 하는 모습이 놀랍다. 이런 마히토는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경멸, 형식적으로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듯한 새엄마에 대한 불편함을 애써 누르며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행동한다. 마히토가 돌로 자신의 머리를 찍어 내리누르기 직전, 소년은 학급의 친구들과 심하게 싸워 옷이 찢기기까지 했다. 마히토의 교복은 군국주의의 상징이고, 경직된 사회에서 억눌리는 소년의 모습을 상징한다. 초등학생들끼리 다투고 찢어지는 교복은 경색된 군국주의가 아이들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히토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자각하게 되고, 타인의 삶도 자신의 것만큼이나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미야자키는 그 과정을 소년의 모자가 사라지고 와이셔츠가 구겨지고 벗겨지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마히토가 아랫세계로부터 멋지게 모험을 치르고 돌아왔을 때, 많은 앵무새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얼굴과 몸을 똥으로 더럽힌다. 똥이라지만 먹지 않으면 쌀 수 없고, 먹으려면 누군가를 헤쳐야 한다. 마히토는 그 누구도 순수하게 선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마히토의 새하얀 와이셔츠가 더럽혀지는 과정이 타인과 세계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이해하게 되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포르코의 양복도 너덜너덜해진다. 개싸움 덕분에 바닷물 속에 몇 번이나 들어갔다 나와서다. 그리고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폼이 다 망가진 뒤에, 그는 인간의 얼굴을 찾는다. 《붉은 돼지》는 백설공주 모티프를 갖고 있다. 공주가 왕자의 키스를 받아 마법에 풀리는 장면 비슷한 것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분명 포르코의 마법이 풀린 직접적인 이유는 피오의 볼뽀뽀에 있다. 그러나 피오는 포르코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포르코는 지나를 사랑한다. 포르코에 대한 피오의 마음도 도덕심 높은 한 인간에 대한 감사에 가깝다. 포르코는 친구들이 벌인 경주판에서 실컷 맞아서 그 폼이 다 망가진다, 덕분에 그는 비전을 가진 비행사가 못되더라도 웃음을 주는 비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많은 이들과 하나하나 다 공명하기는 어려워도 그 모두가 함께 웃을 일이 어쩌면 가능하다는 자신을 얻었으리라.
와이셔츠 입기를 권함
양복의 관점에서 하나 더 특이한 점을 언급할 수 있다. 포르코의 옷이 점점 더 지저분해지고 선글라스마저 깨지는 것과는 달리 해적들의 복장이 차차 깨끗해져 간다. 해적들은 처음부터 기름때가 묻은 비행복이나 목이 다 늘어진 셔츠 등을 입고 나왔다. 이들의 비행복은 한번도 빨래가 된 적이 없는 듯 보인다. 해적들도 포르코처럼 파시즘에 동원되기를 거부했다. 이들의 더러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 돌리게 하니 포르코의 선글라스와 같은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포르코가 새햐안 와이셔츠를 입으면서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희망을 계속 가져가는 것과 달리 해적들은 더러움 속으로, 그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쪽으로 더 내달리고 있었다.
이런 해적들이 변한다. 우선 그들의 영웅 피오가 ‘좀 씻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피오는 바다와 하늘에 의해 매번 정화되는 비행사들의 높은 긍지를 칭찬했다. 해적들은 자신들이 진정 꿈꾸던 모습을 봐주는 피오의 격려 덕분에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포르코와의 대결이 있는 날, 해적들은 말쑥하게 줄무늬 양복을 입는다든가 넥타이를 맨다든가 하며 폼을 갖추려고 애쓴다. 작품의 결말에 이르면 지나의 호텔에서 조끼에 네커치프까지 색깔을 잘 맞춰 입고 근사한 모습으로 앉아 잡지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있다. 해적질로 부자가 되어서 근사한 이탈리아제 명품 양복을 걸치게 된 것이 아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이들이 타인의 칭찬과 격려에 의미를 두게 되자 참으로 멋진 스타일리스트가 되었다. 해적들에게는 파시스트들의 눈을 피하는 것보다 자기다운 삶을 고민하는 일이 더 어려웠나보다.
미야자키가 그리는 다른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옷을 자주 바꿔 입는 경우는 드물다. 제일 많이 갈아입은 이는 마법사 하울 정도다. 옷을 자주 바꿀 수 없는 이유는 작중에서 성격이나 분위기가 계속 변하고 있는 캐릭터의 동일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기 위해서이고, 작업적으로만 보면 어떤 애니메이터가 그리더라도 비슷한 정도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확실히 《붉은 돼지》의 의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관계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입느냐는 결국 누가 앞에 있는가가 결정한다. 인류의 모든 장신구는 전부 타인에게 보일 자신의 덕을 뽐내기 위한 과정에서 나왔다. 개성 있는 주체성이란 어떤 이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다. 자기만의 욕망 따위, 눈을 들고 상대를 찾아다니는 인간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붉은 돼지》의 끝에 피오는 포르코가 지나와 사랑을 이루었을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포르코는 지나와 함께 어디 멋지게 비행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언제나 아뜰리에나 스튜디오에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이셔츠만 보면 양복 입고 폼을 잡는 포르코가 떠오른다. 하지만 미야자키에게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언제라도 물감이 튀어도 좋은 앞치마이다. 애니메이터의 작업복이다. 여기에는 앞주머니도 있어서 메모지나 볼펜 등이 들어가 있다. 가끔은 손을 넣고 쉬기에도 좋다. 어쩌면 담배가 들어 있을지도? 깔끔한 양복과 얼룩진 앞치마의 멋진 조합이야말로 막 인간의 얼굴을 되찾은 포르코의 운명애를 떠올리게 한다. 선명한 비전이나 확실한 능력이 없어도 좋아! 함께 웃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존중하자. 상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밤으로 구겨지지만 아침에는 펴질 와이셔츠를 입자.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증오를 이기는 흔들림 (2) | 2024.02.01 |
---|---|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신은 죽었다 (0) | 2024.01.25 |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자연과 문명의 저편 (3) | 2024.01.18 |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하늘이 웃는다 (0) | 2024.01.04 |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섬들의 바다, 자율의 하늘 (0) | 2023.12.28 |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청소는 나의 운명 (0) | 2023.1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