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② 사건
그림자 노동 – 거식증과 폭식증 치유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핵심 사건은 부모 구하기이다. 전세계의 신화에는 부모를 살해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부모를 구한다는 이야기도 많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로 거인족 부모들을 살해하고 신들의 왕이 되는 그리스의 제우스 신이나 북유럽 신화의 오딘 신, 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로는 우리 전래동화의 《바리데기》가 있고, 눈먼 아비에게 빛을 주기 위해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이가 있다. 인류의 신화는 부모의 입장에서 미션을 전개하지 않고, 자식의 입장에서 과연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에 관해 탐구했다. 이때 부모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부모라는 의미이지만 폭넓게 해석하면 만물의 근원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부모 살해담도 있는 모양이니, 이야기의 차원에서만 따지고 보면 부모라고 해서 꼭 구할 의무가 있는 문제는 아니다.
치히로는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기 위해 저편 세상에서 전력질주한다. 부모는 왜 돼지로 변했을까? 그들은 어떤 부모였을까? 단순하게는 주인 허락 없이 식당 음식을 먹어서다. 복잡하게 해석하면 현금이라든가 신용카드 따위를 믿고 자기 마음대로 남의 음식에 손을 대는, 경우를 모르는 무뢰한들이다. 이삿날인데도 테마 파크 같은 곳에 들어왔다며 차에 두고 온 샌드위치 타령이나 할 정도로 누구 부려 일하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으름뱅이들이다. 이 부모는 똑같이 이사 가는 집 이야기인 《토토로》의 부모와 비교하면 자식 걱정보다는 자기 안위가 더 중요한 이기적인 어른들로까지 보인다. 신들의 세계로 넘어가는 터널에서 무서워 팔을 꼭 잡는 치히로를 향해 엄마는 방해되니까 알아서 걸으라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악한 부모라고도 할 수 없다. 육아에 치였을 수도 있고, 이사 당일이니까 특히 엄마는 많이 피곤했을 수 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요즘 세상에 비춰보면 그리 상식을 벗어났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렇게 보통의 상식을 가진, 약간 무례한 사람들을 돼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상식은 엄청난 저주가 되어 자식을 잡고, 그들 자신도 죽어 마땅한 처지로 내몬다. 이런 돼지는 서둘러 작품 밖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좋다. 미야자키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치히로가 주인공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빨리 하라고 되풀이해 외치거나 친근하게 비위를 맞추는 부모님 밑에선 아이들이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없어도 아이는 자란다’입니다. ‘부모가 있어도 아이는 자란다’란 사람도 있지만 …….(『반환점』, 220쪽)
치히로는 목숨을 걸고 부모를 구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흥미롭다. 그림자 노동이다. 지금부터는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 왜 허드렛일을 해야 했으며, 그 원인으로서의 부모 죄에 대해 생각해보자.
밑바닥이 장땡
치히로는 부모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누가 건 저주인지, 어떤 인과의 결과인지 10살의 아이가 그것도 신들의 세계에 떨어져서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미야자키는 문제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사태가 발생한 인과의 장을 넓고 깊게 조망하는 일이라고 한다. 부모가 돼지로 변하자마자 치히로가 온천장의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를 한번 쭈욱 둘러보게 하기 때문이다. 치히로 모험이 온천의 제일 말단 임부가 하는 일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천장 꼭대기에 있는 유바바를 만나려먼 온천장 맨아래를 공략하라는 말은 《라퓨타》에 나오는 해적 도라의 타이거 모스라는 비행선을 떠오르게 한다. 타이거 모스에도 해적 대장 도라와 엔진 수리공 두 사람이 비행선의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엔진 수리공 할아버지의 외모는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이 없는 부분이 딱 가마지 할아버지와 닮았다. 단 하나 가마지 할아버지에게 많은 다리가 있었다는 점을 빼면.
치히로는 하쿠의 조언을 따라 먼저 어마무시하게 큰 온천장의 맨 하단부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멋지게 제시된 바 있는 스팀펑크 스타일의 용광로다. 나는 우연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화면을 끄고 소리만 들은 적이 있는데, 특히 이 가마터에서 나는 엄청난 소음 교향곡에 깜짝 놀랐다. 용광로를 향해 검댕먼지들이 숯덩이를 하나씩 옮기는 것, 가마지가 약초를 달이면서 위에서 내려오는 티켓으로 온천물을 따로 공급하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리듬감 있게 박자를 맞추어 돌아가고 있었다. 가마지 할아범이 약초를 갈기 위해서 처음에 어깨에 힘을 바짝 주었다가 다시 긴장을 푸는 팔동작에도 리드미컬한 율동감이 확실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용광로의 거대 증기기관들 톱니들에서부터 검댕먼지와 가마지의 사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속들이 함께 잘 맞물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치히로는 이 질서를 해치는 것의 위험도 경험하는데, 처음에 가마지에게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할 자리조차 찾지 못했던 것이다. 검댕먼지들은 길을 방해한 치히로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겨 신경질이 났고, 약초 정리함을 뒤적여야 하는 가마지는 아무렇게나 서 있는 치히로의 위치가 방해가 되어 초조해졌다. 이때 치히로는 부모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배 채우기에 바빠 전체 온천장의 질서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했던 부모는, 가마터에서조차 자기 자리 찾기가 힘들었던 치히로처럼 돼지로 변해 그 장에서 쫓겨나야 마땅한 것이다.
치히로는 온천장 외벽을 타고 1층에서 가마터까지 한참을 내려왔다. 그 이상을 올라가야 맨 꼭대기에서 유바바를 만날 수 있다. 최하단부가 이토록 정미롭게 맞물려 돌아갈 정도라면 온천장의 각 층들은 어떤 수준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또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유바바는 얼마나 거대한 능력을 지닌 마녀일까? 치히로는 온천장 바닥에서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규모에 놀랐을 테다. 관객도 알 수 있다.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천장 전체의 질서, 더 나아가 신들이 쉬러 오는 이 세계 전체의 질서를 먼저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입부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장면이 있다. 가족이 터널을 지날 때 아빠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미야자키는 치히로의 눈높이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그린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커 보이는 이 아버지의 모습에 주목하자. 그런데 부모가 꿀꿀 돼지로 변할 동안 잠깐 온천장 앞을 돌아다닐 때, 치히로가 ‘油’라고 쓰인 석등을 올려다보는 부분이 있다. 이때 화면은 보통 이상으로 높은 위치에서 치히로를 내려다보는 샷을 취한다. 우리는 내 눈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서 보면 뭐가 보이는지를 가끔씩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내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돼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 눈높이를 넘어서려면 일단 내 발 아래로 깊이 들어가보아야 한다. 나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의 크기를 어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미션은 크게 보면 이 세계의 법칙에 익숙해지기이다. 유바바와의 일자리를 놓고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온천장의 구성원이 되어 그 세계의 질서를 익히게 됨을 의미한다. 이 질서에 따라 부모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그런데 유바바와의 계약에 성공하려면, 알게 모르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차례대로 읊어보자. 우선 기억에도 없는 하쿠가 하필 유바바 온천장에서 미리 와 일하고 있어야 하는 우연이 필요하다. 하쿠가 짠 나타나 경단도 주고 취직의 비밀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치히로도 센도 존재할 수가 없다. 하쿠 다음으로 치히로를 도와준 이는 검댕먼지다. 물론 치히로가 과로로 지쳐 쓰러진 검댕먼지를 먼저 돕기는 했지만, 일자리 없다며 쫓아내려는 치히로를 온몸으로 지켜준 검댕먼지가 없었더라면 가마지 할아범도 따뜻하게 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리라. 가마지는 치히로의 근성과 그들 친구의 응원을 보고 소녀가 자기 운을 시험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껴둔 도롱뇽 과자까지 린에게 주며 유바바의 사무실까지 안내를 부탁한다. 린은 물론 이 맛나는 과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치히로가 무사히 계약에 성공하고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한 것으로 보아 크게 위험하지 않는다면 적당한 선에서 치히로를 도울 준비는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치히로를 도와준 이로 ‘무의 신’과 유바바의 아들 보우가 있다. 이들이 문제적이다. 무의 신은 2층에서 내리면 될 텐데, 유바바의 꼭대기층까지 함께 올라가서 잠깐 내려 위험하지는 않은지 봐주는 아량을 베푼다. 그런데 실은 자기가 가던 길을 조금 더 돌아갔을 뿐이다. 단지 자기 하는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그 하얗고 큰 몸으로 다른 종업원들에게 치히로가 발각되는 것을 막아줄 수 있었다. 역시 거대한 몸집의 보우는 한창 걸을 만한데도 유바바의 과보호 아래 침대방에서 뒹굴고 있다 난장을 피웠다. 그 덕분에 정신 없는 틈을 타 유바바가 치히로에게 일자리를 허락하고 만다. 무의 신처럼 보우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치히로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돕게 된 것이다. 미야자키가 무의 신이나 보우를 치히로의 길에 끼워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상대의 무조건적인 헌신으로부터도 인생길에 도움을 받지만, 상대의 무의지적인 행동 덕분에 일이 풀리는 경험도 얼마든지 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치히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무의 신이나 보우가 치히로를 도울 의도가 없었으니 그들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무의 신이나 보우는 하쿠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치히로는 자신이 이렇게 많은 도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파악했다. 부모가 돼지로 변한 세상이지만 거기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 하나의 불행을 뒷받침해주는 인연의 사슬은 말 그대로 8만 갈래로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럴진대 어떻게 내 부모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내 처지만 딱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까? 린은 가르친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야 한다고. 어떤 경우도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부모는 8만 신들의 온천장 앞에서 돼지로 변했을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8만의 신이 필요하다. 알게 모르게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때, 그 모든 존재를 신을 대하는 마음으로 다 감사함을 갖고 대할 때, 나는 비로소 이 세계를 돌리는 톱니의 하나로 잘 살아갈 수 있으며, 그 힘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치히로는 나우시카처럼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헌신하지 않았지만, 유바바 오피스까지 이르는 그 짧은 길에서 분명 배웠다. 삶은 어떤 고통과 불행에도 고마운 것이라고.
감사하다면 목욕탕을 씻자
마음으로 고마워하면 안되냐고? 안된다. 온천장이 있는 세계에서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대마왕 유바바도 자기가 뱉은 말을 거둘 수 없으며, 대마왕의 언니 제니바도 남이 한 약속의 말을 함부로 손댈 수 없다. 치히로가 엄살을 부리거나 일 못하겠다고 말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말의 한 조각이라도 튀어나오는 순간 치히로는 돼지가 될 것이다. 신들의 식탁에 음식으로 오를 것이다. 말의 힘이란 감사함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일하겠다는 ‘말’은 지금 이 자리의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겠다는 뜻이며, 이때 일은 곧 감사함이 된다.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마지막 미션은 일하기이다. 그 일은 곧 신들의 목욕탕을 청소하는 것! 센은 신들의 몸을 씻기거나 맛사지를 할 수준도 못된다. 온천물이 깨끗하게 받힐 수 있도록 욕탕 청소하고, 편히 앉아서 쉬실 수 있도록 연회장 마루 닦기가 센이 할 수 있는 최대치다. 하지만 바로 이 일을 통해 치히로는 부모를 구할 수 있는 경단을 얻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로 다음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다시 한번 청소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데, 하울의 성에서 일하는 소피가 주력하는 것은 집안 정리와 요리였다. 치히로의 목욕탕 청소는 무엇을 의미할까?
치히로는 온천장의 제일 막내, 청소하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먼저 린 언니로부터 걸레 힘주어 짜기를 배운다. 그리고 서툴지만 온천장의 마루 바닥을 씩씩하게 두 손으로 기어다니며 닦고(물론 남들보다 느리고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대욕장의 더러운 풀들을 걷어 내고 묵은 때까지 박박 문질러 벗긴다. 미야자키는 이 과정을 한 장면씩 구체적으로 아주 세밀하게 보여준다. 걸레를 짤 때 주루룩 떨어지는 물을 보면 치히로가 가느다란 팔로 용을 쓰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부잣집에서 부모가 뭐든 다 해주었을 것 같은 치히로가 그 전에 걸레를 과연 잡아보았을까 싶지만, 의외로 치히로는 잘 배우고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 단단히 결심을 한 듯하다.
특히 미야자키가 공을 들인 장면은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쓴 유명한 큰 강의 신이 목욕을 할 때다. 치히로는 오물을 둘러 쓴 이 신이 도착하기 전, 욕장에 약물을 내리는 방법을 배운다. 표찰을 가마지에게 내려보낸 뒤 물이 내려올 수 있도록 수도관을 줄로 잡아 당겨 내려야 하는데 탕 주변이 미끄러워 치히로가 몇 번이나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물신이 도착했을 때엔 또, 기포가 뽕뽕 올라올 정도로 찐득해진 흙탕을 헤치고, 진흙으로 미끌미끌해진 펫말을 줄에 겨우 연결해 가마지에게 보낸 뒤 다시 수로의 줄을 당긴다. 이때 치히로는 큰 강의 신의 입에서 더러운 입냄새가 풍겨도 예의를 차려 더럽다 피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줄을 당긴다. 그리고 신의 몸에 깊이 박힌 가시를 뽑기 위해 물속에서 가시에 줄을 묶는데, 10살 소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가시에 묶은 매듭이 단단하다. 그리고 엄청난 힘을 발휘해, 온천장의 모두와 힘을 합쳐, 가시를 뽑아낸다. 이 전체 과정이 얼마나 스릴 있는지 정말 손에서 땀이 난다.
아, 그런데 그냥으로 말하면 마루를 닦고 목욕탕에 물을 받고 누군가의 가시를 뽑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흔하디 흔한, 일상적 일이다. 그렇지만 치히로의 온천장 견습 생활을 지켜보는 일은 그 어떤 모험 활극을 보는 것보다 짜릿하다. 치히로가 물 묻은 풀 때문에 넘어질 때 아찔하고, 맑은 약수를 받아냈을 때 통쾌하다. 그것은 치히로에게 그 일이 처음이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목욕탕 청소 같은, 집에서는 그림자 노동이고 밖에서도 그리 빛나지 않는 단순 반복의 육체노동이 갖는 박력 때문이다. 유바바의 온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곳은 8만 신들이 지쳐서, 단체로 관광버스 같은 배를 타고 하루나 이틀 들러 푹 쉬고 돌아가는 곳이다. 신들도 공무로 바빠 어디 눈 돌릴 틈 없이 과로다. 온천은 신의 휴식을 담당하는 곳, 따라서 신들이 관장하는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의 평안을 기약하는 쉼터이다. 온천장의 직원들이 깨끗하게 닦고 쓸지 않으면, 훌륭한 약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신의 피로는 더욱 가중될 것이다. 임금을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치히로가 맡은 단순한 청소는 신들이 관장하는 거대한 우주를 건강하게 돌리도록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치히로는 열심히 일을 했다고 강의 신에게 ‘고맙구나’라는 인사와 함께 경단을 받는다. 온천장이 월급제 공장인 점을 감안하면 신이 치히로에게 굳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 치히로가 돈 받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치히로는 유명한 강의 신인 줄을 몰랐을 때에도 예의를 갖추었고, 오물신이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전부를 다했다. 오물신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신의 입장에서도 고마운 일이다.
아빠 차 뒷좌석에서 편안히 이사를 할 때 치히로의 얼굴은 띵띵 부어 있었다. 불만투성이에, 새로운 장소로 가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잘 모르는 곳에서 뭔가 눈치를 보며 학교생활 해야 한다는 것도 별로였다. 사랑받아야만 하고 대접받아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듯 자기 앉은 자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치히로가 남을 위해 더러운 진창에서 물러서지 않고 청소를 한다. 자기밖에 모르던 아이가 남들 속에서, 위대하고 훌륭한 신들 속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치히로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욕탕까지 왔다. 그 모든 도움에 대한 감사를 비로소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치히로는 가마터를 나올 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할 줄 몰랐다. 부모와 함께 사는 동안은 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 치히로가 위대한 신에게 ‘고맙구나’라는 인사를 받는다. 이런 관계들로 보면 청소란 만물의 고마움을 인식하는 행위가 된다.
부모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오만이다. 치히로의 아빠엄마는 생일날 받은 한 송이 꽃을 꽃다발에 비교하며 낮추어보는 아이에게 더 이상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치히로가 ‘고맙다’는 말에 익숙해지지 못했던 것은 부모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남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받으며 이 삶을 시작했음을 잊은 자는 돼지라고 말한다. 그들을 구제할 길은 없다. 그들의 자식이 누군가로부터 감사받을 만한 존재가 되기 전까지는.
섭식장애를 고치는 것은 친구
왜 치히로는 강의 신을 구한 뒤, 바로 유바바에게 부모의 저주를 풀어 달라고 할 수 없었을까? 치히로는 부모의 무례함에 대한 되갚음을 했다. 강의 신을 구할 정도면 온천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부모의 무례는 되갚았지만, 치히로 그 자신이 받은 도움을 돌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치히로는 부모가 아니라 자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맨 처음 신의 나라에 온 치히로를 무조건 도와 준 하쿠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하쿠를 구하는 과정에서 치히로는 가오나시라는 얼굴 없는 요괴도 살리게 된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가오나시가 치히로를 위해 좋은 약물의 팻말을 몰래 많이 주었고 그 때문에 치히로가 강의 신을 구하게 된 뒷 사정이 있었다. 사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 놓고 커플상을 주자면 ‘유바바-제니바’ 마녀 자매, ‘보우-까마귀’, ‘가마지-린’ 이런 다양한 조합이 노미네이트 되겠지만 무엇보다 ‘치히로-하쿠’가 수상을 해야 마땅하다. 둘은 ‘트루 러브’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봉 후 캐릭터의 성공면에서나 다양한 굿즈 제작과 판매의 면에서나 ‘치히로-가오나시’가 압도적으로 당선이다. 그만큼 가오나시와 치히로의 케미가 좋다.
치히로는 어떻게 하쿠와 가오나시를 동시에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둘 모두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도 이유지만 둘이 갖는 공통점 때문이다. 치히로는 빼빼 말랐다. 아빠의 배가 빵빵하고 무거웠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딸로서는 지나치게 말랐다. 이 정도로 마른 사람이 바로 하쿠다. 린 언니도 말랐지만 딴딴해 보이고, 유바바나 제니바는 풍만하다. 그런데 이런 외형에 속으면 안 된다. 처음 치히로는 뭘 잘 먹지를 못했다. 신의 나라에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변이 두렵고 걱정이 많으면 거식증에 걸린다.
반면 작품 속에서 폭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빠와 가오나시다. 가오나시가 ‘외로워, 외로워’ 하는 것을 보면 폭식증은 외로움과 관계되나보다. 주변에 친구도 적도 없고, 서로 돕고 도와줄 일도 없는 그런 존재가 폭식을 한다. 치히로가 가오나시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은 강물의 신으로부터 받은 경단으로 토를 하게 만들어서다. 그런데 이 경단으로 하쿠 역시 토를 해서 저주받은 제니바의 도장을 토해낼 수 있었다. 하쿠가 도장을 삼키게 된 것은 유바바의 주술 때문이라지만, 마법사가 되려는 목표로 유바바에게 영혼을 판 덕분에 하쿠 역시 친구도 적도 없이 시키는 일만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었다. 마른 하쿠의 몸속에는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는 하쿠의 외로움을 대신 채워주는 엄청난 주물이 들어 있어서 더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하쿠 역시 항시적인 폭식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배 안이 마법사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터지는 중이라, 다른 것은 무엇도 넣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엄청나게 배 안에 든 것을 토해내는 존재는 강의 신이다. 이렇게 친구도 적도 없는 이들이 마구 버린 쓰레기가 강으로 흘러들어 신을 엄청난 거식증 환자로 만들었다. 치히로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강의 신이 정화할 수 있도록 도왔고 그 덕분에 경단을 받았다. 그 경단을 억지로 하쿠에게 먹이고 가오나시에게 먹여, 둘 모두를 토하게 했다.
미야자키의 분석에 따르면 폭식증도 거식증도 가족과 친구의 중요함, 더 넓게는 8만 신들의 고마움을 잊은 자가 앓는 병이다. 그런데 치히로는 점점 더 잘 먹게 된다. 하쿠의 경단에서 시작해, 린 언니의 찐빵, 제니바의 케이크와 차까지. 특히 늪 마녀 제니바가 소박하지만 우아한 찻잔 셋트에 치히로와 그의 친구들을 대접한 것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에 치히로는 격식을 갖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마녀와 가오나시와도 한 테이블에서 친구로 맛있는 것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8만 신들이 깨끗하게 목욕을 할 수 있는 온천장에 작은 힘을 보태며 감사의 기운으로 자신의 오만을 씻었기에 잘 먹는 사람이 되었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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