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다다, 우다다
글_경덕(문탁네트워크)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잔디는 새벽이생추어리의 두번째 입주자다. 나는 잔디가 실험용 돼지로 키워지다가 새벽이생추어리에 입주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새생이(운영활동가)로 오래 활동해온 무모의 목소리를 통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고은 새벽이는 2020년 여름 종돈장에서 오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잔디는 언제 <새벽이생추어리>에 오게 되었나요?
무모 잔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2020년 가을이었어요. 새벽이가 다니던 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의약 회사에 있었던 실험 동물 돼지가 탈출하려다가 기구 같은 게 쓰러져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요. 병원에서 잔디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 회사에 할당된 예산이 있었겠죠? 수술하고 나서도 빨리 회복이 안 되니까 병원에서 안락사시켜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데려가 줄 수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잔디가 <새벽이생추어리>에 함께 하게 되었어요. 잔디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2020년 가을, 겨울 동안 실내 생활을 하다가 2021년 2월에 <새벽이생추어리>에 왔어요. 그때는 잔디도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고 이빨도 더 많이 튼튼 해지고 그랬던 상황이었어요.
- 김고은, 『함께 살 수 있을까』 무모 인터뷰 중
돼지와 돼지
작년 7월에 처음 만난, 무더운 여름 날의 잔디가 떠오른다.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잔디가 꾸우 꾸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살아 있는 돼지와의 첫 만남에 나는 조금 벅차올랐다. 잔디는 처음 보는 인간에게도 금새 곁을 내어주며 보들보들한 코를 들이밀었다. 잔디는 다리를 쭈욱 펴고 일어섰을 때 머리 끝이 겨우 내 무릎에 닿을 정도로 작고 아담했다. 쪼그려 앉아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반짝이는 눈망울과 씰룩이는 코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토마토를 먹기 좋게 조각을 내어 잔디에게 건내주었다. 내 손가락까지 씹을까봐 살짝 움찔했지만 잔디는 당연히도 음식과 음식 아닌 것을 잘 구별했고 토마토만 입 속에 쏘옥 넣어 오물 오물 잘 씹었다. 잔디는 저녁식사 후에 미강 섞은 물까지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흙바닥에 털썩 누웠다. 가까이 다가가 잔디의 등이랑 배를 긁어주었다. 나와 잔디의 피부가 맞닿아 이리 저리 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간질간질한 감촉이 내 손끝에 전해졌다. 그 순간 어쩌면 내가 상상해왔을 종과 종의 평화로운 만남, 인간과 비인간의 무해한 공생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잔디와의 첫 만남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살아있는 돼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 만큼 낯설었지만, 작고 귀엽고 인간에게 쉽게 곁을 내어주는 익숙한 (반려)동물이 연상된 만큼 익숙했다. 하지만 새벽이와의 첫 만남은 아주 달랐다. 낯설고, 낯설고, 또 낯설었다. 잔디 집 너머에 있는 새벽이 집 울타리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멀리서부터 우렁차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꾸에에에!
걸걸걸, 걸걸걸
잔디의 ‘꾸우 꾸우’를 듣고 새벽이의 ‘걸걸걸’을 들으니 같은 돼지이지만 전혀 다른 소리처럼 느껴졌다. 울타리 입구에서 실제로 마주한 새벽이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새벽이는 처음 보는 사람을 굉장히 경계하고(특히 남성을!) 체격이 잔디의 몇 배나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전 교육 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마주했을 땐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새벽이 입 양 옆으로 길게 자란 날카로운 엄니는 보기만 해도 위압적이었다. 또 하필 그날 돌봄을 함께 한 활동가 L의 팔에 심상찮은 대형 반창코가 붙어 있어서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L님, 팔은 어쩌다 다치셨어요..?”
“아, 얼마 전에 새벽이 몸에 황토를 발라주다가요. 새벽이가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고개를 훽 하고 젓는 바람에 엄니에 긁혔어요. 살이 좀 찢어져서 병원 가서 꿰맸어요, 하하.”
“(….......................!)”
L은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속으로 ‘얼마나 놀랐을까, 진짜 아팠겠다, 나를 다치게 한 동물을 다시 돌보러 오는 심정은 어떨까, 근데 나….............. 앞으로 괜찮을까?’ 같은 걱정이 올라왔다. 새벽이와 오래 관계를 맺어온 활동가도 새벽이를 완전히 파악하거나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사항도 떠올랐다. 새벽이는 자신을 돌보는 인간 앞에서 고분고분하거나 그저 얌전히 있는(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새벽이를 ‘구조된 동물’이라는 연민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기엔 새벽이는 엄청 쎄보였고, 울타리를 넘어가는 순간 나는 새벽이의 압도적인 피지컬 앞에서 한없이 취약한 존재가 될 것 같았다. 새벽이는 첫만남에서부터 나의 낭만적이면서도 위계적인 인간-비인간 동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한 지붕 두 동물
돌봄 초반에는 아무래도 다가가기 쉬운 잔디와 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비가 추적 추적 오는 어느 여름 날, 나는 큼직한 장우산을 들고 새벽이생추어리에 방문했다. 돌봄 활동을 마치고 비를 피해 잔디의 집에 들어갔다. 비가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새벽이와 달리 잔디는 몸에 물이 닿는 걸 싫어해서 비오는 날이면 주로 집 안에 머무른다. 그래도 인간 보듬이의 출입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무던함 덕분에 나는 잔디와 한 지붕 아래에 있을 수 있었다. 잔디의 지푸라기를 조금 빌려 방석 삼아 깔고 앉았다. 잔디는 집 안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끄응 끄응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다시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 밖에 펼쳐 놓은 우산을 코로 슬쩍 슬쩍 건드리고 비오는 풍경을 쳐다보기도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잔디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문득 새생이(운영 활동가) 무모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무모는 어느 겨울밤 잔디 옆에서 같이 잠을 잔 적이 있다고 했다. 추위를 잘 타는 잔디가 얼마나 추울지 체감해보고 싶었단다. 단열이 거의 되지 않아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 안에서 지푸라기와 이불을 함께 덮고 체온을 나누는, 밤새 움추리며 밤을 지새웠을 무모와 잔디를 생각하니 조금 뭉클해졌다 .
똥 줍기, 미션 impossible?
잔디에 비해 새벽이를 돌볼 때는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밥과 물을 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새벽이가 가까이 오기 전에 울타리 너머로 재빨리 밥그릇을 건내주면 되고, 물조리개에 담은 물을 물그릇에 잘 조준해서 부어주면 된다. 물을 줄 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긴 하다. 물그릇에 거침없이 들이미는 새벽이 얼굴을 잘 피해 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이는 인간이 물을 다 부어줄 때까지 다소곳이 기다리는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안돼! 한다고 물러나는 훈련된 동물도 아니다. 물 조준에 실패해서 새벽이 얼굴에 물이 떨어지면 새벽이도 젖은 얼굴을 세차게 흔들며 응수한다. 그럼 우리도 시원한 물벼락을 맞을 수 있다!
문제는 똥이다. 새벽이 똥을 줍기 위해서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돌봄을 두 명이서 할 때는 한 사람이 음식으로 새벽이의 관심을 끌고 다른 한 사람이 반대쪽 울타리 입구로 들어가 똥을 줍는다. 새벽이는 대체로 일정한 장소에 볼일을 보기 때문에 똥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멀리서 간식을 먹는 새벽이 눈치를 보며 새벽이 응가 ZONE을 탐색한다. 주먹보다 큰 똥을 집게로 잘 집어 똥바구니에 담는다. 여름이라면 무성한 잡초 사이 사이를 헤집으며 보물 찾기를 하듯 똥을 찾아야 한다. 새벽이는 간식을 먹다가도 똥 줍는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볼 때가 있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돌봄 세 달째부터 나는 정기 보듬이가 되어 혼자서 돌봄을 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나름 요령이 생겨 혼자서도 용감하게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간식으로 채취한 덩굴잎을 잔뜩 부어 주고 새벽이가 간식을 먹을 동안 반대쪽 입구로 들어가 재빠르게 똥을 줍고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 하는 돌봄도 어렵지 않게 느껴졌고 새벽이도 나를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똥을 줍고 나서도 종종 울타리 안에 머물며 새벽이를 멀리서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은 간식을 다 먹은 새벽이가 느릿 느릿 다가오더니 내 옆에 있는 똥바구니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몇 걸음 정도 물러났지만 위협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아 피하지 않았다. 살짝 다가가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우리 많이 친해졌으니까 괜찮지? 그렇지?)
그런데 계속 느릿 느릿 움직일 것 같던 새벽이가 어느 순간, 정말 느닷없이, 성큼 성큼 내쪽으로 돌진해왔다. 육중한 몸과 엄니가 몇 배는 더 크고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 재빨리 도망쳤지만 며칠 전에 내린 폭우로 질퍽해진 땅에 발이 푹푹 빠졌다. 그러다 한쪽 장화가 벗겨지면서 넘어졌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맨발로 다시 죽어라고 뛰었다. 실컷 뛰고나서 뒤돌아보니 새벽이는 똥바구니 근처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느릿 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며 멀리 피신해있다가 새벽이가 다른 쪽으로 이동한 틈에 똥바구니를 챙겨 밖으로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새벽이가 어떤 이유로 나에게 달려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새벽이와 가까워졌다고 쉽게 생각한 나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또 맹수도 아닌 돼지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질 수 있는 인간 신체의 나약함을 느꼈다. 사족 보행 동물의 추진력 앞에서 직립 보행 동물의 움직임은 얼마나 느리고 둔하던지. 부끄러움, 나약함,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살짝 오만했졌다가 한없이 겸손해지는 나의 모습이 조금은 쌤통이었다. 진흙 범벅이 된 바지와 양말을 보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몸은 엉망이었고 머릿 속은 복잡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날 돌봄 일지에는 이렇게 간단히 적었다.
“새벽이가 오늘 따라 경계하고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똥을 줍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 빠져나왔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그 후로는 더 조심했지만 새벽이의 행동과 감정을 계속 궁금해하며, 조금씩 다가서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이전 만큼 급박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 더 쫓고 쫓기는 일(나의 일방적인 줄행랑!)을 겪기도 했다. 새벽이는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았다. 새벽이와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정해진 메뉴얼이 없기 때문에 새벽이를 만날 때마다 새벽이의 얼굴을 보고, 새벽이의 소리를 듣고, 새벽이의 행동에 그때 그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멀어지다가 점차 새벽이와의 적정 거리가 만들어졌다. 다가올 때 함부로 가까이 가지 않고 10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면 밖으로 나가거나 새벽이가 잘 올라오지 않는 언덕 위에서 머문다. 서로가 불편하지 않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거리를 상황에 따라 조율했다.
어느 날에는 멀리서 새벽이를 부르며 좌우로 우다다, 우다다 뛰어다녔다. 그랬더니 새벽이도 나에게 돌진하지 않고 좌우로 우다다, 우다다 뛰었다. 같이 노는 기분이 들어 나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 새벽이도 점프를 하며 몸을 마구 흔들었다. (지난 화 ‘돼지와 함께 춤을’에서 등장한 내 안의 기묘한 동물성의 탄생 배경이다!)
새벽이와 적정 거리를 조율하며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왔다.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면서 흙바닥과 개울물이 단단하게 얼었다. 울퉁불퉁하고 딱딱해진 땅에서는 새벽이가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항상 조심 조심 걸었고, 주로 안방 근처를 서성였다. 반대로 단단한 땅에서 나의 움직임은 가볍고 민첩해졌다. 장화가 벗겨질 일이 없어 나의 우다다는 좀 더 자신감이 붙었다. 느려진 새벽이와 빨라진 나의 적정 거리는 새롭게 조율되었다. 어느 날엔 루팅하는 새벽이 주위를 맴돌다가 조심스레 다가가 엉덩이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래도 새벽이는 가만히 자기 할 일을 했다. 또 어느 날엔 천천히 다가오는 새벽이와 몇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울타리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기다란 나뭇가지로 등을 긁어주니까 새벽이가 식빵 자세로 내 앞에 엎드렸다.
- 새벽이 똥 치우고 근처에 좀 있다가 긴 나뭇가지로 새벽이 등을 긁어주니까 식빵 자세로 엎드렸어요! 처음 있는 일이라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폰을 땅에 거치하는데 그 사이에 새벽이가 다시 일어났어요..! 또 살살 긁어주니까 다시 엎드려서 새벽이 허리랑 등을 쓰다듬었어요. 중간에 지푸라기를 등 위에 조금 덮어줬는데 별로였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어요. 놀라긴 했는데 움직임이 위협적이지 않아서 다시 천천히 다가가니까 다시 누웠어요. 잠깐이었지만 새벽이와 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어서 설렜고, 새벽와의 관계가 이전보다 편안해진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2023. 2. 9. 돌봄일지에서)
내가 나의 방식으로 새벽이를 살펴온 시간 만큼이나 새벽이도 새벽이의 방식으로 나를 살펴온 것 같다. 새벽이는 정기적으로 오는 나를 알아보고, 나의 움직임과 소리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나와의 적당한 거리를 끊임없이 조율했을 것이다. 조율이 잘 맞아떨어지는 순간 서로 안심할 수 있다.
봄소식
입춘이 지나면서 새벽이생추어리의 땅도 서서히 녹고 있다. 새벽이는 부드러운 땅을 밟으며 점점 더 움직임이 날렵해지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최근 활동가 돌봄 일지에는 좀처럼 뛰지 않는 잔디의 우다다 소식이 올라와 모두가 반가워했다. 올해는 새벽이와 잔디의 우다다로 봄 소식을 전해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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