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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와 불교산책

[요요와 불교산책] 모든 형성된 것은 부서지고야 만다

by 북드라망 2023. 2. 21.

모든 형성된 것은 부서지고야 만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지금 그대들에게 당부한다. 모든 형성된 것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었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얼마 전 나는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2년 전 고관절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할 때 55키로 가까이 되었던 어머니는 33키로의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팔다리는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마른 나무막대기로 변했다. 누공이 생겨서 장루 수술까지 해야 했던 어머니는 남이 비워 주어야 하는 배변 주머니를 찬 데다가 병원에서 얻은 욕창마저 심각한 상태이다. 게다가 요양시설에서 앓은 옴의 후유증 때문인지, 피부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서 그런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려움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요양병원 퇴원을 결정하기 전에 어머니는 자주 염증 수치가 올랐다. 그때마다 의사는 어머니가 면역력이 저하되었다고, 언제 잘못되셔도 이상하지 않을 몸 상태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대면 면회는 불가능했다. 2주에 한 번꼴로 유리창 너머로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나날이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이 상태가 관리인지 돌봄인지, 연명인지 치료인지, 감금인지 요양인지,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희미하게라도 우리를 알아보실 때 어머니를 만지고 먹이고 씻기고 싶어서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24시간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형제들이 돌봄을 나누고 있지만 벌써부터 고단하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래서일까. 승리의 목표는 없고 오로지 분투만이 있는 전쟁같이 느껴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기력이 쇠잔해지는 어머니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알게 되었다. 지난 2년간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늙어서 병든 몸, 죽음을 향해 가는 몸에 대해 관념적으로 생각했을 뿐 실존의 문제로 깊이 성찰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병들고 늙고 죽는다
늙음과 질병의 고통, 그리고 죽어가는 것은 내 어머니에게만 닥치는 일이 아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의 여정은 위대한 스승 붓다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초기 불교 경전은 젊은 붓다가 얼마나 아름답고 강건한 몸을 가졌는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발은 부드럽고 평평하여 어떤 대지를 밟아도 안정감이 있었고, 장딴지는 사슴과 같았고, 피부는 아름답게 황금색으로 빛났고, 눈동자는 짙은 푸른 빛을 띄었으며, 목소리는 부드럽고, 몸은 균형 잡히고 위풍당당했다. 겉모습만으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아우라가 드러나는 붓다의 모습은 32상 80종호라는 특별한 표식을 얻었다. 그러나 그렇게 젊고 아름다운 몸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를 성취한 붓다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몸은 그 빛을 잃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홀로 명상하다 양지에 앉아 등에 따뜻한 볕을 쬐고 있는 붓다에게 아난다가 가까이 와서 손과 발을 만지며 말했다.

 

세존이시여, 이제 세존의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 주름이 지고 몸은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이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쌍윳따니까야 48:41 늙음의 경)


붓다의 몸도 무너지고 있었다. 균형 잡혔던 몸은 구부정해지고, 눈은 침침해지고,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냄새도 잘 맡지 못하고, 음식 맛도 잘 분간하지 못했다. 탄력 있던 피부도 늘어지고, 생기를 잃는다. 곁에서 붓다를 모시던 아난다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육체적으로 노쇠해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난다의 걱정 어린 말에 붓다는 언제나 그랬듯이 쿨하게 응답했다. ‘젊은이는 늙게 마련이고, 건강한 자는 병들게 마련이고, 비록 오래 산 사람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라고.’ 그렇다. 누구나 붓다처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붓다처럼 마지막을 살아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을 잘 보여주는 경전이 『대반열반경』이다. 인도의 여름은 비가 많다. 우기가 되면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유행 생활을 멈추고 석달 동안 한곳에 머물렀다. 생애의 마지막 하안거 동안 붓다는 큰 병을 앓았다. 붓다가 눈에 띄게 늙어버린 여름이었다. 아마도 위에 인용한 아난다와 붓다의 대화 역시 이즈음에 나눈 것인 듯 싶다. 붓다가 사경을 넘나들며 앓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던 아난다는 극심한 혼란과 동요를 겪었다. 붓다가 병을 떨치고 일어났을 때 아난다는 스승에게 자신이 겪었던 불안을 토로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병이 드셨기 때문에 실로 저의 몸은 마비된 듯했고 저는 분별력을 잃어버렸고 가르침도 제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이 얼마나 인간적인 토로인가? 며칠 전 어머니가 하혈을 했다. 요양보호사의 연락을 받은 그날 밤 내 심정이 바로 아난다의 심정과 같았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것일까, 좀 더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난다를 비롯한 붓다의 제자들은 부정관(不淨觀)이나 백골관(白骨觀) 같은 수행을 닦았다. 부정관은 아름답고 깨끗해 보이는 것이 실은 깨끗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한 집착과 시비분별을 떠나는 수행이다. 백골관은 시체가 부패하여 백골이 되는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관을 닦는 수행이다. 아난다는 오랫동안 수행하고 붓다의 곁에서 가르침을 학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죽음을 앞에 두고 동요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고통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과제인가? 아무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난다에게 붓다는 이렇게 답했다.

  
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아라

아난다여, 나는 지금 늙고, 나이 먹고,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고, 노인이 되고, 만년에 이르렀다. 내 나이는 여든을 넘어섰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가 밧줄에 의지해서 계속 유지하듯이, 아난다여, 그와 같이 여래의 몸은 가죽끈에 의지해서 계속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가 일체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어떠한 느낌마저도 소멸하여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삼매에 들면, 아난다여, 그때 여래의 몸은 지극히 안온하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남을 피난처로 삼지 마라.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마라.(『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이 법문은 한역 전통에서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으로 널리 알려진 가르침이다. 붓다는 아난다에게 말한다. 비록 내가 늙고 병들었지만 나는 젊음에도 건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외적 인상이나 느낌에 마음이 좌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통찰할 때 내 몸은 고통스럽더라도 내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온을 유지한다. 그러니 아난다여, 자아를 강화하는 인상과 느낌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외적 대상에 대한 느낌과 판단에 기대어 구원과 평안을 얻으려 해서도 안 된다. 설령 그 대상이 붓다라 해도, 좋은 벗들의 모임인 승가라 해도 그것에 집착하는 한 구원은 없다. 나는 변하지 않는 주체나 대상은 없다고 가르쳤다. 스스로를 변형하는 수행과 있는 그대로를 통찰하는 지혜의 힘으로 자신이 처한 문제를 돌파하고 자신을 구원하라. 그것이 자신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 달려갔고 어머니를 응급실에 모시고 갔다. 내가 의논한 왕진 의사와 방문 간호사와 요양 보호사가 모두 응급실 가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두시간이 넘게 응급실에 있으면서 피를 뽑고 소변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CT촬영을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자 불안하던 마음이 오히려 가라앉았다. 깨달음은 늘 뒤늦게 온다. 그제서야 이것을 어머니의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가는 비가역적인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수도 없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불안과 초조에 잠식 당하여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할 수 없게 된 후 자식들이 어머니의 결정을 대신해 왔다. 돌아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의료의 패러다임 안에서 어떤 결정을 해왔다. 이제는 치료가 아니라 생로병사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실 때부터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자 당황하면서 마치 정답이 있는 듯이 답을 찾는데 급급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돌보는 사람들이 섬세하게 헤아리는 수밖에 없다.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의사의 입장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을 덜고 어머니의 존엄을 지키려는 입장에서.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 내 문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온 어머니의 존재 자체가 늙음과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라고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병에서 회복된 붓다는 안거 기간이 끝나자 평생 그래왔듯이 언제나처럼 길을 떠났다. 그 길에서 붓다는 대장장이 쭌다가 제공한 음식을 먹고 심한 설사병에 걸려 혈변을 쏟았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난다는 다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열반을 앞둔 붓다는 눈물콧물 범벅이 된 아난다를 찾았다.
  

아난다여, 그만 두어라. 슬퍼하지 말라. 비탄해 하지 말라. 아난다여, 참으로 내가 미리 ‘모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들과 살아서 헤어지기 마련이고, 죽어서 이별하기 마련이고, 달라서 흩어지기 마련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생겨나고 생성되고 형성되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을 두고 여래의 신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부서지지 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 … 아난다여, 그대는 공덕을 쌓았으니 정진에 몰두하라. 곧 번뇌를 여읜 님이 되리라.(『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힘들게 생명의 불씨를 이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자주 가슴이 답답하고 감정이 널을 뛴다. 내 마음은 슬픔에 젖는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머니의 고통에 대한 연민일까, 안타까움일까,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와 회한일까,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느끼는 무력감과 자기연민일까,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일까. 참으로 복합적이고 복잡다단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붓다는 슬퍼하되 슬픔에 집착하지 말고, 기뻐하되 기쁨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난다에게 슬퍼하지 말고, 비탄에 빠지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게다.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로 그것을 느낀다. 이들을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 여읜 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불쾌와 절망에서 여읜 자, 괴로움에서 여읜 자라고 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어머니를 돌보는 과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슬퍼한다고 어머니가 더 편안해 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더 편안해 지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내 과제는 애통해 하지 않고 비탄에 빠지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잘 돌보는 것이다. 열반에 들기 직전 붓다는 제자들에게 “모든 형성된 것은 부서지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그 말은 어머니의 소멸의 과정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적실한 것임에 틀림없다.

 


 글_요요(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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