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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와 불교산책

[요요와불교산책]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by 북드라망 2023. 4. 10.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쌍윳따니까야』 15장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쌍윳따』)


 
수많은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0일이 다 되어 간다. 지금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2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심신을 갉아 먹고 있었던 그 모든 고통이 끝난 것에 대한 안도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동시에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의 야윈 몸을 끌어안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뺨에 얼굴을 비벼대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어루만진 입관식에서도, 어머니의 몸을 담은 관이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때도, 한 줌으로 수습된 유골을 땅에 묻을 때도,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이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의 옷장을 정리하면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이 없었다는 회한과 자책감에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울면서 『눈물의 경』을 떠올렸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에 빠지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은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쌍윳따니까야』 15:3 「눈물의 경」)


『눈물의 경』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이별의 고통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윤회하는 삶이란 다름 아닌 끝없이 고통 속을 헤매는 삶이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매일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불안과 괴로움,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번뇌만으로도 이 삶은 고통에 찬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오랜 세월 윤회하며 우리가 흘린 눈물이 바다보다 더 많다니! 어머니를 보내고 며칠 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시작도 알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수많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 아들딸의 죽음과 형제자매의 죽음을 겪어 왔다’는 이야기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분투하고 있는 윤회적 생존의 그물망 안에서 나의 눈물이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함께 살고 있는 뭇삶들의 고통과 연결되고 뒤섞이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내 어머니 아닌 것이 없고, 내 아들딸 아닌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그저 문학적 수사로서가 아니라 실감의 영역으로 훅 다가오는 듯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오랫동안 나는 마음 한구석에 윤회의 개념에 의문을 품어 왔다. 이천오백년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고통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기 위해 굳이 현대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윤회라는 개념적 장치를 가져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회가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뭇삶들과 고통을 나누는 실감의 차원이 되자 개념의 좌표계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 한 번의 삶과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에 비해 윤회라는 시좌를 도입하면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고 공감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된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따졌던, 윤회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 같은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윤회라는 사유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는지 그것을 아는 게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쓴 반야심경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자는 없다
붓다가 법을 설하던 시대에 윤회와 관련하여 가장 주류적인 견해는 상주론(常住論)이었다. 상주론은 아트만이라는 실체가 전생에서 현생으로, 현생에서 후생으로 몸을 바꾸어가며 윤회전생(輪廻轉生)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만일 지금도 누군가 윤회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붓다의 무아론은 상주론과 대결하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윤회가 무아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가장 지배적 담론이었던 만큼 상주론의 영향에서 벗어나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던 듯하다. 붓다의 제자였던 싸띠도 그랬다. 싸띠는 의식이 윤회한다는 것이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다가 붓다에게 불려갔다. 붓다는 물었다.
 

[세존] 싸띠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났는가? 싸띠여, 어떠한 것이 그 의식인가?
[사띠]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세존]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맛지마니까야』 38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싸띠는 의식이 행위의 결과를 체험한다고 생각했다. 붓다 당시에는 의식과 마음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던 만큼 마음이라고 바꾸어 이해해도 좋겠다. 싸띠는 의식이나 마음이 윤회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싸띠의 대답을 들은 붓다는 그를 호되게 비판한다. 싸띠의 주장에 따르면 의식은 인간의 행위와 경험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붓다에게 의식은 독립적인 것도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의식은 적절한 인연이 결합하면 조건적으로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그에 따라 조건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의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저 홀로 독립적인 윤회의 주체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적이다. 연기라는 말 자체가 조건적 발생을 의미한다. 붓다는 윤회를 긍정했지만, 그가 말한 윤회는 상주론적 윤회가 아니다. 연기적 윤회이다. 연기가 물질과 생명을 다 포함하는 일반원리라면, 윤회는 중생에 한정하여 쓴다는 점이 다르다. 연기론이 무상한 변화를 일으키는 자아나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붓다의 윤회는 윤회하는 주체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의식이나 마음을 주체로 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윤회를 이끌고 가는 것은 무명과 갈애이지 자아가 아니다. 윤회는 있지만 윤회하는 주체는 없다. 하여 연기를 보는 자는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나’를 묻지 않는다. 아니, 물을 이유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들은 이 연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잘 관찰하기 때문에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으로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12:20 「조건의 경」)



업이 나의 주인이다
또 하나 윤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업(業)이다. 무명과 갈애가 업을 낳고, 업이 윤회를 이끌고 간다. 업이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의 번역어로 행위를 뜻한다. 업에는 말로 하는 행위口業, 몸으로 하는 행위身業, 마음으로 하는 행위意業가 있다. 업에는 과보가 따른다. 업설에서도 붓다는 상주론과 대결한다.

상주론의 업설은 업을 짓는 것도 아트만이고 과보를 받는 것도 아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주론과 대결하는 붓다의 업설에는 업을 짓는 주체와 과보를 받는 주체가 상정되지 않는다. 업은 있지만 업을 짓는 주체는 없다. 과보는 있지만 과보를 경험하는 주체는 없다. 흔히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과 같은 표현을 한다. 사실 이런 표현에는 알게 모르게 상주론적인 전제가 놓여 있다. 그 사람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지금 복을 받는다는 사고방식이다. 상주론적 인과응보는 과거에 내가 지은 업이 현재의 나의 행불행을 결정하고, 현재의 행불행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 과거의 나의 업이든, 신의 뜻이든, 무엇인가 기원이 있고, 그 기원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붓다는 업에 의한 결정론과 숙명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언젠가 부유하고 명망있는 바라문 바라드와자와 바셋타는 ‘고귀한 사람(바라문)은 어떤 사람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바라드와자는 순수한 바라문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이 고귀한 사람이 된다고 주장했다. 바셋타는 계행과 덕행을 행하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아마 이 당시 출생과 행위의 문제가 업설의 핫 이슈가 아니었을까. 이들은 붓다를 찾아가서 의견을 구했다. 붓다는 먼저 ‘동물이나 식물은 출생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동식물들은 종에 따른 차이가 명확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종이라는 이야기다. 고대 인도가 엄격한 위계에 의한 신분사회였던 것을 생각하면 붓다의 말은 불온하고 급진적이었다.

‘태생에 의해 고귀한 님이 된다’고 무지한 사람은 말합니다. 태생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고귀한 님이 되기도 하고, 고귀한 님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현자들은 있는 그대로 행위를 봅니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님으로서, 행위와 그 과보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사람들은 행위에 매어 있습니다.(『숫타니파타』 「바셋타의 경」)


행위란 지금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 업이다. 당시에 출생은 과거의 업의 결과, 과보라고 받아들여졌다. 좋은 가문에 태어난 것은 과거 선업의 과보요, 비천한 가문에 태어난 것은 과거 악업의 과보다. 바라드와자는 출생이 고귀하면 고귀한 사람이 된다고 주장한다. 아마 당시 사회의 상식과 통념에 준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붓다는 현재 어떤 과보를 받았든 지금 행하는 업이 그의 삶을 결정한다는 업설을 내놓았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업이 운명을 만든다. 과보가 아니라 업이 나의 주인이다. 주체 없는 윤회란, 업이 윤회한다는 이야기로 이해해도 좋다. 그런데 업은 있지만 업의 주체는 없다. 업 역시 수많은 조건들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업도 과보도 연기적이라는 말이다.

 



집착 없이 행위하라
업과 과보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단멸론(斷滅論)이다. 업과 과보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단멸론은 철저하게 실체론적이다. 아트만처럼 영구적으로 항존하는 실체는 아니지만 단멸론은 살아있는 동안의 개체를 실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멸론은 그 실체가 ‘죽으면 끝’이라고 주장했다. 단멸론은 선업을 쌓았든 악업을 쌓았든 업을 행한 주체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붓다는 우리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업은 연속한다고 보았다. 실은 개체가 죽든 살든 다르지 않다. 어떤 행위를 마치면 그 행위는 사라진다. 말소리는 흩어지고, 행동도 과거의 일이 되고, 내 마음 속 생각도 사라진다. 그러나 내가 한 말과 행동과 마음 속 의도는 어떤 잠재력을 남긴다. 남을 비난하는 말을 뱉고 나면 그 말은 사라진다. 그러나 찜찜한 마음이 남고,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면 그의 마음 속에 나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자라난다. 당장 그의 분노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그것은 땅속에 묻힌 씨앗처럼 적당한 조건이 되면 싹을 틔울 것이다. 내가 그 과보를 직접 받지 않는다고 하여 업의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행위는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어떤 식으로든 과보를 발생시킨다. 그런 점에서 볼 때도 업은 결코 개인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인연과 조건들이 개입한다.

붓다도 선업과 악업을 분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업과 악업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적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어떤 대상에게 어떤 조건에서 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 어떤 조건이 형성되느냐에 따라 업의 성격은 달라진다. 붓다는 악업은 후회와 분노를 부르므로 악업을 행하는 것보다는 선업을 행하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선업도 악업도 행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선업은 우리가 선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만과 애착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선업도 악업도 아닌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있다! 그것은 집착 없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과 갈애를 벗어난 자는 업을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업에는 과보가 따르지 않는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허공에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고 꿀을 모으는 꿀벌이 꽃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물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무명과 갈애에서 벗어난 수행자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게 더 이상 윤회적 생존은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드라마 작가인 조카가 내게 물었다. 이모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십여년 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게 편지를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무심한 나는 거의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사랑의 편지를 썼다. 기억의 창고 속에 있다가 문득 현재로 튀어 오른 어머니의 편지는 어쩌면 아직 싹틔우지 못한 어머니의 업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어떤 업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내 마음에 파문을 불러 일으키며 살아난다. 이렇게 어머니 없는 어머니의 다음 생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교식 장례 의례는 49재를 지낸다. 49재는 업과 과보에 매인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중생에게 악업을 정화하고 무명과 갈애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는 의례이다.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게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천도재(薦導齋)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곳에 태어난다 한들 또 다시 죽어 그 다음에 어디에 태어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생사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천도의 궁극의 목표는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천도는 죽은 이를 좋은 곳으로 이끄는 것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윤회적 생존을 끝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끝없이 번뇌를 낳고 윤회적 생존을 낳는 무명과 갈애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해탈 말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쌍윳따니까야』 15장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쌍윳따』)


우리는 49재를 지내지 않았다. 나는 망자를 좋은 곳으로 안내한다는 『티벳 사자의 서』를 읽는 것으로 어머니의 49재를 대신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9일째가 되는 날 어머니의 묘를 찾아 묘비 제막식을 하고 간소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탈상의 예를 치렀다. 평소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을 묘비명으로 새겼다. 묘비에 새겨진 어머니의 말씀 때문일까. 그날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고 묘비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명랑하게 탈상했다.

“후회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 느그도 그리 살다 온나.”

 


글_요요(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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