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성냄 때문에, 또는 미움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증오없이, 온 세상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숫타니파타』 『자애경』)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영주 부석사를 좋아한다. 산 중턱에 세워진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법당에 이르기까지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안양루를 통과하면 그때 무량수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만이 아니라 떠 있는 돌, 부석(浮石)이 있다. 그 돌과 함께 당나라 여인 선묘의 의상대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천년의 사랑 때문도 아니고,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국보급 보물인 무량수전과 아미타 여래상 때문도 아니다. 부석사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무량수전 앞에서 몸을 돌리면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다. 서두르지 않고 그 풍경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세속의 번뇌로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으면 이제 법당으로 들어가 아미타 부처님을 만나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인 아미타(am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무량한 수명[無量壽], 무량한 빛[無量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은 지복의 세계인 극락의 부처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전, 극락전이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기 전 법장비구로 불리던 수행자 시절에 고통을 겪는 이가 단 하나도 없는 불국토를 건립하기를 서원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번뇌가 씻겨나가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웠다. 무려 5겁 동안 용맹정진 수행하여 법장비구는 마침내 그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번뇌와 괴로움에서 해탈한 세계, 극락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미타불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아무 조건 없이 지복과 평화의 불국토로 초대하는 자비의 부처가 되었다. 하여 아미타불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을 가진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존재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만트라가 되었다. 그러나 나무(namo), 즉 귀의는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것일 수 없다. 귀의는 내 마음을 다하여 아미타불의 서원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귀의란 아미타불이 법장비구 시절에 세웠던 서원을 기억하고 지금 나의 삶에서 구현하겠다는 발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아미타불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은 내 마음에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행을 실천하는 수행자로 살겠다는 약속과 다르지 않다.
자비와 사무량심 수행
아미타불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대승불교의 등장과 함께 출현한 부처이다. 자리(自利)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타(利他)는 타자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개인의 구원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타자의 구원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공동체적 관점을 강조한다. 자리이타는 자리와 이타를 떼어내어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緣起)적 관점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 사이의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이라는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새롭게 출현한 아미타불과 아미타불이 수행자 시절에 세운 자비의 서원은 그런 통찰을 신화적·종교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 자리이타가 전면에 대두되었다고 해서 자비가 대승불교만의 전유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비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설해지는 붓다의 가르침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기불교의 사무량심 수행을 통해 붓다가 자비를 어떻게 설했는지 그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사무량심 수행이란 자애[慈], 연민[悲], 기쁨[喜], 평정[捨]의 마음을 넓혀가는 수행이다. 이 중에서 자애와 연민을 합쳐 자비라고 하지만 실은 사무량심 전체가 자비를 구성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자애 수행은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수행이다. 이 수행으로 남에 대한 미움과 적의를 지워나간다. 연민 수행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잔인함을 제거하고 다른 존재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아파하는 수행이다.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나면 우리는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다. 기쁨을 닦는 수행은 질투심을 지워 내면서 다른 이의 성공과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수행이다. 평정 수행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수행이다. 우월하다·열등하다·동등하다는 프레임을 갖고 있으면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에 빠져 평화를 잃어버린다. 평정 수행은 분별심과 경쟁심을 지워 나가면서 만물을 고루 평등하게 대하는 수행이다.
사무량심 수행은 ‘나’와 ‘내 것’에 고착되어 있는 자기애와 이기심 같은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온 우주를 가득 채울 정도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넓혀가는 수행이다. 왜 사무량심 수행을 해야 할까? 남을 미워하고 남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질투하고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한 우리는 인색하고 쩨쩨하고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읽고 듣고 배운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번뇌에 빠뜨리는 삶으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남도 행복하기를 원하고 남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국량을 키울 때 비로소 우리 자신도 자애와 연민으로 충만해지고 탐·진·치가 없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들이건,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조그맣거나 거대하거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태어난 것이나 태어날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 성냄 때문에, 또는 미움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자신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그처럼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증오없이, 온 세상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깨어 있는 한, 자애에 대한 마음집중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청정한 삶이라고 불린다.(『숫타니파타』 『자애경』 146~149)
온 세상에 대한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라! 나의 행복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바로 이것이 중생구제에 온생을 바친 붓다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 수행자였던 법장비구 시절에 세운 서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행복하라!’의 원형이 여기, 『자애경』에 있다.
자비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말은 아름답지만 누구나 법장비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문제제기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느끼며 사는 평범한 장삼이사들은 어떻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각자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설하는 방편설법의 대가인 붓다는 탐·진·치에 젖어 사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자비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했다. 붓다가 활발히 전법 활동을 벌였던 곳인 북인도의 최강대국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과 말리까 왕비의 대화를 통해 붓다가 재가자에게는 어떻게 자비를 설했는지 알 수 있다. 빠세나디 왕은 끝없이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넓혀가려는 야망에 불타는 정복 군주였고, 말리까 왕비는 지혜와 신심으로 이름을 날린 붓다의 재가 제자였다.
[빠세나디]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
[말리까]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빠세나디]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소.”
대화를 마친 뒤 왕은 붓다를 만나러 갔다. 왕은 붓다에게 왕비와 나눈 대화를 말씀드렸다. 그때 붓다는 그 뜻을 알고 이와 같은 게송을 읊었다.
[붓다] 마음이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되리.(『샹윳따니까야』 『말리까왕비경』)
말리까 왕비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빠세나디 왕을 위해 붓다는 그 대화의 의미를 게송으로 풀어주었다. 대개 우리는 아무리 다른 것을 찾으려 해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찾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명, 그 생명을 지키려는 욕망과 감정이 가장 소중하다. 이로부터 누군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붓다는 똑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도착지가 달랐다. 나에게 내가 사랑스럽듯이 다른 존재에게도 그 자신이 사랑스럽다. 내가 나에게 소중하다면 상대방 역시 그러하다. 나는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상대방 역시 누군가 자신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 삶이 소중하면 남의 삶도 소중하다. 이로부터 붓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자비를 설했다. 붓다의 충실한 제자였던 말리까 왕비가 왕과의 대화에서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 역시 아힘사(ahimsa), 곧 비폭력과 자비였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 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법구경』 130번 게송)
게송을 통해 알 수 있다시피 붓다는 우리의 살고자 하는 욕망,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죄악시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내가 소중한 만큼 남에게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고자 했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남자든 여자든, 장애가 있든 없든, 많이 배운 자이든 아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동성애든 이성애든, 눈에 보이는 존재든 보이지 않는 존재든,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고 행복을 원한다. 적어도 그 점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끼어들 틈이 없다. 누구나 모든 존재의 평등에 대해 성찰하고 존재의 평등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로부터 자비심을 키울 수 있다. 붓다에게 자비는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타고난 기질이나 품성이 아니었다. 자비는 자신에게 애착하는 정념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존재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성찰과 숙고를 통해 키울 수 있는 합리적이고 능동적인 감정이었던 것이다. 자비 수행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 자비의 영성가 달라이라마 역시 “자비심은 논리적 사유를 통해 개발되는 합리적인 감정”(『달라이라마의 지혜명상』 186쪽)이라고 말한다. 자비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자비는 숙고와 성찰의 결과로 자라나는 우리 마음의 역량이다.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나와 남이 같음을 먼저 힘써 수행해야 한다.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나와 같이 보호해야 한다.(『입보리행론』 8-90)
평등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법률적 평등과 정치적 평등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법 앞의 평등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난민이나 불법 이주민은 쉽게 감금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며 추방된다. 그는 법의 보호 바깥에 있다. 시민의 권리도 다르지 않다. 권리의 평등은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한 권리라고 인정된 것에만 해당된다. 장애인의 이동권이 누구나 동의하는 상식이나 통념이 되지 못할 때 소수자의 권리는 다수를 위해 희생되어 마땅한 것으로 간주된다. 권리 대 권리가 부딪칠 때는 이기느냐, 지느냐의 이분법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 혐오가 판치게 된다. 그곳에는 시혜를 베푸는 동정은 있을지언정 자비는 없다.
그렇다면 국적, 성별, 계급, 나이, 장애 여부, 동성애·이성애를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의 이념은 어떠한가. 법적 평등이나 정치적 평등에 비해 진일보한 주장이지만 여기에도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 천부인권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될 뿐 인간이 아닌 종(種)들을 배제한다. 자본보다 생명이라는 슬로건도 단지 인간의 생명 앞에서 멈출 위험이 있다. 비인간 존재들은 오직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돼지와 닭과 소는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 숲은 농작물을 기르기 위해 베어져야 하며, 만일 숲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종의 보존을 위해서이다. 바다는 인간의 식량창고이므로 보호되어야 하며 이산화탄소의 저장고로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평등심 수행은 자비심의 근거를 모든 존재의 평등에서 찾는다. 평등하므로 모든 존재는 고유한 삶의 의미를 갖는다. 평등심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생명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고통을 피하려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서 전제한다. 존재의 평등이야말로 사무량심 수행에서 평등심 수행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비심의 진짜 바탕이 아닐까.
일상의 자비, 어떻게 시작할까
내가 자주 가는 뒷산 산책길에 어린 도롱뇽이 사는 웅덩이가 있다. 3월 말이면 동그랗게 말린 도롱뇽 알집이 보이고, 4월이 되면 올챙이처럼 생긴 도롱뇽 새끼가 웅덩이를 헤엄친다. 점차 자라서 뒷다리와 앞다리가 다 나오면 도롱뇽은 웅덩이 밑을 기어 다니면서 슬슬 웅덩이를 떠날 준비를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도롱뇽은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았고, 도롱뇽 새끼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재미로 나의 발걸음도 잦아졌다. 그런데 유난히 심한 봄가뭄 탓에 웅덩이 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뒷산에 갈 때마다 물병을 들고 가서 물을 부어주기 시작했지만 웅덩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처럼 도롱뇽을 염려하던 분이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근처의 물이 풍부한 웅덩이로 도롱뇽을 옮기는 이사를 단행했다. 이제 한시름 놓았나 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다시 도롱뇽의 안녕을 걱정하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급속히 진행되는 기후위기와 봄가뭄으로 도롱뇽이 사는 웅덩이의 물이 말라가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도롱뇽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수년전 천성산을 통과하는 터널을 막기 위해 지율스님은 40일이 넘는 단식을 마다하지 않았고, 도롱뇽의 친구들은 도롱뇽을 대신하여 터널공사를 멈추라는 소송을 벌였다. 나는 도롱뇽의 친구들을 응원하고 지지했지만 그때만 해도 도롱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도롱뇽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올해 봄 뒷산 도롱뇽의 안부를 걱정하면서부터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대부분의 도롱뇽이 멸종위기에 처한 보호종이라는 것과 인간의 무분별한 서식지 파괴로 도롱뇽이 속한 양서류 전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나는 도롱뇽의 친구가 되고, 구조된 돼지 새벽이의 친구가 되고, 멸종위기의 종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자리이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롱뇽은 나로부터 아주 먼 거리에 있었던 비인간 존재였다. 그가 나의 삶에 들어온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뒷산 웅덩이에 살던 도롱뇽과의 그 우연한 마주침이 도롱뇽을 넘어 양서류로, 더 나아가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지구 역사상 여섯 번째 멸종위기에 대해서까지, 내 삶이 뭇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뒷산 웅덩이에 도롱뇽이 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내가 도롱뇽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 도롱뇽이 내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도롱뇽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가 도롱뇽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기 이전에 도롱뇽의 존재 그 자체에 깊은 감사를 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없었다면 나의 우주는 지금보다 더 협소하고 더 황폐했을 테니 말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도롱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뭇 삶들이 나를 살리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점에서도 뭇삶들은 평등하다.
어쩌면 존재의 평등과 관련하여 내가 서야 하는 출발점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비심을 일으키려 애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무엇을 하려 하기보다 나를 위한 자비가 이미 내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만히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동안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 내가 번번이 제대로 자비의 마음에 가닿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애경』을 떠올리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를 마음에 떠올리는 명상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서두르기만 할 뿐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타자를 향한 자비로 나를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했던 것은 자비로 나를 채우려 하기보다 이미 넘치도록 베풀어지고 있는 자비에 대해 명상하며 나를 비우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 대한 귀의 역시 그래야 할 것 같다.
글_요요(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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