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설법 중에 붓다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대중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꽃을 든 붓다의 뜻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에피소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선불교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했다. 선불교가 말과 글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할 때 근거로 삼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2,500년 전 붓다의 육성을 느낄 수 있는 『니까야』나 『아함경』에는 이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기경전에서 만나는 붓다는 선사들처럼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함축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거나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정연한 말로 설득하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적절한 비유로 마음을 움직이고, 의표를 찌르는 반문으로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허점을 시인하게 하는 변재의 달인, 수사학의 달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게 논리와 비유, 반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자유자재한 변재의 능력을 가진 붓다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응답한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붓다의 침묵
무기(無記)란 질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질문이 열 가지였기 때문에 십무기라 한다. 대관절 어떤 질문이길래 답하지 않은 것일까? 그 열가지는 이렇다. 1) 세계는 영원한가, 2)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가, 3) 세계는 유한한가, 4) 세계는 유한하지 않은가(무한한가), 5)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6) 영혼은 육체와 다른가, 7)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8)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9)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10)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간추려 보면 세계의 시초문제, 세계의 공간적 한계 문제,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관계 문제, 깨달은 자(여래)의 사후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이다. 마지막 문제의 경우 윤회를 당연시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깨달은 자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가가 핫한 담론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세계의 기원 문제는 신화와 종교 그리고 철학이 답하려고 했던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창조설은 세계는 기원이 있고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다고 답한다. 오늘날 과학의 주류이론인 빅뱅이론 또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다. 이와 다른 대안적인 종교적 주장과 과학적 이론도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면서 시비를 다툰다. 때로는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로 치부되기도 한다. 붓다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위의 열가지 문제는 무엇이 옳다 그르다 답하기 곤란한 문제다. 칸트는 시초가 있다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양쪽 모두 완벽한 논리를 정립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두 주장 모두 반정립의 논리가 성립되므로 이율배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변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어떤 이유로 이 질문들에 대해 침묵한 것일까? 칸트의 이율배반 같은 것을 붓다가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붓다의 교설에 입각해 볼 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붓다는 불생불멸의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견해를 연기론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관의 외부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세계가 있다는 통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 같다. 더불어 여래 역시 하나의 고정된 인격체로 간주되지 않았다. ‘나’라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데 여래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잘못된 전제를 가진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가령 있지도 않는 거북이 털에 대하여 ‘거북이 털은 짧습니까, 깁니까’에 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것은 붓다의 침묵에 대한 나의 가설적 해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설은 옆으로 밀쳐두고 일단 경전에 남아있는 붓다의 말에 주목해 보자.
독화살의 비유
붓다에게 위의 열가지 질문을 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말룽끼야뿟따와의 대화가 유명한데 이 대화에서 붓다는 ‘독화살의 비유’를 설했다. 독화살의 비유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그를 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화살에 맞은 사람이 ‘독화살을 쏜 사람의 출신이 어딘지, 이름이 무엇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어느 마을 사람인지, 피부색이 어떠한지, 그를 쏜 활이 어떤 종류인지, 활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화살대가 어떤 갈대로 만들어졌는지, 화살의 깃털이 어느 새의 깃털인지, 화살대를 감은 힘줄이 어떤 동물의 것인지, 화살의 모양이 어떠한지’ 알고 나서야 화살을 뽑겠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독화살 맞은 사람은 자신의 질문에 답을 얻은 뒤 의사가 화살을 뽑기도 전에 죽고야 말 것이다.” 이 비유의 의미는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열 가지 질문을 한 말룽끼야뿟따를 독화살을 맞고서도 이러 저러한 것을 알아야 독화살을 뽑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어도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경」)
우리 역시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의 독화살을 맞았다. 누가 화살을 쏘았는지 알든 모르든 일단 독화살을 뽑아야 하는 것처럼, 세상이 영원하든 영원하지 않든 우리는 생로병사의 괴로움과 번뇌를 겪는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없다. 탐진치의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사변적 질문을 던질 수는 있지만 그 질문들은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붓다의 가르침과 열가지 질문 두 가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의 성격이 다르다. 하나는 늙음과 질병, 슬픔과 불안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인 의문을 푸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이 세계의 영원성 등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 붓다에게 가서 열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대에게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
초기불교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개념으로 희론(戱論)이라는 말이 있다. 희론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분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괴로움의 파괴를 겨냥하지 않고, 단지 지적인 즐거움만을 위한 논의와 끝없는 논쟁만을 낳는 사변적 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열 가지 질문도 그런 희론의 일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침묵한 것이다. 나는 논쟁을 야기하는 논의가 전혀 무용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장 어떤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질문과 논의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도 있고, 자신의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지적 토론보다 유익한 것은 독화살을 뽑는 것이다. 더불어 자칫하면 그런 지적인 논의가 우리의 갈망을 부채질하는 또 다른 독화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붓다도 침묵의 이유를 독화살의 비유 한 가지로만 답한 것은 아니었다. 밧차곳따라는 유행자 역시 말룽끼야뿟따와 같은 열 가지 질문을 했는데, 붓다는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답해 달라는 그의 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실망한 밧차곳따는 붓다에게 답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붓다의 대답은 희론의 위험을 설파하는 것이었다.
밧차곳따여, 사변적 견해는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이고 견해의 왜곡이고 견해의 동요이고 견해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합니다. …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환상, 모든 혼란, 모든 ‘나’를 만드는 것, 모든 ‘나의 것’을 만드는 것, 자만의 잠재의식을 부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버려 버리고, 놓아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이 답변은 희론이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들고, 내가 옳다는 자만의 잠재의식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견해의 정글이고 견해의 광야다. 정글과 광야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그런데 그런 상황일수록 우리는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올바른 단 하나의 답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불나방처럼 논쟁 속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견해든 견해 역시 조건적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메타적 성찰을 놓치기 쉽다. 붓다가 설하는 견해의 위험은 견해 역시 연기적이라는 것을 통찰하지 못할 때 벌어진다. 그렇게 어떤 견해에 결박될 때 그것은 고뇌를 수반하고 파멸을 수반하고 번뇌를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견해가 번뇌를 수반한다는 붓다의 통찰은 견해를 대하는 우리의 상식과 통념에 어긋난다. 우리는 나의 견해는 나의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견해를 즐기고 견해에 집착한다. 붓다 역시 수많은 견해들이 논쟁하고 충돌하고 불화하는 시대를 살았다. 말룽끼야뿟따와 밧차곳따의 질문은 열가지 였지만 『디가니까야』의「범망경」은 당대에 유행한 견해를 62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시대에 어떤 것이 올바른 견해인가를 주장하기 보다는 어떤 것이 사견(邪見)인지, 희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찰했다.
붓다도 바른 견해, 정견(正見)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견이란 이것만이 진리라는 어떤 특정한 견해가 아니라, 견해에 대해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 없는 상태, 견해의 결박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닐까. 어쩌면 붓다가 무상과 무아, 그리고 연기에 대한 철학이나 견해를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오해일 지도 모르겠다. 견해의 결박을 부순 붓다는 무상을 살고, 무아를 살고, 연기를 살아 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견해를 가지면서도 견해의 위험을 성찰하기. 붓다의 침묵이 내게 던지는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열가지 질문에 답하지 않은 붓다의 침묵은 말 대신 연꽃을 드는 것 같은 이심전심의 침묵과는 달랐다. 또한 이것도 옳을 수 있고 저것도 옳을 수 있다는 상대주의자의 침묵도 아니었다. 또 이것도 아닐 수 있고, 저것도 아닐 수 있다는 불가지론을 표명하는 회의주의자의 침묵 역시 아니었다. 붓다의 침묵은 견해의 위험을 강하게 경계하는 침묵이었다. 견해 때문에 생겨나는 괴로움과 번뇌를 직시하고, 그 집착의 연쇄 고리를 끊을 것을 요구하는 침묵일 수도 있겠다.
글_요요(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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