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신화의 테마 ⑧ - 취사, 꿀에서 재까지, 반신석기 혁명의 노래

by 북드라망 2022. 8. 8.

신화의 테마 ⑧ - 취사

에서 까지, 반신석기 혁명의 노래

 


삼시 세끼
얏호! 방학입니다. 어머니들에게 새 과제가 부여됩니다. 바로 삼시 세끼! 아침 점심 저녁을 무엇으로, 어떻게 해먹이냐에 온 관심과 기운이 집중되시지요. 그러다 보니 식구나 친구와 나누게 되는 대화는 온통 먹는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먹는 이야기는 주부의 전유물일까요?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채널을 조금만 돌려도 모두 먹는 이야기입니다. 맛집투어와 먹방은 금방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 인류가 누리는 기술 문명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는데요, 우리의 이야기는 원초적 먹음을 향해 더욱 내달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갑자기 밥 하고, 밥 하는 것 보고, 또 밥 하고 하는 반복 속에서 잠깐 숨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신화 대부분은 취사의 기원을 다룹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의 근원에 ‘불의 기원’ 모티프가 있다고 보았고, 『신화학3』의 제목을 ‘식사예절의 기원’으로 삼을 정도로 인류에게는 ‘먹음’보다 중요한 화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야생의 인디언들이 비닐 하우스도 이마트도 몰랐을 테니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해서 먹는 이야기에 몰두했던 것 아니냐고요? 과연 그럴까요? 오늘은 삼시 세끼 신화에 얽힌 인류의 고민에 대해 탐구해보겠습니다. 먹는 이야기의 인류학적 의미입니다.  

 


꿀에서 재까지 
『신화학 2』의 제목은 ‘꿀에서 재까지’입니다. 여기서 재는 ‘담배’입니다. 남아메리카에는 ‘불의 기원’ 신화 못지않게 꿀과 재 이야기가 인기라고 하는데요, 무척 흥미롭습니다. 신화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신화의 기호들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의 염원을 투사해 그 현실을 주술적으로 변형시키려 합니다. 그럼 꿀과 재의 기호적 능력은 어떤 것일까요? 

 

현실에서 꿀과 담배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는 해도 인간의 ‘취사’를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꿀은 비인간적 존재인 꿀벌이 만들고, 조리하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음식으로 쓰이는 많은 양의 꿀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집합적으로 살아가는) 꿀벌들입니다. 반면 담배는 식사의 범주 바깥에 놓여 있으며 날것으로는 먹을 수 없습니다. 식사의 바깥에 있음에도 담배는 고기를 굽듯이 잎을 말리고 태워 흡입해야 합니다. 재는 취사의 흔적이지만 음식문화의 바깥에 있게 되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의 기호들이 양서류적이라고 했습니다. 물에서나 뭍에서 사는 개구리처럼 신화가 선호하는 이미지들은 특정한 분류 체계에 완전히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꿀은 자연이 만든 음식이지만 인간이 심취하는 것이고 담배는 인간이 애써 익히지만 식사용은 아닙니다. 게다가 담배의 재는 인간 세계에 들어갔다 나와 완전히 자연화된 물질입니다. 그러니 ‘꿀에서 재까지’라고 하는 제목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꿀과 재 이야기를 통해 인류가 신화를 통해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탐구했다고 보았습니다. 

 

신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이나 이미지의 의미를 최대한 풍요롭게 해석해서 전면적으로 기호화합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도 ‘꿀’에 대해 조금 더 음미해볼 수 있겠습니다. 꿀의 가치는 그 맛의 풍부함에 있지요. 그래서 지나친 욕망(색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신혼여행을 허니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꿀은 독이기도 합니다. 유아에게 꿀은 독극물이어서 줄 수 없는데, 인간이 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꿀은 변종에 따라 독성의 범위가 다양해서 여러 가지 병증에 따라 다채롭게 이용할 수 있지요. 꿀은 좋게도 나쁘게도, 온갖 방향에서 이용 가능합니다. 꿀이 일으킬 사고의 중대함과 성격, 소비의 상황, 꿀 수확의 장소와 시기 등은 거의 예측이 불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류의 식물 대부분은 향정신성(마약 성분)이며, 꿀과 비슷한 특징이 있습니다.    

 

자연과 문화 사이, 약과 독 사이 등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인간사를 설명할 수 있는 꿀과 재입니다. 자, 그럼 야생의 신화는 꿀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문두루쿠족의 신화 M157b, ‘농업의 기원 신화’입니다. 

 

① 옛날 문두루쿠족은 사냥감과 재배 식물을 몰랐다. 그들은 야생 덩이줄기와 나무버섯을 음식으로 삼았다. 
② 카사바 식물 어머니 카루에박이 그때 도착했다. 카루에박은 인디언들에게 카사바를 준비하는 기술을 가르치면서 조카에게 숲의 한 곳을 개간하라고 명했다. 그곳에 바나나, 목화, 카라, 옥수수, 세 종류의 사카바(마니옥), 수박, 담배 그리고 사탕수수가 자랄 것이라고 알렸다. 그 다음 그 땅에 구덩이를 파고 자신이 그 안에 묻혔으며, 자신이 묻힌 곳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③ 며칠 후 카루에박의 조카는 식물들이 그녀가 누워 있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부주의해서 그곳을 밟고 말았고, 식물들은 성장을 멈추었다. 그때까지 자란 키가 현재 식물들의 키다.
④ 여기에 불만을 품은 한 주술사가 구덩이 속의 노파를 죽게 했다. 카루에박의 충고를 들을 수 없게 되자 인디언들은 마니쿠에라를 먹게 되었는데, 이것은 카사바의 변종으로 독이 있어서 먹은 이는 모두 죽게 되었고, 다음날 그들은 모두 별이 되었다.
⑤ 그런데 날(설익은) 마니쿠에라를 먹고 이어서 익힌 것을 먹은 다른 인디언들은 꿀파리로 변했다. 그리고 익힌 마니쿠에라의 부스러기를 핥은 인디언들은 신 꿀과 구토를 유발하는 꿀을 만드는 벌이 되었다. 
⑥ 수박을 먹었던 최초의 문두루쿠족도 역시 죽었다. 수박은 악마가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씨앗을 보존했다가 심어 익힌 수박은 해가 없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수박을 마음대로 먹었다. 

 

문두루코족의 신화는 농경의 기원을 선물(증여)로 설명합니다. 카사바 식물의 어머니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야생 덩이줄기나 나무버섯 밖에 몰랐던 인디언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었거든요. 바나나, 목화, 카라, 옥수수, 마니옥, 수박, 담배 등을 한가득 안고 온 식물의 어머니 카루에박이 원한 것은 단 하나, ‘주의하라!’ 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조카의 부주의로 식물의 성장이 멈추지요. 가만히 있었으면 여름 내내 쑥쑥 자라 올랐을 대지의 모든 식물들은 인간의 부주의로 키가 작아져 버렸습니다. 신화는 주의깊고 지혜로운 자만이 풍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부주의에 있지 않고 탐욕에 있었습니다. 왜 더 자라지 못하게 되었느냐며 주술사가 화를 내지요.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주술사는 식물의 어머니에게 왜 더 주지 않느냐며 화내고 그녀를 모욕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인간에게 주어질 것은 독뿐입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키작은 식물이라도 얻을 것을, 이제 인간에게는 약이었던 모든 것이 독이 됩니다.  

 

M157b의 클라이맥스는 ⑤에 있습니다. 독밖에 없던 대지에서 몇몇 인디언들이 주의 깊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날것을 먹은 뒤 익힌 것을 먹음으로써 별이 되지 않고 꿀벌이 되었습니다. 익힌 마니쿠에라의 부스러기(남은 것)을 핥은 이들은 신 꿀과 구토를 유발하는 꿀을 만들게 되었지요. 여기서 꿀벌은 독으로 가득 찬 대지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바꾸는 일을 합니다. 농경이란 인간의 부주의와 과욕을 조심스럽게 다스리는 일이며, 농부는 식물 어머니의 힘을 변용해, 신맛으로써 혹은 구토를 유발함으로써 인간이 보다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꿀벌이 되어야 합니다. M157b는 식물 어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자연의 풍요로움과 인간의 이기심이 만드는 비대칭적 긴장을 대비시킨 뒤, 꿀벌이 된 인간을 제시함으로써 자연계와 인간계 사이의 대칭적 관계 회복을 시도합니다. 

 

놀랍습니다. 야생의 신화는 줄기차게 인간의 탐욕과 부주의를 경계했습니다. 그 스케일이 하늘의 별과 겨룰 정도입니다. M157b는 열대의 숲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몇몇 부족에게만 의미있는 신화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거대한 자연과 미약한 인간 사이에 맺어져야 할 최고의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는 수준까지 갑니다. 우리에게 먹방이 있다면 문두루쿠족에게는 이런 신화가 있었을 텐데요. 그들은 단지 맛있는 것, 미각에 집중된 쾌락에 몰두하기보다는 먹어야 사는 인간의 조건을 깊이 통찰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꿀 이야기를 노래했습니다. 

 

 


숲의 왕이 된 거북

이번에는 꿀과 인류의 문명사를 함께 논하는 신화를 읽어보겠습니다. 오페에족의 신화 M192인데요, 이 신화는 매우 길지만 이야기 덩어리 하나하나가 취사와 문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또 숲의 온갖 동물들이 나와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험담이기도 해서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한 단락씩 끊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신화학2』, 107~110참고). 

 

ⓐ 옛날에는 꿀이 없었고 늑대가 꿀의 주인이었다. 주위의 동물들이 아침부터 꿀로 범벅이 된 늑대의 아이들을 보았지만 늑대는 이를 부인했다. 동물들이 꿀을 요구하자 늑대는 아라티쿰 과일을 주며 이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전부라고 우겼다.


꿀의 기원이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전혀 없었던 태곳적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놀랍지요. 꿀은 인간이 자신의 문명을 갖기 전부터 존재했던 물질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늑대예요. 보로로족의 ‘불의 기원 신화’ 등에서도 알 수 있지만 모든 좋은 것들, 문명화된 것들은 다 자연 쪽에 원래 있었습니다. 신화는 늑대나 표범과 같은 포식자들을 생명력과 기술력이 최고로 나타난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앗! 그런데 이 늑대는 욕심꾸러기네요? 음. 그러니 아마 오페에족 신화 안에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신화가 말하는 최고의 악덕은 탐욕이니까요. 욕심꾸러기는 절대로 자연의 왕이 될 수 없어요.  

 

이야기 안에서 표범이 늑대보다 신성함은 실제 자연계에서 표범이 늑대보다는 상위의 포식자라는 점을 통해서도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신화는 자연을 재현하지는 않지만, 자연 질서가 의미하되는 바를 유비적으로 차용합니다. 제임스 프레이저도 『황금가지』에서 원시의 신화가 상동원리에 따라 자연을 유비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프레이저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적 상태와 인간사 사이의 유비입니다. 프레이저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연물에 기도를 드린다든지 그 사람을 닮은 인형을 해침으로써 당사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든지 하는 원시적 사고방식을 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프레이저의 영향을 받은 레비 스트로스는 이 유비성이 동물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다기보다 자연계 전체(인간을 포함한)와 이야기 자체를 가로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 최고의 포식자는 신화 안에서도 최고로 영험하고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는 식입니다. 

  

ⓑ 어느 날 작은 땅거북은 꿀을 탈취하겠다 선언했다. 그는 배에다 그의 등껍질을 떼어 붙인 후 늑대 굴로 쳐들어가서 꿀을 요구했다. 늑대는 부인했지만 거북이 거듭 요구하자 그에게 바닥에 누워 입을 벌리게 하고 천장에 걸어놓은 바가지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마음껏 먹도록 허락했다. 
   그것은 계략이었다. 완전히 축제 기분에 빠져 있던 거북이 빈틈을 보이자, 늑대는 아이들에게 죽은 나무를 모아 거북을 굽게 했다. 하지만 거북은 껍질을 배에 붙인 탓에 감각을 잃어 고통을 모르고 계속 꿀을 먹었고, 늑대들만 연기로 괴로워했다. 바가지의 꿀이 비자 거북은 조용히 일어나 장작 숯불을 흩어버리고 늑대에게 다가가 지금 모든 동물들에게 꿀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꿀을 구하러 나서는 이가 왜 ‘작은’ 땅거북일까요? 그림형제가 수집한 민담집의 모든 주인공이 작았습니다. 작다는 것은 자기 중심을 따로 갖지 않다는 의미이고, 그렇기 때문에 치우침이 있는 관계 사이를 중재할 수 있습니다. 균형점을 만들기에 적당하지요. 그럼 왜 ‘땅거북’일까요? 땅거북은 등을 배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작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몸의 아래와 위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위치 조정의 달인이니 작은 땅거북이야말로 신화의 주인공이 될 만합니다. 그래서 거북은 꿀을 가득 먹음으로써 마침내 작지 않은, 조용히 늑대의 만행을 정리하고 이제는 꿀을 나누어야 할 때!라는 선언을 과감하게 내리는 큰 존재가 됩니다. 

 

 

참, 거북의 능력으로 주목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예의입니다. 거북은 자신의 요구를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이처럼 신화는 ‘예의를 갖춘 요구’가 자연 안 만물이 관계맺는 양식이라고 봅니다. 늑대는 거짓말로 그 요청을 거절했지요. 그래서 늑대는 꿀처럼 모든 동물이 원하는, 모든 동물을 중재할 수 있는 고도로 관계적인 물질을 주재할 능력을 잃는 것입니다. 

 

ⓒ 늑대는 도망을 쳤다. 거북의 명령에 따라 동물들은 늑대를 포위했고, 프레아들쥐가 늑대가 숨어 있는 숲 둘레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둥글게 에워싸자 자고새 한 마리가 불기둥을 피해 도망쳤다. 거북만은 자고새로 변해 도망친 것이 늑대였다는 것을 알았다. 
  거북은 자고새에게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거북의 명령에 따라 동물들은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돌진했고 추격이 며칠간 이어졌다. 자고새를 덮칠 때마다 새는 다시 날아 도망갔다. 거북은 다른 동물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자고새가 벌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벌 사냥이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용기를 잃은 동물들에게 거북이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겨우 석 달 동안밖에 걷지를 않았어. 이제 겨우 갈 길의 반밖에 안 왔잖아. 저기, 너희들 뒤쪽에 말뚝을 좀 봐. 쫓아갈 방향을 지시하고 있잖아.”


꿀을 충분히 먹은 덕분에 작은 거북은 더 이상 작지 않게 되었습니다. 숲의 모든 동물에게 명령을 내리고 방향을 지시할 정도의 능력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오직 거북만 늑대의 몸바꿈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늑대를 잡기 위해서는 여섯 달 동안이나 벌이 날아간 방향을 보고 걸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 전체가 꿀이 익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에 맞추어 인디언의 삶에도 어떤 주기적 의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거북은 다음날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다음날 실제로 그들은 벌들의 ‘집’을 보았는데, 그 벌집 입구에 독 있는 말벌이 지키고 있었다. 새들은 한 마리씩 차례대로 접근을 시도했다. 말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물을 투하해서 새들을 공격했고, 새들은 도취해 떨어져 죽었다. 이 새들 중 가장 작은 딱따구리(혹은 벌새?)가 말벌을 피해 꿀을 얻었다. 거북은 말했다. “이제 우리는 꿀을 가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다 먹어 버린다면 곧 바닥이 날 거야” 거북은 꿀을 집어 각 동물들에게 집을 짓게 하고 꿀을 딸 수 있는 식물을 얻기 위한 꺾꽂이 가지 우마 무다를 주었다.

 

석 달을 두 번이나 해서 걸은 뒤 마침내 새들은 말벌에게서 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걷고 또 걸었다’라고 하는 말은 꿀을 얻기 위한 노력의 지난함을 뜻합니다. 

 

다음이 압권이지요. 거북은 승리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조심 또 조심합니다. ‘우리가 다 먹어버린다면 없어질꺼야!’ 작기만 하던 거북이 이토록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담대하게 늑대 아가리 앞에서 꿀을 섭취할 용기를 발휘한 덕분입니다. 또 꿀 자체가 지혜를 농축시키고 발효시키는 음식입니다. 그렇게 동물의 왕이 된 거북은 모든 동물이 꿀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꿀 재배를 계획하지요. 농경은 이렇게 ‘모두’가 필요한 만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거북을 비롯한 동물의 우두머리는 혼자 꿀에 탐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계속 주지시킵니다.   

 

그러고 보니 꿀을 땅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처럼 생각했네요? 보통 꿀은 나무둥치 표면에 붙어 있거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찾는데요, 벌 중에는 속이 빈 나무둥치 속에 집을 만드는 종이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만다사이아벌은 그들이 분비한 밀랍과 채취한 찰흙을 함께 반죽해서 둥근 모양의 항아리를 만드는데요, 이 항아리의 용량도 다양해서 때로는 수리터씩 풍미가 대단한 꿀을 만들어낸다고 해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화가 말하는 꿀도 만다사이아벌과 같은 종류의 벌이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시인들의 분류체계에서 꿀은 식물에 속합니다. 재배 가능한 식물이니만큼 생장의 시기와 기간, 생장시키는 자의 능력이 중요합니다(『신화학2』, 87쪽 참고).

 

ⓔ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동물들은 꿀 농장에 대해 염려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너무나 타버릴 듯 뜨거웠기 때문이다. 많은 새들이 꿀 농장에 다다르려고 했으나, 그 뜨거움 때문에 앵무새는 만가바 과일나무 위에, 아라앵무새(아라히야신스)는 안락한 숲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잉꼬가 하늘 높이 날아 꿀 농장에 도달했다. 동물의 우두머리가 곧 꿀 농장에 가 보았다. 사람들은 심으려고 받아둔 꿀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걱정에 찬 우두머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곧 꿀 농장을 갖지 못할 것이고, 아주 조금, 아니야,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이제 모두가 꿀을 갖게 될 것이다.”

 

꿀 농장의 뜨거움은 오페에족 사람들에게 건기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를 가리킵니다. 신화는 자연의 변화와 흐름을 직접적으로 이렇게 지시하지요. 건기의 한 가운데에서 꿀은 최고도로 풍부해집니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그 같은 부의 한 가운데에서 기다려라, 또 기다려라고 합니다. 탐식을 멈추라는 뜻이지요. 아마 이 우두머리는 거북일 텐데, 농경의 창시자인 거북은 끊임없이 절제를 강조합니다.


위에서 꿀에게 다가가지 못한 새들이 여럿 언급됩니다. 앵무새와 아라앵무새, 그리고 잉꼬. 신화는 이 새들의 섭생을 관찰한 뒤에 꿀벌의 생태와 근친적인 것들을 기준으로 이들에게 나무를 배정해줍니다. 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숲 생태계 안에서 종들의 위치를 지정해준다고 할 수 있지요. 농사의 진행과 생물의 자리찾기가 나란히 갑니다. 이제 대단원을 읽어 봅시다.

    

ⓕ 얼마 후 동물의 우두머리는 주민들을 불러보았고 손도끼를 주면서 꿀을 따러 가라고 말했다. “이제 숲은 꿀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꿀이 있다. 보라 꿀, 만다과리 꿀, 자티 꿀, 만다사이아 꿀, 카카-포고 꿀 등 정말 모든 꿀이 있다. 당신들은 꿀을 따러 가기만 하면 된다. 만일 어떤 종류의 꿀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음 나무로 가라. 거기에는 다른 꿀이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꿀을 딸 수 있다. 당신들이 가지고 간 바가지나 다른 그릇에 담을 만큼만 꿀을 딴다면, 꿀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져올 수 없는 꿀은 그 자리에 남겨놓아야 한다. 또한 다음번을 위해 입구(손도끼로 찍어낸 속이 빈 나무둥치 구멍)를 꼭 막아놓고 돌아와야 한다.”
  그 이래로 사람들은 충분한 꿀을 갖게 되었고, 숲을 개간할 때마다 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나무에는 보라꿀, 저 나무에는 만다과리 꿀, 또 다른 나무에는 자티 꿀 등 모든 꿀이있다.

 

동물들은 우두머리의 가르침대로 기다렸습니다. 때에 맞게 자신의 욕망을 조절했고, 그 결과 ‘모두’가 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것이 되겠습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숲의 권력론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우두머리란 모름지기 명령을 내리는 자입니다. 숲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숲이 우두머리에게 강요하는 바는 용기와 지혜입니다. 작은 거북은 모두가 꺼린 ‘늑대에게서 꿀을 가져오기’ 미션을 수행했고, 자연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자신의 부족민들에게 ‘절제’를 가르칠 줄 알았습니다.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 제 멋대로 행동할 수 있어서 동물의 왕인 것이 아니라, 숲의 생태학에 통달했기에 왕일 수 있었지요. 새와 동물들이 명령에 복종한 것은 거북에게 군대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가 있어서였습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생태학입니다. 그런 왕의 말에 복종할 때, 그것은 비굴한 일도 억울한 일도 아니게 됩니다.   

 

참고 또 참은 결과 모두를 위해 꿀 자체가 질적으로 분화했고 다양해졌습니다. 우두머리가 ‘보라!’라고 말하는 대목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모든 이들이 눈을 들어 숲 전체를 바라보며 감탄했을 겁니다. 여기에도 꿀, 저기에도 꿀. 이 나무에는 만다과리 꿀, 저 나무에는 자티 꿀! 신화는 꿀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 전체의 풍요로움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요는 양적 풍요가 아니라 질적으로 상이한 종류가 창발하는 부입니다.


농경의 배신
탐식하던 늑대가 꿀의 주인이던 시절에 꿀은 하나밖에 없었고, 원망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등을 배로 만들며, 비대칭적으로 치우쳤던 꿀의 방향을 조율했던 거북 덕분에 숲은 꿀-재배 기술을 얻을 수 있었지요. 여기까지 읽으면 M157b처럼 농경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M192에는 대반전이 있습니다. 오페에족의 신화가 특이한 것은 신석기 혁명인 농경을 뛰어넘을 길을 수렵에서 찾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종류의 꿀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음 나무로 가라. 거기에는 다른 꿀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정확하게 채집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꿀의 기원을 다루는 오페에족 신화는 재배식물의 기원을 다루는 남아메리카의 여타 신화와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신화학1』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재배식물에 관한 신화는 M87~M92까지 대부분, 천상의 여인이 사리그 들쥐로 변해 인간에게 옥수수 등의 존재를 알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농업을 모르던 인류는 버섯이나 썩은 나무를 먹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리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내어 나무를 자름으로써 그들은 노력 없이 풍요로울 수 있었던 시절을 떠나, 애써 씨 뿌리고 숲을 개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경작 식물이 다양해지고 인류는 분산해서 다채롭게 살게 되었다고요. 

 

오페에족 신화는 다릅니다. 꿀은 없어도 될 음식이지만 굳이 얻고 싶은 욕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삶의 일차적 필요를 넘어서는 욕망의 문제를 다루는 셈입니다. 때문에 꿀 재배는 농경의 위험을 다른 측면에서 거론하게 됩니다. ⓔ에 나오는 뜨거운 대지가 말해주듯 농경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갑자기 생산해버립니다. 생산력만 따진다면 이는 분명 농경의 이점입니다. 오페에족이 보기에 농경은 분명 잉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농경을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신화에서는 아예 농경을 근절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잉여생산이란 결국 생산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며, 생산이 생산을 낳는 ‘과정’만이 인간에게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결국 식물을 왜 길러야 하는지, 인류 삶의 근원적 목적을 잃어버리게 하겠지요. 그리고 무한한 생산은 결국 무한한 소비로 이어질 텐데요, 순환의 회로를 무시한 탓에 생산된 것은 끊임없이 쓰레기로 소비될 테니까요. 오페에족은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이 심으라고 받아둔 꿀조차 먹어치울 만큼 생산과 소비가 무한히 서로 맞물리는 폐쇄회로가 꿀 재배와 함께 개시된다는 것을! 그러니 농경은 거절해야 마땅합니다. 오페에족은 꿀을 통해 농경의 배신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반면 재배된 꿀이 야생 꿀로 변함으로써 벌은 다양해집니다. 유일한 늑대의 꿀 대신에 여러 종류의 꿀이 나타남으로써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꿀 수혜자의 욕구 역시 운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됩니다. 그렇게 남은 꿀은 다른 이를 위해 벌통에 보존되겠지요. 오페에족의 신화는 이러한 공생의 지혜를 문명사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새롭게 제시했던 것입니다. 

 

인류사는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라고 하는 역사발전의 궤 위에 있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농경시대로 진입하지 못했다 해서 19세기 비서양의 여러 지역들은 미개하다며 손가락질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페에족 사람들은 농경으로의 ‘퇴보’를 거절하고 채집으로의 ‘도약’을 시도하라고 격려합니다. 이는 반신석기적 태도입니다. 오페에족 꿀의 기원 신화에 따르면, 농경이란 더 많은 것을 위한 자연력의 이용이며 그때의 ‘더 많음’이란 질적인 많음 즉 도처의 뭇생명이 가진 다채로운 욕구의 충족이지 단순한 생산량의 증가는 아닙니다. 그래서 오페에족은 채집이 농경보다 훨씬 더 우월한 생활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채집에서 사람은 필요한 만큼 얻고, 부족한 만큼을 찾아 이동합니다. 발 딛고 있는 숲의 이 자리가 나에게 이롭다면 타인에게도 이로울 수 있음을 늘 주의합니다. 오페에족 인디언들에게 농경은 이런 지혜를 갖기가 지극히 어렵기에 거절해야 마땅했습니다.  

 

마셜 살린스라는 인류학자도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석기시대 경제학』). 잉여를 ‘몰랐다던’ 원시의 인디언들이 실은 잉여를 ‘거절하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고요.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남아메리카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인디언들의 엄청난 여가 시간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들이 쓸모 있는 농기구 같은 것을 주면, 인디언들은 그것을 가지고 노동 시간을 줄이고자 했지 작물 생산량을 늘리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노동력, 토질이 뛰어난데도 개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지. 인디언들은 더 많은 것을 만들고 쌓기보다는 지금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만드는 일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옷이 있는데도 또 사고, 돈이 있는데도 또 벌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인의 시선과 불안한 미래가 주는 초조함을 전혀 ‘몰랐던’ 인디언들에게 잉여생산이란 불필요한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살린스는 그러한 야생의 문화를 ‘원초적 풍요사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풍요로움이란 축적된 재산에 있지 않고 나날이 누리는 생명력에 있다는 의미에서였지요. 

 

 

자연과 문화 사이를 중재하는 꿀의 역할에 주목해서 남아메리카 북쪽에 거주하는 몇몇 투피어 계통 부족은 의례 생활과 종교적 사고에 있어서 꿀을 중심에 둔다고 합니다. 친족관계에 있는 템베족처럼 마란하오의 테네테하라족은 그들의 축제 중 가장 중요한 축제에 꿀을 헌납합니다. 축제는 매년 건기의 마지막 달인 9월이나 10월에 행해집니다. 순수한 축제는 며칠 동안만이지만 축제의 준비는 6개월에서 8개월 전부터 시작됩니다. 3월이나 4월부터 야생 꿀을 따야 하고 이 꿀을 저장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의례용 오두막 천장에 매달아 놓은 호리병박 그릇에 보존해야 합니다. 보통 오두막 천장에 120개 내지 180개의 호리병박 그릇이 매달려 있고, 각 그릇은 1리터 이상의 꿀이 담겨 있는데 나란히 줄지어 매달려 있는 것이 6줄에서 8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꿀 채집이 계속되는 동안 부락민들은 매일 밤 노래를 하기 위해 모여 앉습니다. 이때 여자들은 의례 오두막 안인 ‘꿀 밑에’, 남자들은 춤추는 마당 즉 ‘바깥’에 머뭅니다. 이때 부르는 노래는 다양한 사냥감과 각 사냥감과 연관된 사냥 기술에 관련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꿀 축제는 풍성한 사냥을 기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때의 풍요로움도 남획은 아닐 겁니다. 필요한 만큼 때에 맞게 잡을 수 있는 능력이 풍성한 사냥의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이제 밥하기의 인류학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반신석기적 태도에 주목했습니다(『신화학2』, 112쪽). 레비 스트로스도 채집에서 농경으로, 산업혁명에서 이어지는 문명의 단선적 궤도를 의심한 것입니다. 인류가 ‘국가’ 장치를 갖게 된 것은 신석기 혁명 때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신석기 혁명이란 농업 혁명인데, 갑자기 생산력이 비약하게 된 인류는 그것의 관리와 배분을 위해 관료제를 갖추게 되고 통치의 효율을 위해 문자생활을 더 넓게 해나갔다고요. 그런데 오페에족 신화를 읽어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상식인가? 

 

저는 초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아즈텍 문명에 관한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즈텍 문명은 14세기부터 시작해 1521년 에스파냐 침입 직전까지 남아메리카의 고대 제국을 번성시켰습니다. 노예들의 심장을 인신공양으로 바쳐 태양을 움직이는 의례를 했을 정도로 자연과 인간사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면서 남아메리카 최고의 도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아즈텍 문명에는 문자가 없었습니다.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경 사회였지만 철기로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1521년이면 중종 때입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1443년 이후입니다. 우리가 ‘문명’을 꼭 ‘농경이라는 바탕 위에 문자라는 제도를 입힌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동남아시아 산악지대의 화전민들을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조미아(Zomia)라고 하는 파쇄(破碎)지역을 만들며 끊임없이 국가라는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방식으로 삶을 일군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의 한 사람 한 사람은 국민으로 등기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조미아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스콧은 인류의 자랑스러운 성취인 농경이 실은 국가의 역사화 작업 속에서 자명해졌을 뿐임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농경의 위험을 주목한 사례가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벼농사가 말해주듯 단일면적당 생산량을 거의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작물은, 그것을 재배하는 인구 자체를 계량화할 수 있습니다. 수확에 따른 물 관리가 요구하는 집단화, 저장량의 손쉬운 과세화 등, 벼농사는 생산물과 생산자를 거대한 통치기구에 고착적으로 밀착시킬 수 있는 방편이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읽은 신화도 이 점을 경계하고 있지만, 농경은 작물을 선택재배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욕망도 단일하게 만듭니다. 동물을 가축화함으로써 자연 안에서 서로 대등했던 양자는 이제 주인과 그의 소유물로 위계화됩니다. 탐욕이라는 말을 다시 음미해보겠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대상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욕망입니다. 문제는 그 특정 대상이 나에게만 의미있지 않고. 모여 사는 사람 전부가 똑같이 원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탐욕이 싹트는 장소란, 이미 특정한 욕망의 저수지입니다. 농경은 욕망의 저수지가 되기 쉽기에 신화는 그 점을 일찍부터 경계했습니다. 꿀의 기원 신화를 노래한 사람들에게 신석기 혁명이란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루지 않은 것입니다.   

 

스콧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사의 많은 사람들은 벼농사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화전을 선택하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풀숲을 돌아다니며 살았다고 합니다. 산악지대란 쫓겨난 사람들의 은신처가 아니라 자율적 삶을 선택한 자들의 이용처였다는 것이지요. 당연합니다. 욕망의 저수지이니만큼 획일화된 삶의 방식 때문에 각종 전염병에 시달리고, 시기와 질투 때문에 피할 수도 있었을 정치투쟁에 사람들이 달려들 테니까요. 또 수탈을 위해 벼농사화한 국가이고 보니 농사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기도 잘했겠지요. 남들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바둥거리면서 결국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병증을 앓고 사느니, 조금이라도 나답게 넉넉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평지의 농사지대를 벗어나고자 했을 겁니다. 

 

스콧은 이들 탈주민들에게서 발견되는 신화를 소개하는데요, 농경을 피해 달아난 이들이 읊는 이야기에는 ‘원래 는 문자를 갖고 있었지만 결국 부주의해서 잃어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종종 들어간다고 합니다. 문자라는 것이 꼭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것을 얻거나 잃는 일은 인류의 한 사람인 내가 충분히 선택 가능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스콧도 강조하듯이 문명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단선적으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삶 방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농경에 기반한 탐욕적 제국 질서가 갑자기 도입되어, 그 기준에서 역으로 미개한 야만이 지정될 뿐입니다. 그 장소가 미개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는 것이 ‘문명’이라면, 도대체 그 ‘문명’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더 주의깊게 보아야겠습니다.  

 

밥 하다 말고 신화 몇 편을 읽었습니다. 먹는 이야기는 공생의 생태학을 다루기에 가장 좋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한 끼의 먹음이 인류의 문명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실감한다면, 부엌이 매끼 밥을 토해내야 하는 공장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듯 합니다. 늦잠에 티비 시청으로 뒹굴뒹굴이니 두끼만 먹어도 됩니다. 밥에 김 하나 얹어도 오페에족에서 조미아까지 나눌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니, 충분히 풍성합니다. 만국의 어머니들이여, 밥하기의 인류학자가 되어 보아요!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