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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네트워크의 인류학

by 북드라망 2022. 8. 22.

네트워크의 인류학    



1. 직립의 자유, 쓰기의 자유
고릴라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글쓰기에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글을 쓰지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지성이 뛰어나서는 아닙니다. 영장류(primates)에서 호모 종이 분화되어 나올 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직립입니다. 오랑우탄과 침팬지 등 영장류목 안 유인원인 긴팔원숭이(gibbon),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등을 보면 손과 발은 모양이 서로 같습니다. 이들은 나뭇가지를 타고 넘으며 생활하기에, 발도 손처럼 잡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엄지 발가락은 잡기 기능을 포기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땅을 딛고 나아가기를 선택해 지지대로서 엄지 발가락을 진화시켰어요. 덕분에 인간은 침팬지가 쓰는 것에 비해 25퍼센트 에너지밖에 쓰지 않고 걷게 되었습니다. 많은 포유류가 인간보다 빨리 달릴 수 있지만 인간보다 더 멀리 갈 수는 없지요.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왜 여기에 있나?’와 같은 미지에 대한 욕망은 걷기 능력이 준 선물입니다.  

 

직립과 함께 인간의 두 손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자유로워진 손의 일이 도구의 사용입니다. 물체를 잡는 것을 넘어서 물체와 관계맺을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에게 기술은 인간 손과 대상을 접속시키는, 인간 개개인의 신체와 그것을 둘러싼 물질적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니 손으로 하는 글쓰기도 만물과의 관계맺음을 그 근원적 본성으로 삼는다고 해야 합니다. 신체가 자기 외부 신체와 특정한 방식으로 합성을 이루려고 노력하듯이, 글쓰기는 내 정신 안에서 작동하는 관념과 바깥 현상의 관념을 능동적으로 연결해 합성하려는 기술입니다. 뭔가에 연결되려는 시도라는 관점에서 글쓰기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누구나 언제라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됩니다. 즉 인류는 네트워크의 임무를 띄고 이 땅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인류학적 의미로 쓰기를 고찰하게 된 것, 무엇보다 작가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최근입니다. 그동안은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는 것이 부족했으니까요. 위대한 고전을 읽고 훌륭한 스승을 모셔도 역사를 해석하고 전망할 비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년 전 쯤 그렇게 자신에게 큰 실망을 하고 공부의 산을 내려와 신도시로 도망을 쳤습니다.  

 

몇 달을 혼자 있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더라 해도 공부는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공부를 안 해도 살기는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달랐습니다. 구체적으로, ‘나는 뭘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를 질문하자마자 앎의 지평이 확 바뀌었습니다. 저는 절박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줄곧 공부 공동체에서 사람을 사귀고 밥벌이를 했기 때문에, 공부를 놓자마자 금방 고립이 되었습니다. 친구도 없고, 갈 곳도 없고, 할 일은 더더구나 없고. 어떻게든 생존력을 키워야 했고, 새롭게 세상에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코로나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팬데믹도 이해해야 했고, 세종시이니 공무원 천국의 생리도 관찰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진짜 실감했지요.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발딛고 섰는 이 조건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필요로 했습니다. 조금씩 자료를 모으고 노트를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제가 많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를 포함해서 어떻게든 자기 삶을 꾸려보려고 애쓰다 보면 알아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온갖 정보들 사이에서 끝도 없이 감정과 상념이 일어나지요. 이런저런 정보들 속에서 제 삶의 방향이랄까, 모습이랄까를 ‘구상’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노트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결국 알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것은 정리하는 일임을. 정리란 정보의 계열 만들기이고, 계열을 잇기 위한 문제 벼리기입니다. 어? 정리가 곧 글쓰기 아닌가요? 쓴다는 것은 앎의 줄기를 만들어 뻗쳐내는 일이니까요. 또한 정리란 문제에 대한 나름의 풀이입니다. 그러니  노트에 쓰인 것은 몇 가지 문제를 두고 한 다양한 풀이였습니다. 

 

 

먹고 살기란 얼마나 잘 외부 물질을 흡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살 궁리를 한다는 것은 내가 무엇과 접속해서 어떻게 그 관계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지요.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모든 관계야말로 살아가는데 근본적이라면, 내가 어떻게 다른 것들과 만날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무턱대고 아무것이나 마구 들이켜서도 안 되고, 소화할 때에는 제 몸과 마음 상태도 잘 알아야 합니다. 글이란 기본적으로 내 삶의 조건을 알아보는 탐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진리가 떨어지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진리를 베껴오는 일이 아니라, 생계를 모색하는 내 고민의 과정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답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존재 궁극의 이치를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출발해 그곳에 이를 것인가였습니다. 글쓰기란 그 모색의 기술이었어요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저는 쓰기의 놀라운 능력에도 새삼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담아서 훌륭한 글이 아닙니다. 내 출발점으로부터 암중모색 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이 오롯이 들어갈 때 그 글은 본보기가 됩니다. 좋은 글을 쓸 필요가 없고, 그저 주어진 문제를 부둥켜 안고 뒹구는 만큼이 표현되면 됩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번역을 해볼까, 초등 독서교실을 열어볼까 등등 생계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저는 생각하기의 재미와 정리하기의 어려움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지요. 필요한 것은 공부다, 앎들 사이의 네트워킹이다!  

 

한편, ‘알아야 할 것이 정말 한도 끝도 없을까? 궁극의 앎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생계와 육아 등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고, 세상에는 팬데믹과 기후위기 등 더 큰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인류는 많은 문제를 통과해가며 본원적 진리에 대해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문제를 푸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인류학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2. 연결의 테크놀로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자유란 타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짜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생존력이란 자연물과의 합성 능력 그리고 다른 인간과의 공존 능력에 달려 있고, 그때의 ‘공존’은 인류의 이야기 안에 자신의 인생을 짜 밀어 넣는 상태를 뜻합니다. 단편적인 정리들은 더 큰 앎의 바다에서 작동하는 여러 정리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제 과제가 나옵니다. 무엇과 연결될 것인가, 어떻게 다른 것들과 함께 정리할 것인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열대』는 제가 읽고 쓰면서 살겠다고 다시 결심했을 때 처음 읽게 된 책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던 터라 레비-스트로스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큰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이 인류학의 거장은 어떤 글을 썼을까? 그리고 몇 장 읽어나가기도 전에 눈을 커다랗게 뜨게 되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난 양의 어휘에 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 낯선 단어의 폭포 밑에 서 있는 듯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쓴 ‘일몰’은 압권이었어요. 레비-스트로스는 날마다 지는 해이건만, 그날 대서양의 해질녘을 기가 막힌 흐름으로 써내려갔습니다. 푸른 것은 바다고 붉었다가 검어지는 것은 하늘. 이렇게 한 줄이면 끝날 일을 시간의 흐름 안에 온갖 인상을 말아 넣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장면을 엄청나게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방대한 어휘는 레비-스트로스가 인간과 동식물, 사물들의 세계에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주에 간 비행사는 달의 뒷면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마이클 콜린스,『플라이 투 더 문』). ‘아, 좋아!’ 뜻밖의 상황에 처하면 그 조건과 연결될 방법을 몰라 말을 잃게 됩니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총을 든 사병이나, 갑자기 쏟아지는 물폭탄을 맞은 직장인은 없던 상황과 자신을 연결하지 못해 허둥대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실어증을 동반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물론 관심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아예 할 말도 없지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끼들 대부분은 고유명이 아니라 학명으로 불린다고 합니다(로빈 윌 키머러,『이끼와 함께』참고). 나와 무관해 보이는 대상에게는 줄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어휘로 다채롭게 사태를 표현할 수 있음은 능동적으로 외부 상황과 관계 맺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란 인류가 동류의 인간이나 바깥의 자연과 스스로를 연결시키기 위해 발명한 관념 조작 기술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쓴 많은 어휘는 그의 기억력이 출중함을 의미하지만, 100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100권의 책을 쓸 수 없듯이 안다고 해서 다 쓸 수 있지는 않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자기 주변의 상황과 자기 사이에 무수한 다리를 놓는 일을 쉼 없이 했을 겁니다. 글쓰기란 관계 구성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연결과 정리의 기술로서 인류학적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소설을 공부했습니다. 식민지의 울분과 한에 대해 공감했고요. 프루스트나 카프카처럼 20세기에 문학으로 사유실험을 했던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어보려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리 독자의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해도 결정적으로는 작가에게 내 독해를 확인받는 작업이 됩니다. 식민지라고 하는 우리의 과거나, 먼 나라 작가의 이야기 읽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것은 저 자신이 작품의 기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쓸 거리가 없었던 이유는 제가 뭔가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저의 모름은 원본의 진리성을 기준으로 한 평가였습니다. 

 

인류학은 ‘기원’에 대해 물을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내가 연구하는 그 세계에 늘 외부자, 이방인, 무식자로 들어가서 관찰할 수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많은 경우, 무문자사회인 타자들의 세계는 역사를 갖지 않기 때문에 원본이 없습니다. 연구자도 그곳에 사는 사람도 정확하게 기원을 재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류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갖는 허구성을 늘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인류학자의 위치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내 인식의 틀로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읽힌 정보는 내 정신의 활동 안에서 특정한 목적에 따라 재규정되고 편집됩니다. 때문에 제임스 C. 스콧도 설명하듯 지배의 기술이 곧 읽기의 기술입니다(『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참고). 그런데 인류학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읽었다면 그는 눈 앞에 펼쳐진 타인의 삶을, 자신의 시력에 맞게 광률을 조정한 안경을 끼고 보듯 재단했다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인류학의 목표지요. 인류학은 타인의 삶을 제대로 받아쓴다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습니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말해 보자면, 읽었다면 그는 타인의 세계 안에 흡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자리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자 자신이 정신분열중이니 그의 시선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그럼, 남는 것은 그러한 분열의 한 가운데로 계속 들어가는 일입니다. 어떤 확정도 거부하기에 인류학자는 그렸던 지도를 매번 태우고 다시 그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런 작업을 반복해야 할까요? 레비-스트로스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답은 이렇습니다. 인류인 이상, 우리에게는 어떤 인식적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팽나무나 거미가 지각하는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없듯, 인간의 신체와 정신의 작동방식에는 어떤 특질로서의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자기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넘나드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문화적 차이란 인간의 조건이라는 한계 안에서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표현형들이 됩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자기와 타자 사이를 넘나들게 되면 그 넘나듦의 경험 안에서 인식의 고유한 한계 즉 인간 정신의 작용방식의 최초형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생의 대부분을 이 근원적 형식 논리의 파악에 바쳤습니다(『신화학』). 

 

이것을 번역하기에 비유해볼 수도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번역가의 과제」(1923)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벤야민은 기본적으로 특정 언어의 원본성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 옮겨진 바의 정도를 영어에 물을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을 물을 수 있다고 가정하기 위해서는 어마무시한 전제가 작동해야 합니다. 언어를 셀 수 있는 무엇으로 취급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할까요? 한국어나 일본어가 만질 수 있고 칼로 자르거나 풀로 덧붙일 수 있는 실재일까요? 

 

번역의 원풍경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처음 영어를 알게 된 한국어 사용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번역해서 만들어낼 한국어 사용자는 독일어를 모르기 때문에 번역이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소위 ‘원문’이라고 하는 독일어 저자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잘 옮겼나 옮기지 못했나를 판단할 길이 없지요. 벤야민은 여기에서 번역가의 과제를 제시합니다. 번역이란 그 어떤 대가가 오더라 해도 자기가 쓰는 언어의 한계를 실감시키는 작업입니다. ‘애플’ 하나를 한국어로 옮기려도 해도 그것이 국광인지 부사인지, 추석 전인지 뒤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뉴턴의 애플인지, 스티브 잡스의 애플인지도 다르지요. 이때 도착하는 ‘사과’라는 단어 하나는 가능한 모든 모습의 사과를 거세하고 어쩔 수 없이 선택된 말입니다. 

 

과연, 번역가는 무엇을 경험할까요? 번역가는 이 언어의 한계와 저 언어의 한계 사이에서 우리에게 말을 하게끔 하는 정신의 본질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번역된 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으로 오직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과’를 선택하기 직전의 무의식 차원에서 경험됩니다. 번역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요?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특정한 어휘로 확정하려고 할 때, 즉 언어적 억압이 진행될 때에만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는 의미의 가능성들이 억압에 저항하며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다시 글쓰기의 문제로 바꾸어 보면, 쓰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알았는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떻게 그 연결에 실패했는지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자적으로 보면 ‘읽기’란 자기 경험의 유한함을 넘어가는 행위입니다. ‘쓰기’는 무엇일까요? 레비-스트로스는 생애 모든 저작을 프랑스어로 썼습니다. 쓰기란 그가 애초에 속했던 공동체로 복귀하는 행위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돌아온 자는 떠났던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문화의 표층에서 작동하는 습속과 통념의 심층으로 한층 더 내려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특정 문화의 상식이 부분적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문화와 저 문화 사이의 심연을 느끼며, 문화를 구성하는 인간의 의식적 본성을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인류학적 글쓰기란 연결 기술로서의 쓰기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때의 연결, 이야기짜기란 타자와의 관계 모색 과정에서 내 관점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 무지로부터 심층적 앎 즉 인류의 근원적 지혜를 모색하는 일입니다. 쓸 만한 것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써 이 운명의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3. 놀라운 대칭성
레비-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인류의 원초적 사고 형식은 대칭성을 지향합니다. 『슬픈열대』는 대칭성의 발견 과정을 기술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칭성이란 물리학에서는 ‘변환에 대해 형태가 불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앤서니 지, 염도준·양형진 옮김,『놀라운 대칭성』). 구와 사각형, 삼각형을 떠올려볼까요? 각 형태의 중심에서 자를 대고 자른다고 했을 때 변화가 없는 형태는 무엇일까요? 구입니다. 변환에 대해 형태가 불변한다는 것은 특정한 위치에 대한 편향이 없고, 특정한 시간에 대한 편향이 없다는 법칙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뉴턴의 사과, 상대성 이론 등 물리학의 모든 법칙은 변환의 조건, 작용의 법칙이 모든 조건(전체)을 만족시키는 이론을 모색합니다. 그 바탕에는 법칙의 대칭적 요구 충족이라는 가정이 있습니다. 각 조건에서 수행되는 물리 법칙들이 계속 합산되면서 모순 없이 환원될 수 있음 또한 여기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환원적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시도한 인류학은 특정한 인류의 습속에 대한 연구가 아닙니다. 인류학은 출발부터가 제국주의학이었지요. 오만한 유럽이 자기를 ‘문명’이라고 과시하기 위해 착취해도 되는 대상을 찾아다니다 만들게 된 학문입니다. 자기와는 다른 자들을 틀렸고, 못나다라고 규정하기 위해 시작된 지적 활동이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류학자가 될 꿈을 꾸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타자’를 멸시하는 사고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고법을 모색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랬기에 남미에서 인간 사유의 근원적 작동방식을 통찰했고 ‘야생의 사고’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지요. 그런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사유의 역사, 인간 진리 구성의 역사를 다룬 철학적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당대에 사고법에 반하는 인류학이었기에 반-철학적이기도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1955)의 도입부에서 어리석은 변증법으로 얼룩진 자신의 학창시절을 분통을 터뜨리며 회고합니다. 『야생의 사고』(1962)에서도 레비-스트로스는 정반합의 방식으로 도출해내어야 하는 ‘합’의 상태를 선제한 사고에 진저리를 칩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라는 테제를 내세우며 비서양의 여러 나라들에게 강요된 제국주의에서처럼, 두 항 사이에서 부정을 색출하며 자기 욕망을 타자들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모순을 해결하는 변증법은 ‘사고적 억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는 변증법과는 다른 ‘대칭적 사고’를 사유의 근원 모델로서 새롭게 부각시켰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대칭성은 물리학에서의 대칭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위치적 변환에 따른 형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사고법, 시간적 변환에 따른 형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사고법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사고는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 즉, 남아메리카 우림에 사는 보로로족 인디언이나 콜레주 드 프랑스 철학교실의 교수나 인간인 한에서 근원적으로 동일한 작동의 형식을 갖는 사유를 의미합니다. 이런 대칭적 사유에서 핵심은 ‘인간 정신은 공간을 가리지 않는다,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야만에서 문명으로’라고 하는 진화론적 단선적 시간관은 무너집니다. 

 

물리학에서라면 대칭성의 요구에 따라, 천체의 운동이 중력에 의해 지배되므로 중력에 관한 완전한 이론은 우주의 동역학을 말해줄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 물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을 겁니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으로 자연 관찰하기를 즐겼고, 남미에 돌아와서부터는 과학 잡지를 열심히 읽었으니까요. 레비-스트로스는 자연학의 관점에서 철학을 바라본 스피노자처럼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인 이상 인간의 사고가 자연법칙과 특별히 다르다는 상식, 백인이 인디언보다 특별히 이성적이라는 편견은 어리석은 아집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타자는 인간인 한에서는 그 정신을 쓰는 방식이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달라 보인다면 그것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고요. 

 

강조되어야 할 점은, 대칭성의 요구를 따르기에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개체적으로 자유롭게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법칙이라고 하는 조건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 사고가 동서남북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한 법칙 아래 구현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인류사에는 수많은 문명이 나타났다 사라졌으며 너무나 다양한 관습이 도처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법칙 아래에서 발현되는 표현형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왜 백인들은 기술문명의 선구가 되어 인디언들을 착취-지배할 수 있는 것일까요?  

 

대칭성 개념의 특징을 더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야생의 사고 즉 인류 사고의 근원적 작동 방식은 모형의 대칭성에 있지 않고 작용의 대칭성에 있습니다. 자연 안에서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네 가지의 힘이 미치는 장이 다르듯이 자연의 부분부분에는 각기 다른 방식의 힘이 작동합니다. 작용에 따른 변화가 겉보기 수준에서는 다양한 거지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체의 구석구석이 동일한 법칙을 따르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 식으로 위의 문제에 답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문화 발현의 부분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인간 각자의 무의식은 전체적 대칭성을 추구하며, 현상적으로 대칭성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도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대칭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대칭성의 원리에 따라, 역사가 진보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인류사의 수준에서도 대칭성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개시된다고 했습니다. 각각의 문화는 그 부분적 노력의 형태인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노력의 형태성에 대해 ‘구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개시된 ‘구조주의’는 결코 정태적 역사 모델이 아닙니다. 작용에 있어 부단한 변이형을 만들어내는 구조성이며, 치우침 없이 인간사를 자연의 전체적 평면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기에 항상 탄력적으로 재구성되는 구조성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유대인으로 1942년 마르세유 항에서 어렵게 미국으로 망명을 갔습니다. 유럽의 전체주의는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악행을 낳았습니다. 1937년부터 시작되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여정은 전체주의라는 악이 고개를 들었다가 소거되는 것과 나란하지요. 레비-스트로스는 단 한 번도 홀로코스트를 악마적이라며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인간 인식 조건이 만든 결과라는 점에서 그 필연적 논리를 파악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왜 일어났는지 레비-스트로스에게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성숙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서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보고 악은 평범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렌트도 전체주의란 사유하지 않음이 낳은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무엇을 사유해야 하며,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탐구한 것이지요. 우리 각자는 자신의 무지를 화두로 삼아야 하고, 타자를 읽고 쓰면서 그 화두의 뿌리에 다가가야 합니다.   

 


4. 작용의 대칭성과 야생의 변증법  
신화학의 기틀이 되는 ‘야생의 사고’에 대해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대칭의 요구를 따르는 야생의 사고에서, 먼저 그 주체는 누구일까요? 변증법의 주체는 백인제국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반합의 지향 운동인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먼저 지향되고 지양되어야 할 것이 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고가 개시됩니다. ‘정’의 자리에 누군가가 먼저 가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① 야생의 사고에서 주체는 인류의 무의식입니다. 인간은 개별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의식의 구조에 따라 표현된 사회역사적 관계의 사고틀이라고 하는 압력을 받아 생각합니다. 그 사고틀은 단군과 같은 민족의 시조가 만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떤 풍경 안에서 길들여진 무의식이 공간의 인간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그러한 사고법을 선택하게끔 밀어붙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화’입니다. 『신화학』이 줄기차게 소개하듯 남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원시 신화는 공동체의 다양한 제의와 결합해 집단을 영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유발 하라리도 지적하듯이 무문자 사회의 많은 이야기들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문화적 형태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제공했습니다(『사피엔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가’ 신화를 만들었는지를 기록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문자성 자체가 사고의 무의식이 가장 활성화된 상태이며(월터 옹,『구술문화와 문자문화』참고), 인류의 무의식은 백인과 인디언을 가리지 않고 전체를 바라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대칭적 사고가 구현된 좋은 예로 드는 것은 보로로족의 지면배열입니다. 이 형태가 어째서 대칭적일까요? 이것은 보로로의 한 부족 아래 두 반족이 함께 기거하는 형태입니다. 형태적으로는 원이 두 개 있으나, 그것을 분할하는 선분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조사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각기 다른 습속의 구조 형태를 갖기 때문에 마을의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불변항은 있습니다. 보로로족의 지면배열은 그 불변의 상수를 논하기에 좋습니다.  
  

 

# 그림 『슬픈열대』, 413쪽 ‘케자라 마을의 평면도’



② 야생의 사고는 이항대립을 선호합니다. 먼저 이 마을은 남서로 베르밀류 강을 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쪽은 숲을 맞대고 있지요. 채소밭들이 그 숲의 한쪽 귀퉁이에 있고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붉은 사암이 가득한 언덕이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방문했을 때 이 마을 인구는 150명이었으며 둥그렇게 동일한 형태의 오두막이 스물 여섯 채를 두면서, 중심에 대략 길이가 20미터, 폭이 8미터가 되는 오두막이 한 채를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오두막이 ‘바이테만나제오(남자들의 집)’입니다. 미혼 남자들은 모두 여기서 잠을 자고 사냥이나 어로 등 생계에 필요한 남성들의 일을 하며, 때때로 의례 준비를 했습니다. 여자들은 둥그렇게 둘러싼 가옥들을 자기의 터전으로 삼고, 남자들은 바이테만나제오와 아내가 있는 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왕래하며 생활합니다. 이러한 지면 배열이 보로로 인디언들 정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만약 누군가 와서 집 몇 채를 쓸어버린다면 그들은 생사를 둘러싼 모든 일에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시간감, 공간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릅니다. 부락민들은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하나의 선에 의해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론적으로 강과 평행을 이룹니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세라’이며 남쪽 사람들은 ‘투가레’입니다. 세라는 ‘약한’을 뜻하고 ‘투가레’는 ‘강한’을 뜻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의 집단에 영구히 귀속되고, 반드시 다른 집단과 결합해야 합니다. 만약 내 어머니가 투가레이면 나는 죽을 때까지 투가레이며 배우자는 반드시 세라여야 합니다(cf. 족외혼의 흔적으로서 동화인류학). 여자들이 어머니의 집을 상속받으니 모계제입니다. 보로로족의 남자는 강과 이론적으로 평행한 이 선을 넘는 것으로 어른이 됩니다.  

 

이 분할 선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집단적 상보성을 이루며 살게 됩니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를 서로에게 지우는 방식으로 세라의 장례식은 투가레가 치르도록 되어 있는 식입니다. 서로는 의례의 책임을 지며 때로 경쟁하고 질투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반목은 스포츠 경기의 경쟁심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능력에 대한 자존심에 바탕을 둔 과시적 협력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내가 잡은 것은 내가 먹을 수 없다, 내가 받은 것은 내가 요리할 수 없다’라는 금기가 작동하는 제한이 많기 때문에 사냥은 상대를 위해서 해야 하고, 요리도 상대를 위해서 해야 하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 필요한 의무적 관계를 이루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직접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같은 지역을 연구한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이 상보성의 기본형을 젠더에서 찾습니다(피에르 클라스트르,『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활과 바구니는 고유한 성역할 배치의 상징입니다. 남자라면 바구니에 손만 스쳐도 자기 성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도 서유럽의 중세까지 상보상의 원초 형태는 젠더 배치에서 발견된다고 봅니다(이반 일리치,『젠더』). 

 

동서 분할선과 평행하게 나뉜 부족들 각각의 내부로 들어오면 각 집단은 다시 삼분됩니다. 상류, 중류, 하류로 나뉘어지는데 카스트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분류에 따라 반족끼리의 결혼은 이 계층의 선분 아래에서 이루어지게끔 됩니다. 세라의 상류층은 투가레의 상류층과만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③ 야생의 사고는 계층적입니다. 

 

계층성은 위계적이지만 상보적이기 때문에 권력 집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야생의 사고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납니다. 이런 지면 배열 아래에서 세라 하류층 아가씨가 신분상승의 꿈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지위를 높이는 일은 원천봉쇄되어 있습니다. 특권은 역할로(자격으로) 배분되어 있기 때문에, 보로로족의 전체 구성원들은 그 누구와 비교 불가능한 위치값을 갖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자기 자리가 할당되기에 이것은 분명 자기 한계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이 점은 다른 이들과 관계맺을 수 있는 조건의 출발점으로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자리가 비는 일은 공동체 전체의 상보 메카니즘에 심각한 균열을 가져오기에 그 자체로 재앙이 될 테니까요. 야생의 사회에서도 분명 사냥감을 더 잘 잡는 사람, 바구니를 더 잘 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차이는 빈부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고 세련됨과 투박함으로 이해됩니다. 자, 어떠세요? 이런 조건 아래서라면 바구니를 짜며 제사에 나갈 수 없는 여인이라도 자존감으로 충만하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는 야생의 사고가 모색하는 작용의 대칭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생의 사고는 이항대립이라는 틀을 씁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란 기본적으로 이항분할성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항의 ‘대립’은 그 성질이 부정의 지양에 있지 않고 ‘상보적’입니다. 변증법적이지 않습니다. 이제 그 예로 토바족의 신화 M208 ‘꿀을 찾는 여우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 하루는 여우가 말벌의 꿀 레체과나(lecheguana)을 찾으러 갔다. 여우는 오랫동안 걸었지만 꿀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꿀을 찾는 새 셀모트(ćelmot)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새는 나무 위로 올라가, 홀로 날아가는 말벌을 눈으로 쫓으며 그들의 벌통을 알아 놓을 수 있었고 결국 벌통을 차지했다. 여우는 흉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꿀을 찾아라! 라는 미션을 놓고 여우와 새가 다투는 모양새입니다. 신화는 발 달린 여우와 날개 달린 새를 ‘꿀’이라는 기호를 활용해서 동일한 종으로 취급합니다. 동물 발생학의 계보를 따라 해부학적으로 종을 나누지 않고, 동물들 각각의 욕망과 능력을 놓고 그 상동성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숲을 재현한 다큐맨터리가 아닙니다. 신화입니다. 인간은 이 이야기를 왜 만들었을까요? 누구보다 꿀을 탐하는 자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우=새=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고 해야 합니다. 

 

Ⓑ 새는 초라한 여우에게 마술을 걸기로 했다. ‘여우야, 부상을 당해라! 더 이상 걷지 못하도록 나무야 조각나라!’ 새가 주문을 외우자마자 여우는 오르던 나무 밑으로 떨어져 뾰족한 나뭇조각에 찔려 죽었다. 새는 연못으로 가서 목을 축이고서는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여우야, 부상을 당해라! 라니요? 새는 못됐습니다. 그럼 불운한 여우를 모욕하며 곤경에 빠트린 새는 어떻게 될까요? 별 일 없이 산다!입니다. ^^ 셀모토는 집으로 돌아간 뒤로 이야기에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신화는 선악을 가볍게 넘어갑니다. 악인에게 죄를 묻거나 벌주지 않습니다. 셀모토의 의중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셀모토 저주의 의미는 신화가 다 끝나고서야 파악될 뿐더러, 여우의 곤경이 꼭 나쁜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신화의 생산자는 선악을 비롯 자연의 모든 것의 제 관계를 설명하려는 인류의 무의식입니다.   
    

Ⓒ 가는 비가 떨어지자 여우는 다시 살아났다. 꽂힌 나뭇조각을 빼버린 후 여우는 꿀찾기에 성공해서 그의 자루에 담았다. 그는 목이 말랐으므로 연못을 찾아 뛰어들었으나, 연못은 말라 있었고 목이 부러졌다. 연못 아주 가까이에 개구리가 우물을 파고 있었다. 개구리의 위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한 남자가 물을 마시러 왔는데 연못이 말랐고, 여우가 죽었고, 개구리의 위가 물로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선인장 가시로 개구리 위를 찔렀다. 물이 솟구쳐 사방으로 흩어졌고 물에 젖은 여우는 다시 살아났다. 

 

죽었던 여우를 물이 살립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살아난 여우가 드디어 꿀을 찾습니다. 그런데 어쩌나요? 꿀을 찾자마자 목이 말라 마른 연못에 뛰어 들게 되고 금방 목이 부러져 다시 죽습니다. 구미호라고 우리 전래 동화에도 목숨이 여러 개인 여우가 나오는데요, 토바족 사람들에게도 여우는 죽다 살아나기를 좋아하는 동물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여우의 생사에는 어떤 리듬이 있습니다. 뾰족한 나뭇조각에 찔려 통이 비게 된 여우의 몸이 물로 채워지면 그는 꿀을 쥘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꿀을 얻은 덕에 몸이 마릅니다. 이 리듬은 꿀과 물의 비율이 일정하게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하지요, 아무리 꿀이 달아도 꿀만 계속 퍼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꿀은 늘 물에 섞어서 먹을 때 더 오래 잘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M208이 물과 꿀도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물질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우는 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됨에 따라 이번에는 개구리와도 동등해집니다. 개구리 알의 모습이 벌의 봉방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 동등성은 자연 안에서도 충분히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화 속 이분법적 기호들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갑니다. 
 

Ⓓ 여우가 방문객들을 기다리며 알가로바 맥주를 준비하던 어느날 유찬 나무 꼭대기에서 자고 있는 도마뱀을 보았다. 여우는 맥주를 버리고 도마뱀에게 자신의 앉을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다. 여우는 함께 나무 위에 있고 싶다고 간청했다. 하지만 도마뱀은 ‘여우가 뛸 때 그의 창자가 터지기를!’이라는 주문을 외웠고, 여우가 도마뱀에게 다가가려고 높이 뛰자 유찬 나무 둥치에서 튀어나온 가지에 베가 찔렸다. 그가 떨어지면서 그 창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늘어지게 되었다. 도마뱀은 ‘사람들이 이것을 따먹을 수 있도록 창자가 커지기를!’이라고 다시 주문을 외쳤고, 이것이 ‘여우의 창자’라고 불리는 리아나덩굴의 기원이며, 인디언들은 이를 즐겨 먹는다. 

 

우리는 여우가 계속 능력이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꿀과 물이 섞인 차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맥주 즉 발효음식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력의 확장은 위험합니다. 도마뱀이 한계를 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여우가 셀모트와 개구리와 동등한 위치를 가질 수는 있지만 도마뱀과는 같은 위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동등하지만 다른 위치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 파악에 공을 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범위가 있습니다. 열대의 이분법은 이처럼 관계 지향적이지만, 모든 생명체들이 무작위로 연결되어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명백히 말하니까요. 

 

그럼 어떤 수준에서 멈춰야 할까요? 신화는 중간항을 제시하면서 끝맺습니다. ①, ②, ③에서 여우는 뛰어 내리다가 몸이 찢어져서 죽고, 그 찢어짐 덕분에 물을 품게 되면서 꿀과 더욱 결합했습니다. 그런데 ④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오르려다가 창자가 터지고, 그 덕분에 더는 여우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 ‘물을 품은 빈 창자’ 즉 리아나덩굴이 됩니다. 리아나덩굴은 야채지요. M208은 여우의 점프와 터짐이라는 모티프로 꿀과 물의 중간항인, 즉 꿀이면서도 물인 야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화는 건조함(여우)과 습함(개구리)의 존재론적 동등성과 실제적 대립(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변형체를 제시하지요. 과일은 외부는 건조하고 내부는 젖어 있습니다. 이처럼 야생적 사고의 이분법은 주체중심의 변증법이 아닙니다. 모순을 제거하지 않고 중재하기 때문입니다. 여우와 개구리 ‘사이’의 존재 형식으로 과일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분법에 익숙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인류학에 따르면 흑백을 우선 가른 다음, 흑과 백이 어떻게 함께일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개의 항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개념적 틀입니다. 주체적 변증법의 이분법은 현실재현의 논리이지만, 야생의 이분법은 존재론적 동등성을 파악하기 위한 사유 도구입니다. 단순한 실재적 대립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이 사회에도 ‘적대’는 있습니다. 셀모트와 같은 악마가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야생에서는 ‘적대’도 삶의 한 요소로서 자리를 할당받습니다. 

 

이항대립의 상보성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것은 이항의 출발점으로서의 죽음입니다. 위의 지면배열에서 남성들의 공간은 의례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실제 장례식이 주재될 때에는 남자들이 마을의 한 가운데에서 산자와 망자 사이의 관계를 재편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때 여성들은 자연적이라는 이유로 의례에서 배제됩니다. 위의 지면배열은 근본적으로 성차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지만, 여성을 차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생사의 이분법을 가장 쉬운 신체적 차이로 표현하기 위해 나눈 것이지요. 인류의 의식발달에 있어서 예술을 생계 다음에 오는 것으로, 추상 예술을 재현 예술 다음에 오는 것으로 설명하는 연구가 많습니다. 하지만 라스코 동굴 벽화의 수많은 도상들이 말해주듯 죽음에 대한 명상과 추상적 사고의 전개는 재현에 앞서 있습니다(스티븐 미슨,『마음의 역사』). 보로로족의 지면배열은 생사 이분법의 추상화 위에서 남자와 여자의 생활 방식을 나누어 짜 넣은 것입니다.

 

야생의 이분법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적 분할은 생사에 있습니다. 그 다음이 자연과 문명 사이입니다. 위에서 보로로족이 반족을 동서 분할 선에 따른 위와 아래로 나눌 때, 그 위와 아래에 대한 개념화는 어떤 근거를 두고 만드는 것일까요? ④ 야생의 사고는 토테미즘을 따릅니다. 마을의 지면 배열이 전체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실제 역할은 동네의 지리적 성격을 따라 나옵니다. 강을 면하고 있으니 이 부족은 어로에 집중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숲을 면해 있으니 사냥에도 익숙할 듯합니다. 보로로족을 비롯해서 인디언 부족들은 지면배열에 앞서 그들 자신을 먼저 토템화합니다. 만약 곰부족이라면 곰 신체의 해부학을 따라 부족민과 그의 가족에 곰의 신체 부위 자리를 할당합니다. 누구는 곰발바닥, 또 다른 누구는 곰의 머리 같은 식입니다. 의인화가 자연의 인간화라면, 토테미즘은 인간의 자연화입니다. 야생의 사고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토테미즘에 입각한 방식으로 자연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기술을 씁니다. 자리는 ‘거의’ 세습됩니다. 나의 어머니가 곰발바닥이라면 나도 곰발바닥이고, 그런 나는 이웃 반족의 발바닥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배우자를 찾아야 합니다.  

 

 


5. 숲에서 우리는 함께
야생의 토테미즘에 주목하다 보면 ‘인간의 사물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토테미즘적 사고는 인간을 동식물로 개념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칭성 구현의 도구로 씁니다. 여기서 인간은 기꺼이 사물이 됩니다. 예를 들면 남미의 한 부족에서는 아가씨가 옥수수를 딸 때 웃통을 벗는다고 합니다. 옥수수 껍질이 잘 벗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옥수수를 따는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 옥수수와 유비되고, 그의 옷은 식물화되며 그의 살은 식재가 됩니다. 

 

이토록 극단적인 자기 부정이 감행되는 야생이지만, 여기서의 도구관은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도구화와는 다릅니다. 전자는 우주 만물에게 치우침 없도록 하는 법칙의 발현이라는 ‘대칭성’의 요구를 따르면서, 자신을 전체의 부분으로 변환시키는 일입니다. 후자는 오직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비대칭적 목적을 위해서 인간에게 그 고유한 위치성(관계성)을 박탈시키는 방식입니다. 둘 모두에서 인격은 무시되지만, 야생의 사물화는 인간을 통해 우주적 관계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되고, 자본주의의 사물화는 인간을 우주적 미아 상태로 유실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신화는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놓고 다투면서도 서로 깊이 의존하는 존재들의 드라마들입니다. 내 삶의 넓이와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변화무쌍하면서도 적절한 관계들입니다. 관계는 친구와 가족에 그치지 않습니다. 경쟁자와 적과 죽음과도 함께입니다.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함께’를 고민할 때, 나의 삶은 영원합니다. 연결하라, 무한히! 인류학의 소명을 이렇게 음미해봅니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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