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성 치료학(上)
1편. 무기력한 치료-인간
치료-인간, 치료에 대해 묻다
구글 검색창에 ‘수의사’, ‘직업’을 검색해 보자. 한창 미래 직업을 고민하는 친구들을 위해 수의사란 직업을 소개하는 블로그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바라보는 수의사란 직업은 어떨까? 자격증을 따는 전문성 있는 직업이고, 내부 분야도 다양하고, 점점 커가는 반려동물 시장을 고려해 봤을 때 미래도 보장되어 있다. 고로 별 다섯 개, 땅땅땅. 이것만 들어서는 정말이지 완벽한 직업 같다. 그런 수의사 자격증을 6년 들어 힘들게 땄다고 치자. 대학을 졸업하고 나오면 20대 중후반, 남자의 경우 군대를 다녀오면 거의 30대가 된다. 20대 청춘을 갈아 넣어 얻은 자격증이니 다들 얼마나 열심히 일할까? 그런데 내 주위만 둘러봐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6년 공부했으니 놀아야지~ 하며 백수를 전전하는 친구나, 수의사는 나의 길이 아니라며 의대로 편입하는 친구도 있다. 아주 머나먼 선배인 어느 분은 이미 수의사 길을 접고 다른 직업을 가진 지 오래다. 음…, 다들 돈이 많나? 물론 난 전혀 그렇지 않다.
이건 단순히 내 주위에 유별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은 아니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수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택하는 진로 1순위는 반려동물을 치료하는 소동물 임상이다. 소동물 임상이란 개‧고양이, 조금 더 넓힌다면 햄스터, 토끼, 새 등과 같은 반려동물을 치료하는 분야다. 그러니 수의사 하면 병원에서 개‧고양이를 다루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2순위는? 공무원을 제친 그 직업. 바로 무직 되시겠다. 열심히 수능을 쳐서, 6년 대학을 다녀서, 국가 고시를 패스한 수의사들의 상당 비율이 백수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거다. 무시무시한 수의사들의 장롱면허 현장! 이쯤 되면 수의사 금수저설이 굉장히 유력해진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왜 기껏 따 놓은 자격증을 팽개쳐 둔단 말인가? 전도유망한 별 다섯 개 직업 수의사를?
금수저설의 예외 축에 속하는 나는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선택한 분야는 가장 흔하다는 소동물 수의사. 그중에서도 내가 만나는 동물들은 개와 고양이들이다. 반려동물이라며 유사 인간 취급을 받는 개‧고양이들을 치료하는 건 사실 사람을 치료하는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어릴 때 백신 맞고, 아프면 수술하고, 돈은 꽤 들지만 원한다면 CT/MRI도 다분히 찍을 수 있는 게 소동물 임상의 현주소다. 전염병이 돌면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치료랍시고 가축들을 살처분하는 대동물 임상에 비하면 그야말로 제대로 된 치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고양이를 치료하는 나는 마치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처럼 생명을 살리는 데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겠지.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사람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면서도 가끔 내가 동물들을 치료한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 의구심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가 아직 뭘 모르는 인턴이어서?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실력을 쌓는다고 해서 사라질 고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는데, 나는 이미 지난 글에서 “수의사가 하는 치료는 진정 동물을 위한 치료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동물을 위한 치료를 묻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동물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줄 알겠다만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고(정말이지 나는 수의사가 되기 전 20여 년 동안을 동물에 대한 고민 없이 잘만 살았다!), 그저 스스로가 치료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일하는 것이 괴로웠을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계속해서 ‘수의사’란 이름을 달고 치료를 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치료의 의미를 찾는 일은 시급했다.
결국 내가 마주해야 하는 건 나 자신의 무기력이었다. 수의사로서 내가 느끼는 무기력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왜 나는 동물을 치료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까?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내가 가장 치료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진료 현장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저번 인트로 글에서도 말했듯 수의사로서가 아니라 한 마리 호모 사피엔스로서. 하여 수의사를 타 동물을 치료하는 호모 사피엔스인 치료–인간, 반려동물과 동거 중인 보호자는 동거–인간, 반려동물은 동거–동물이라 부르도록 하자. 이때의 인간이란 여러 동물종 중 하나인 호모 사피엔스에 다름 아니다.
동물을 위한 치료는 없다─가장 이기적인 치료
치료-인간인 내가 일하는 곳은 동네의 작은 동물병원이다. 동네 동물병원에는 사실 아픈 동물보다는 건강한 동물들이 더 많이 온다. 무슨 말이냐 하면, 치료가 긴급한 케이스보다는 미용을 포함한 일상적인 관리를 받으러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치료-인간이 열심히 동거-동물의 항문낭을 짜고 있거나, 귀를 청소해주거나, 발톱을 깎아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동물들을 ‘치료’하는 자라고 보긴 힘들 거다. 차라리 위생 및 미용 관리사가 좀더 어울릴지도? 하지만 동물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치료가 이렇게 다소 생활적이고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해서 치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가장 근본적인 치료라 생각했던 부분, 동거-동물의 생사가 달려 있는 위급한 치료를 할 때 치료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더 자라났다. 아주 상반된 두 개의 케이스 때문이었다.
하나는 이랬다. 중성화 수술이 만연하여 출산이 거의 없는 요즘 드물게 출산 준비를 하고 있던 강아지가 있었다. 생긴 것도 아주 깜찍하게 생긴 포메라니안 강아지였다. 출산을 앞둔 강아지에게 치료-인간이 해 주는 일이란 방사선과 초음파 검사를 통해 태아의 크기나 상태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혹여나 엄마의 골반보다 태아의 두개골이 크면 난산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 강아지 역시 난산이 걱정되는 경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감을 앞둔 어느 날 저녁에 애기가 나오지 않는다며 동물병원을 다시 찾아왔다. 강아지가 출산하는 걸 보는 건 난생처음인데, 심지어 난산이라니! 당시 한창 열정 넘칠 인턴 초기였던 나는 기꺼이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수술을 도왔다. 그렇게 자궁 속 아이 두 마리가 구출되었고 한 마리는 죽었지만 다른 한 마리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자궁에서 갓 꺼낸 태아의 심장을 열심히 마사지해주고 있을 때, 한동안 반응 없던 아이가 처음 스스로 호흡했던 그 순간이란! 모든 치료-인간들이 이 순간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평소에 아무리 치료답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한들 이렇게 찾아오는 한 순간을 위해서라도 치료-인간 일을 계속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보람찬 날이 지난 지 몇 주도 채 되지 않던 때였다. 우리 병원은 TNR(Trap-Neuter-Return) 지정 동물병원이다. TNR이란 길고양이를 붙잡아 중성화 수술을 하여 원래 자리에 방사하는 지자체 사업을 말한다. 보통 캣맘이 잡아온 길고양이를 중성화시켜 내보내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그날 들어온 길고양이는 묘하게 배가 약간 불러 있었다. TNR은 만삭인 고양이를 상대로는 중성화 수술을 실시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주의 깊게 살펴봐야 했는데, 이 고양이는 크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나 싶어 마취를 하고 수술 준비를 하는데, 그제서야 고양이가 임신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임신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편이라 수술을 할지 말지 고민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내심 당연히 수술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다른 치료-인간인 원장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데려온 캣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고, 캣맘은 흔쾌히 수술에 동의했다. 그렇게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거봉만한 크기의 태아가 주렁주렁 달린 자궁이 떼어진 채 금세 마무리되었다.
참 묘한 일이었다. 한 마리의 생명이라도 구하려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갓 태어날 새끼들을 없애버렸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건 그냥 원장님과 캣맘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 그 현장에서 수술을 보조하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무엇보다 수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것에 놀랐다. 수술은 안타까운데 억지로 하듯 진행된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할 것마냥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나 역시 처음에야 좀 동요했지만 나중에는 덤덤하게 수술을 도왔다. 머리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진 않았다. 거기엔 원래 평등한 생명을 차별대우했다는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그건 오히려 하나의 아주 당연한 진실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이었다. 생명은 본디 평등하지 않다는 것. 그렇지 않은가? 마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자식은 단 한 마리라도 더 구해야 하지만, 길고양이의 새끼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것처럼. 살려야 할 생명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은 생명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기준을 내리고 있던 건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나, 치료-인간은 ‘타 동물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수의학적 대명제 이전에 ‘살려야 하는 동물은 누구누구다’라고 정의 내리는 사피엔스의 입장을 더 잘 대변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치료-인간이 얼마나 훌륭하게 치료를 해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치료-인간이 아무리 타종을 정성스럽게 치료한들, 치료가 이뤄지는 데 있어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늘 인간이었으니까. 하여 동물병원의 치료는 늘 제한적이고, 지엽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모든 치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물 복지란 이런 토대 위에서 인간이 치료하고자 하는 동물의 범위를 얼마나 늘릴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둔다. 동물 복지뿐만이 아니라 모든 권리가 그렇다. 성인 남자에서 아이들과 여성과 노인들까지. 백인에서 다른 여러 인종들까지. 인간에서 개와 고양이까지, 그 너머의 다른 생명체들에까지…. 하지만 이런 확장이 정말 진보일까? 아무리 권리나 복지가 우주 전체로 확장된다 한들 이것들이 ‘나’(이 경우에는 곧 인간)의 확장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 즉 ‘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동물 복지라는 확장은 한없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도망쳐 온 유기 동물을 가득 채운 전세기가 비난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리 동물 복지를 옹호하던 쪽이라도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에 인간 대신 타 동물을 우선으로 살리는 광경을 보면 눈이 찌푸려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모든 타 동물의 권리나 복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딱히 인간이 유난히 이기적인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동물 복지의 기본 토대가 ‘나’의 확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거-동물의 치료는 아무리 대단한들 인간의 확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축을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대동물 분야와 생명을 살리는 소동물 임상은 이런 기막힌 지점에서 결을 함께 한다. 가축은 인간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도살되고, 개와 고양이는 인간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살려질 뿐이다. 다만 소동물 분야는 그것이 겉으로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공개적으로 지탄을 받진 않는다. 때로 나는 차라리 대동물 임상에서 일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적어도 거기에서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 중심적 행보가 감춰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속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동물 임상은 어떤가? 그것이 생명을 살린다는 표상 때문에 거기엔 마치 인간과는 무관한 순수한 동물의 권리가 지켜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여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문제도 가시적으로 제기되지 않았고, 나는 이게 너무나 답답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내가 하는 모든 진료에서도 의미가 사라졌다. 어떤 훌륭한 치료법이라도 타 동물을 인간의 입장에서밖에 치료할 수 없지 않은가? 난 매일같이 동물을 보지만 늘 인간이 원하는 동물, 인간이 의도한 동물만을 보았다. 그렇게밖에 볼 수가 없었다. 치료-인간이란 생명을 살리는 자 이전에 타 동물을 관리하는 직업인데, 이것 외에 무엇이 가능할까? 나는 가끔 동물들을 야산에 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는데, 이렇게 인간 중심적으로 치료할 바에야 차라리 모든 인간의 개입을 없애버리는 게 탈출구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인간 멋대로 대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개입하지 않거나. 치료-인간으로서 나의 고민은 늘 두 극단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글_박소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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