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나멘과 자유
나의 감옥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잘 가고 있다. 비록 자세히 들여다보면 울그락푸르락 마음이 쉬질 않긴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면 난 힘들기는 하더라도 그럭저럭 재밌게 공부하며 살아가고 있다. 힘듦과 재밌음은 대립되지 않는 것 같다. 축구할 때 숨 가쁨과 상쾌함이 따로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나는 많은 제약 속에 있다. 빠지지 말아야 할 수업과 세미나가 있고 당장 오늘 밤에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글이 있다. 나는 약속과 책임 속에서 공부한다. 그것은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과의 약속이고, 그보다 앞서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렇기에 결코 구속이나 억압이 아니다. 나는 이런 바쁜 생활을 하고 싶고 그렇게 훈련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걷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차가 없다는 사실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되듯이, 연구실에서 읽고 쓰는 활동이 전부인 내게 공부할 거리가 있고 그것들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문제는 가끔씩 찾아오는 구제불능의 절망감이다. 나는 지금 누가 시켜서 억지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내 나름의 계획과 욕망을 가지고 훈련해가고 있는데, 왜 가끔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걸까? 마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시키고 있다는, 공부 때문에 다른 무엇도 못한다는, 끔찍한 부자유 속에 있다는 느낌. 놀지도 쉬지도 못하는 이유가 모두 공부 때문이라는 느낌 말이다. 그럴 때면 좀 전까지 감사한 스승님이던 채운샘을 가혹한 압제자로 그리게 된다. 여기가 감옥이구나!
다시 말하지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약속이 족쇄가 되고 나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언제냐고? 글을 못 쓸 때다. 정확히는, 어렵더라도 쓰려고 끙끙거리고 있는 게 아니라 숨이 턱 막히는 정체 상태를 체감할 때다. 다른 세미나 과제를 준비할 시간이 점점 줄고, 잘 수 있는 시간이 준다. 여기까진 괜찮다. 줄어든 시간만큼 하면 되니까. 하지만 노력과 고생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단적인 예는 이렇다. 지방에 살던 친구들이 오랜만에 서울에 모여서 연락할 때. 특히 혜화동 코앞까지 왔다고, 너 자취방에서 자고 갈 거라고 말할 때. 오라고도 가라고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내게 연민과 조롱을 섞어 “그렇게 살지 좀 말라”고 말할 때. 대체 뭘 하는데 얼굴도 못 보냐는 말은 내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준다. 차라리 수업 중이면 좋았을 걸, 제시간에 썼어야 할 글을 못 써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면 뱃속이 딱딱해진다. 갇혀 있구나, 붙들려 있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한 문장도 더 써지지 않는다. 쓰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 꼴을 보라. 옴싹달싹 못함. 무능에 무능이 겹친다. 이럴 때면 뇌에 시멘트를 뿌려놓은 것마냥 답답하고 속은 토할 것처럼 울렁거린다. 열이 뜬다. 무엇도 못한다. 여기에는 온통 부자유스럽다는 느낌만 팽팽하게 들어 차 있을 뿐이다. 친구들을 무시하고 써지지도 않은 글을 쓴다고 앉아 있는 모습은 조금도 자유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글 약속을 어기고 나가는 것이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세상을 저주하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이렇게 내가 부자유하다고 느낄 때 내가 반사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자유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아무런 제약도 압박도 받지 않는 상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상태다. 시간 안에 척척 글을 써내고, 과제를 짱짱하게 해둘 수 있음. 그래서 홀가분하게 친구를 만나고, 남은 시간에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잠도 푹 자는 것. 상상만 해도 좋지만, 한낱 꿈이다. 계약직 업무도 아닌데 어떻게 공부가 그렇게 무 자르듯 진행될 수 있겠는가? 매번 ‘훌륭한’ 글을 ‘마음껏’ 써낼 수 있는 출중한 능력으로서의 자유는 순진한 꿈이다. 꿈인 걸 알아도 그 꿈이 간절해지는 순간이 내게는 종종 찾아온다. 그리고 이내 불쾌해진다. 이 자유는 내가 내 손발로 뭔가를 행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세상일을 내 맘대로 전지전능하게 주무르고 싶다는 망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려면 시간이 무한해지거나 힘이 무한해져야 한다. 이야말로 신이 아니던가! 슈퍼맨이 되고 싶은 거다. 내가 비판했던 ‘아이언맨의 꿈’은 사실 내 안에 있었다! 외부 조건이 해결되거나 외부에서 무언가가 주어져야만 실현되는 자유라니. 한없이 의존적이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이런 자유의 이미지가 나를 부자유의 감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유물론적으로 자유를 생각해본다면?
전지전능함으로서의 자유. 이런 자유에 대한 환상은 어디서 온 걸까? 문제는 그런 자유를 생각하는 동안 나 자신을 결핍 상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빛나는 자유 아래에는, 언제나 그 그늘에서 무능력하게 쪼그라들어 있는 현실 속 내 모습이 놓여 있다. 자유에 대한 나의 이미지가 구속이 되는 것은 이런 지점 때문이다. 언제나 내 몸과 힘과 처지 바깥에 설정되어 있는 자유는 추구할수록 나 자신의 실존을 무시하고 꾸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별다른 바람도 개선의 가능성도 없이, 잔말 말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걸까? 우선 그럴 수 있을지가 의심된다.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힘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아니던가. 생각이든 글이든 건강이든 형편이든 나는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길 원한다. 늘 하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고, 늘 가던 곳 말고 다른 곳에도 가보고 싶다. 이런 의욕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지칠 때뿐이다. 몸이 지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해봐야 뭐하냐는 식의 냉소가 차오를 때다. 그런 피로함은 체념을 낳는다. 체념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군말 없이, 의욕 없이 그저 하라는 것들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자유를 바라면 환상으로 귀결되고, 바라지 말자면 체념에 빠지는 것뿐이다. 한쪽은 자신과 동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자책하고 한쪽은 자신을 포기하고 방치한다. 둘 모두 철저하게 무력한 자기 자신이 남는다는 것만은 동일하다. 이쯤되면 자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알겠다. 나의 상식적이고 느낌적인 자유는 내려놓고, 자연의 차원에서, 물질세계의 차원에서부터 자유를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그대가 이것을 잘 이해해서 붙들고 있다면, 자연은 보인다, 곧장 자유로운 것으로, 오만한 주인들 없이, 자체가 스스로 자기 뜻대로 신들 없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으로.”(2:1090)
자연이 자유롭다니, 무슨 말일까? 우리는 보통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함께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연이나 자유나 둘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쪽으로 이야기되는 것 같다. 자연은 일정한 경향성을 가진 원리나 법칙으로 이해된다. 자연스럽다, 자연에 따른다, 자연에 걸맞다고 말할 때 자연은 순리적인 질서처럼 여겨진다. 반면 자유는 그런 자연의 일정한 흐름과 경향을 거스르는 능력처럼 여겨진다. 가만히 있는 식물보다 이리저리 이동하는 동물이 더 자유로워 보이고, 기어가는 애벌레보다 날아가는 나비가 더 자유롭게 생각된다. 우리에게 최고로 자유로운 존재는 중력이나 열역학 법칙 같은 어떤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슈퍼 히어로들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는 자연을 역행하는 초능력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즉 자연 바깥의 것이다.
자연이 자유로운 것은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주인이나 조종자에 의지하지 않고 운행하기 때문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원인은 자연 ‘안에’ 있다.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진화도 멸종도, 별의 형성도 폭발도 다 자연이다. 자연의 모든 운동은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 자연은 ‘신들 없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지전능함과는 다른데, 자연의 ‘자기 뜻’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 안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무렇게나 뒤집고 바꿀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연의 ‘뜻’은 그것의 ‘행함’과 완전히 겹친다. 즉 자연은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하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러그러하게 일어나고 있음 전부가 자연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역시 자연 안의 일이고, 자연이 원하는 일이며, 그런 점에서 자연은 자유롭다.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신의 내부적 운동에 의해서 자유롭다는 것. 아직 확 와닿지는 않지만 이것은 분명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자유 개념이다. 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자유가 있다는 것. 이것을 말해주는 개념이 ‘클리나멘’이 아닐까?
“만일 항상 모든 운동이 연결되어 있고, 새 운동은 옛 운동으로부터 정해진 순서를 좇아 생겨난다면, 그리고 기원들이, 원인이 원인을 무한한 시간부터 좇게 되지 않도록, 비껴남으로써 운명의 법을 깨뜨릴 운동의 어떤 시작을 이루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에서 이 자유의지가 온 땅에 걸쳐 동물들에게 생겨나 있는 것이며, 묻노니, 대체 어디에서 운명으로부터 빼앗아낸 이 의지가 생겨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쾌락이 각자를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간에 공간적으로 정해진 자리에서가 아니라, 정신 자체가 이끌어간 그곳에서, 그때에 운동의 방향을 비껴 바꾸는 것일까?”(2:251-260)
루크레티우스는 묻는다. 원자의 존재함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미세한 비껴남이 아니라면, 세계에는 어떻게 예측불가능하고 우연한 사건들이 발생하며, 생명이 자신을 확장하고 지속할 것인가? 클리나멘은 사실상 모든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동력일 뿐 아니라, 생명과 정신의 활동을 포함한 모든 운동이 기계적 작용 반작용이 되지 않게 하는 생명력 혹은 (맑스의 표현으로는) 맥박과도 같은 힘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이것을 생명의 자유의지라고 말하는데, 이때의 자유의지는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주체적 선택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의지는 그렇게 신체를 지배하는 이성이나 자아 같은 본질이 아니라, 마치 가로대가 열리면 뛰어나오는 경주마들의 활력처럼 자신의 쾌락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말한다. 그런 자유의지가 자연에서, 즉 생명의 차원에서 발견되고 있기에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을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클리나멘에 의해 증명되는 것은, 모든 사물은 기존에 외부 조건들로부터 규정되고 운명 지워진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운동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외력도 없이 원자의 존재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이 미세한 이탈,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포착불가능한 차이가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 이것이 내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넌 이미 자유롭단다, 하는 식의 자기계발서적인 위안일까? 아니면 언제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혁명의 희망 같은 것일까? 솔직히 아직도 너무나 어렵기만 하다.
자유를 새롭게 정의하기
니체는 자유를 갈망하는 자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여전히 불쑥불쑥 자유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다. 내가 갈망하는 자유는 모든 방해물이 사라져서 아무런 저항도 없는 백지 같은 상태다. 내 마음대로, 다른 사물이나 힘에 구애받지 않고 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아주 추상적인 상태. 하지만 이런 자유는 자연의 차원에서 보면 존재할 수 없다. 거기에 도달한다 해도 우리 자신은 수동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 외부의 관계들이 차단되어야 하고, 다른 무언가가 침입하는 순간 스캔들이 일어나고 깨끗한 자유가 휘발된다.
나는 자유를 말할 때 언제나 결과적 상태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딘가에 도달한 것, 무언가를 극복한 것, 해낸 것, 벗어난 것, 완료된 것. 그것을 두고 자유롭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불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유는 자신이 이미 떠나온 이전의 자리와의 비교로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비교 대상이 언제나 과거다. 그런 한에서 자유는 또 다시 외부의존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이었던 곳을 벗어나 도달한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관계와 또 다른 힘, 또 다른 저항이 있다. 거기에도 원자가 날아다니고 중력이 작동한다. 원자는 클리나멘으로 인해 비껴나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질서 속에 놓인다. 그렇다면 이전의 직선운동에서 비껴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인 것은 아니다. 자유는 비껴나고 또 비껴날 수 있음이자 계속 비껴날 준비가 되어 있는, 원자의 운동하는 본성 자체여야 한다.
니체는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은 전사이다.” 전사는 누구인가? 그는 승리한 자가 아니라, 승리하든 패배하든 앞으로의 싸움과 훈련을 계속 해나갈 자다. 그의 자유는 매번 싸우고 그 싸움에서 계속 배우고 자신의 동작과 기술을 바꿔가는 행위 속에서 구성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승리로 획득되거나 패배로 빼앗기는 증명서 같은 것이 아니다. “자유는 무엇에 의해서 측정되는가? 극복되어야 할 저항에 의해서, 위에 머무르기 위해 치르는 노력에 의해서.”(<우상의 황혼>, 38절) 주목할 점은 극복된 저항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저항이라는 점 같다. 자유는 완료나 완수에서 오는 보상 같은 게 아니라 진행하고 있는 것과 해나갈 것들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목표와 비전 아래서 무엇을 극복할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무엇과 대결하고 무엇과 계속 싸워갈 것인가가, 그러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계속 바꿔갈 것인가만큼이 자유다.
중력이 완전히 사라진 무중력이나 저항이 완전히 사라진 진공은 이상이며 그것을 향한 자유는 언제나 공허하다. 내가 자유를 원할 때 바라는 것은 이 어이없는 비현실이었다. 하지만 니체에게 중력과 맺는 새로운 관계의 방식이 있다면, 중력을 이겨낸다거나 거부한다거나 역행하는 식의 부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추는 춤이었다. 다시 말해 중력이 나를 통해 다르게 흐르게 하기. 동시에 중력과 함께 내가 다르게 되기. 그런 춤만이 중력이라는 저항의 극복이고 다른 자기 자신의 창조이며 곧 자유로움이다.
클리나멘은 일종의 춤이 아닐까? 원자는 자신을 규정하는 힘들이 없는 곳으로 꺾이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있던 자리와 운동하던 습관을 벗어날 뿐이다. 다시 갇히더라도 상관없다. 자유는 연속되는 벗어남 자체를 말한다. 단번에 성취하는 혁명이나 결심으로 자유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 반대에 놓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자유는 계속 겪어가고 문제 삼고 빠져나오고 또 빠지는 과정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 움직임 혹은 의지는 오직 자기 자신 안에만 있다. 누가 쥐어 줄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상황을 개선하지 못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직은 낯설지만 클리나멘으로서의 자유를 잊지 않고, 환상과 단념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만이 나의 숙제다.
부언. 이렇게 쓰고 보니까, 여전히 내게 ‘자유’라는 말은 막연하고도 버거운 개념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같다. 글쓰기도 공부도 자유롭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이 글을 쓰는 과정 또한!). 하지만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날은 아직도 많지 않은가. 이것을 하나의 불만족스런 시도로 여기련다.
글_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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