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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끝없는 생명의 이야기』 지은이 인터뷰― “꿈에 집착할 때는 온 세상이 내 꿈을 위해 존재하지만, 꿈을 비울 때는 온 세상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by 북드라망 2022. 3. 18.

『돈키호테, 끝없는 생명의 이야기』 지은이 인터뷰 ― “꿈에 집착할 때는 온 세상이 내 꿈을 위해 존재하지만, 꿈을 비울 때는 온 세상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1. 선생님께서는 지금 스페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계신데요. 얼핏 보기에는 의대생과 『돈키호테』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책 『돈키호테, 끝없는 생명의 이야기』를 쓰게 되셨나요? 


의대생이 쓴 『돈키호테』에 대한 책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희한한 프로필이네요. (해명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키호테』와의 인연은 제가 의학도가 되기 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그때 저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앞길 막막한 이십대 청년으로서 앞으로의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고전에 담긴 ‘인생선배들’의 조언을 뒤지던 중이었죠.


  그렇게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옳음-그름을 따지는 정당성의 문제나 획일성-다양성을 오가는 사회의 문제, 혹은 꿈-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개인의 문제 안에만 머무른 채로는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요. 살아 있는 존재에게 가장 중대한 사건은 무엇일까요? 생사의 문제입니다. 이 주제는 일상에서 고통과 치유의 문제로 변주됩니다. 육체를 지닌 이상 누구도 고통이라는 생리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의 단초들이 저를 의학 공부로 이끌었습니다.


  『돈키호테』는 저에게 의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중요한 교차로입니다. 원래도 제가 가장 아끼는 책이긴 했지만, 의학도가 된 후로 더 큰 울림을 받았어요. 주인공 돈키호테는 노인입니다.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에요. 따라서 그의 모험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창을 휘두를 근육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심지어 정신까지 온전치 못한 늙은 주인공인데, 우리가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여는 순간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 책은 생기로 가득하거든요. 평범한 시골길에서 돈키호테와 친구들은 이야기를 만들며 재미있게도 살아갑니다. 이들의 활력은 전염성이 높아서 우리들까지 웃게 만들지요. (위대한 책은 독자의 건강에도 기여합니다!) 돈키호테의 모험이 실패로 끝나고, 그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말이에요.


  실패 및 죽음과 어우러지는 웃음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신박한 조합일까요? 세르반테스는 어떻게 늙은 신체와 모자란 정신으로도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인물을 창조했을까요? 『돈키호테』의 활력의 비밀이 궁금했던 것은 의학도로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저에게 ‘필멸의 한계를 긍정하는 최적의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돈키호테를 낭만주의의 화신으로 보지만, ‘열정만 있다면 한계 따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막무가내 태도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돈키호테 한 명으로 충분합니다!) 한계를 무시하는 게 한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 거예요.


  이 방법이 곧 치료입니다. 생명은 시작부터 한계를 품고 태어납니다. 병이라는 한계를 무조건 제거하려 들 게 아니라, 삶의 맥락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이 한계를 변용시킬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돈키호테 못지않은 엉뚱한 망상과 깊은 무지를 마음속에 숨기고 삽니다. 드러내기를 두려워할 뿐, 실상은 한계투성이지요. 하지만 못난 마음을 고립시키지 않고 길 위에 드러내고, 또 현명하게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물면서 자연스럽게 책 쓰기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좋은 것을 저 혼자만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2. 사실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제목이 ‘돈키호테, 끝없는 생명의 이야기’인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돈키호테』는 돈키호테가 ‘끝없이 생명을 갉아먹는 이야기’였거든요(풍차를 향해 돌진하고, 사람들한테 맨날 두들겨 맞고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두들겨 맞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그의 모험의 기승전결 가운데 처음, 즉 ‘기’에 해당합니다. 돈키호테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 버린 모험은 주위의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계속 꿰어집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찾아오면서 돈키호테는 마침내 제정신을 차립니다. 여태까지의 모험이 자신의 좁은 정신과 우매한 마음이 만든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거죠. 그리고 죽기 전에 더 큰 지혜의 빛을 따라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기승전결이 돈키호테의 시점에서 쓰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인공의 행적과 거리를 두는 세르반테스의 시점입니다. 덕분에 독자들은 돈키호테가 얼마나 엄숙한 표정을 짓든 간에 깔깔 웃을 수 있지요. 다시 말해서, 자아로부터 거리를 둔다면 우리는 모든 순간을 웃을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라는 중심을 고집했던 게 실패의 원인이자 한계의 본질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실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아니라 나머지 세상의 여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할 때 그 기억은 진정 자유로워집니다. 돈키호테의 기억을 만인의 즐거운 놀이로 재구성하고, 그로부터 ‘새 책을 읽고 싶다’는 소망까지 이끌어낸 책 『돈키호테』처럼요.

 
  이러한 세르반테식 기승전결은 한계를 긍정하는 마음과 나란히 함께 갑니다. 저는 이 마음의 힘을 생명의 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모든 생명은 자기 보존을 지향하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보존을 위해서는 변화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 변화의 끝에 죽음이 있습니다. 만약 생명의 가치를 ‘내 생존’에만 국한한다면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한계가 될 겁니다. 그러나 한계를 ‘나’와 ‘세상’을 구분 짓는 경계로 삼지 않는다면 슬퍼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조차 생태계를 유지하는 자연의 방식입니다. 더 나은 생존을 위해 내가 기울이는 노력은 미미하고 불완전하지만, 자연이라는 여백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나의 생존은 누군가의 안녕과 행복에 침투하면서 수많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집합적 생명은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에 비록 ‘지금의 나’는 없다 하더라도요. 생명의 가장 강력한 힘은 타자를 통해 다시 살게 되는 힘, 재생(再生)인 거예요.


  한계 많은 생명을 경계 없는 세상 속에 맥락 짓는 힘은 『돈키호테』를 관통하는 종교적 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중세의 기사도는 기독교와 불가분 관계에 있지요. 돈키호테가 종교를 실천하는 맥락, 시대, 방법이 전부 현실과 어긋나 있어서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돈키호테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 속에서 최선(最善)에 이릅니다. 아집을 내려놓는 결단, 좁은 정신보다 더 광대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자각, 여기까지 이르는 길목에서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는 윤리적 실천이 그가 죽는 순간에 소박하게 맞물립니다. 그 순간 우리는 숭고함을 느낍니다.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와 친구들이 함께 빚어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끝맺는 방식에 대해서요. 종교가 전하는 영성은 고착된 정신의 믿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아의 경계를 지우고 세상에 건강하게 녹아드는 실천의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영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무지 속에서 헤매면서도 영성의 길 초입에 서고자 했고, 결국 마지막에 작은 빛을 보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빛 덕분에 『돈키호테』는 사백 년 동안 두고두고 세계 각지에서 회자된 것일 테죠.


  돈키호테의 이야기에는 영웅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없지만 모두에게 유용한 치유력이 있습니다. 끝을 긍정하는 ‘기승전결’을 갖춘 마음은 ‘생로병사’를 겪는 몸과 수월하게 화해하거든요. 무지가 병이고, 깨달음이 치유이며, 삶과 죽음 모두를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활기차게 진행하는 길은 존재합니다. 삶의 길을 끝맺는 스타일은 각양각색이겠지요. 그렇지만 생명을 긍정하는 길들의 공통점은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남겨 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이 끝없는 운동을 돈키호테라는 노인의 마지막 시간, 마지막 여름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 한국에서 미국, 쿠바를 거쳐 스페인에 계신 선생님의 이력만 보면 선생님께서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난 듯싶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여정이 오히려 꿈을 ‘깨는’ 과정이었고, 그런 점에서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산초의 행보와도 겹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세르반테스의 위험한(!) 체험, 돈키호테의 무지한 모험, 선생님의 새로운 탐험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길을 떠나야 하는 (또는 떠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길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내 속에 똬리를 트고 있는 기상천외한 무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꿈을 깨는” 작업이지요. 무지는 소파처럼 편안하고 피부처럼 찰싹 붙어 있기에, 편안함을 보장받지 않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혹은 어쩔 수 없이 처하지 않으면) 그 가장자리조차 더듬지 못해요. 즉 ‘무(無) 보장과 무(無) 보상’은 길의 필수 조건입니다. 패키지 여행상품을 다녀오면 감상만 흐릿하게 남는 반면, 고생했던 배낭여행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나요? 같은 원리입니다.

 
  꿈을 깨러 가는 길보다 꿈을 이루는 길이 더 낫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보상은 오늘의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렇지만 꿈이 간절해질수록 그것을 놓쳤을 때의 절망과 억울함도 깊어집니다. 또한 목표를 이뤘다 해서 지난 과정이 행복한 기억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문제도 남을 겁니다. 시야를 좁히는 ‘꿈’은 길이 아니라 목적지에 종속된 노선으로 우리들을 몰고 갑니다. 노선을 밟을 때 우리는 주위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목적지와 무관한 풍경과 존재들을 ‘효율적으로’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지나친 것은 자신의 참모습이었음을 알게 되지요.


  꿈에 집착할 때는 온 세상이 내 꿈을 위해 존재하지만, 꿈을 비울 때는 역으로 온 세상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요? 돈키호테의 꿈은 허무맹랑하지만 그만큼 빈틈이 많았기에 별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죠. 역으로 저는 꿈이 작았기 때문에 이토록 대책 없는 방랑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을 떠날 때 저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최대한 많이 배우고 싶었고, 그 외에는 특별히 바라는 게 없었어요. 한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도 비슷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아요. 물론 해외생활 덕분에 더 속성으로(?) 공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대가도 치렀죠. 제가 만약 스물두 살의 저에게로 돌아가서 뉴욕, 아바나, 바르셀로나에서 겪게 될 고생담을 미리 예고해 줬더라면 감히 발을 뗄 용기도 못 냈을 것 같네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입니다. ㅎㅎ)


  길을 떠나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 속에서 이동당하는 존재입니다. 시간은 그 자체로 예측을 허하지 않는 ‘길’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나온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역설적인 대사가 보여 주듯, 시간 속에서는 실상 무엇도 계획대로 보장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내가 투자한 노력과 시간이 보장받지 못했다고 억울해해 봤자 나만 손해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평범한 이웃들 중에 의외로 ‘삶의 방랑고수들’이 많아요. 그러므로 길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연습입니다. 내가 가 보지 못한 길을 질투하지 않고, 나의 고난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오늘도 무탈하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삶이요.

  


4. 돈키호테는 선생님께서도 책 속에 표현하신 것과 같이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이지만 어쨌거나) ‘미친 자’입니다. 그렇지만 산초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그를 사랑했습니다(특히 돈키호테가 마지막을 맞는 순간은 연암의 임종 장면이 떠오를 만큼 뭉클했습니다). 후세의 독자들 역시 그랬고요. 이건 무슨 조화일까요?^^


돈키호테는 인성이 바른 사람입니다. 돈키호테가 인식 능력에는 장애가 많을지 몰라도, 그의 행동에는 사람들을 향한 형식화되지 않은 애정이 두텁게 깔려 있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상냥하며 인정이 많아요. 타인의 고통스러운 이야기에는 늘 귀를 열어둡니다. 이 연민을 만인에게 확장하겠다며 ‘기사의 길’까지 떠났죠! 그래서 누구든지 돈키호테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돈키호테의 허황된 이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세상을 대하는 돈키호테의 낮은 자세를 존중했던 것이죠. 이 우정이 돈키호테의 마지막 순간을 구원합니다. 그가 꿈꿨던 모든 것이 환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던 순간은 실재했으니까요.


  이것이 윤리의 힘입니다. 윤리는 구태의연한 도덕책의 규범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최대한 덜 부끄럽도록, 밤에 ‘이불킥’을 한 번이라도 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용적인 가이드라인이에요. 어린 시절에 멋모르고 저질렀던 부끄러운 사건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 시절 나의 무식함에 정신이 아찔해지면서도, 그보다 더한 민폐를 끼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정도에서 멈춰서 다행이라는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혹은 그 정도에서라도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만약 당시에 멋모르고도 큰 사고를 치지 않으셨다면 윤리감각이 발동했기 때문일 거예요. 또 이와 더불어 내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생각날지도 모릅니다.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 베푼 배려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온 거예요.


  내가 발 딛고 사는 궁극적인 현실은 타인과 맺는 관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될 내 개인적인 판단기준이 아니에요. 윤리는 이런 소중한 관계를 튼튼하게 가꾸는 ‘건강 원칙’입니다. 물론 윤리의 힘이 항상 존중받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자기 보존을 원칙으로 하지만 역으로 파괴의 힘에 끌리기도 하거든요. 폭력과 파괴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려는 자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경향은 극도의 허무이자,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그렇게 걸어간 길 뒤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관계의 공생이라는 원칙을 버린다면 그 사람의 끝은 광인 돈키호테보다 훨씬 더 비루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5. 마지막으로 산초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전에 등장하는 인물치고 산초처럼 귀에 쏙쏙 박히게 말을 하는 캐릭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책 말미에 산초의 어록을 따로 모아 주신 것 같은데요. 이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최고로 꼽는 산초의 ‘명언’은 어떤 것인지, 그 이유도 함께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질문을 고르셨네요! 너무 많아서 딱 하나 꼽기가 어려운데요. 저는 이번 책을 쓰면서 산초가 공작부인과 나눈 대화가 눈에 새로 들어왔어요. 『돈키호테』를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드릴게요. 공작부인은 산초와 돈키호테가 어떤 모험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독자입니다. 공작부인은 종종 산초에게 곤란한 질문을 합니다. 왜 산초는 돈키호테가 광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가, 같은 질문이요.


  산초는 이렇게 답합니다. 자신은 주인의 모자란 면까지도 사랑한다고요. 그러고는 돈키호테를 ‘모자란 사람’으로, 자신을 ‘모자란 사람의 모자란 종자’로 취급하는 공작부인의 ‘분별심’을 신랄하게 꼬집습니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땅속에 들어갈 때에는 날품팔이건 왕자건 좁은 길을 가며, 신분의 차이가 있다 해도 교황의 몸이 교회지기의 몸보다 땅을 더 차지하는 것은 아니니, 묘 구덩이에 들어갈 때면 누구나 구덩이에 맞춰서 움츠리고 들어가지요. 아무리 싫어도 딱 맞추어 웅크리지 않을 수 없게 해놓고서는 그저 안녕히 주무시라고 하는 겁니다요. 그러니 다시 말씀드리지만요, 제가 바보라서 마님께서 제게 섬을 주시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저는 신중한 자로서 아무것도 받지 않을 줄도 압니다요.”


  저는 이 구절이 머리가 아닌 ‘뱃심으로’ 세상만사를 소화하는 산초의 통찰을 탁월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그 통찰의 기반이 말 그대로 신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공작부인을 비판하는 배짱도 놀랍지만, 무려 죽음을 모티브로 비판을 전개하는 것 좀 보세요. 현생에서 당신은 나에게 섬을 하사할 수도 있는 권력자지만, 죽음이라는 공통운명 앞에서 우리 모두 동일한 신세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절대적으로는 평등하다는 거예요. 심지어 그토록 자신이 바라온 ‘섬’마저도 한철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성찰까지 해내죠.


  어떻게 산초는 이런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었을까요? 산초는 까막눈인 데다가 배움을 좋아하는 캐릭터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성경과 같은 ‘텍스트’가 있어요. 바로 자신의 몸이에요. 산초 판사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몸에 민감하고 또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돈키호테와 함께 길을 떠나 ‘온몸으로’ 고생을 하면서 그의 통찰도 점점 업그레이드됩니다. 자,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들 역시 세상과 길, 내 몸과 친구만 있다면 얼마든지 ‘배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늘 가슴에 새기고 싶은 놀라운 캐릭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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