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아는 군주, 선제가 주도권을 잡기까지
몰락한 황족의 후손으로 18년간 평민으로 지내다 천운으로 황제에 오른 선제 유병이. 그는 정치와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막상 황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선정을 펼쳐, 한나라의 중흥기를 열었다. 선제의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제의 25년간의 재위 기간 중 초기 8년간의 행적, 그 중에서도 선제와 곽광의 8년 간의 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이 재위에 오른 선제가 곽광의 권력을 해체하고, 조정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힘이 없는 군주가 살아남는 법
선제 초기 8년은 곽광의 시대였다. 곽광이 누구인가? 앞서 보았듯, 곽광은 무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정치와 군사권을 양손에 쥐어, 소재를 보필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한나라의 사직을 보존키 위해 음란한 유하를 폐위, 사심 없이 선제를 옹립한 충신 중의 충신이다. 반고 역시 그런 곽광을 ‘주공과 이윤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극찬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소제가 후사 없이 붕어하면서 생긴 힘의 공백이, 곽광의 힘을 크게 만든 것이다. 그 힘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무려 황제를 넘어설 정도였다.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할 권한을 쥐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이러한 힘의 배치에서는 군신간의 힘의 불균형은 피할 수 없다. 힘이 너무 없는 황제와 힘이 너무 과한 신하!
선제가 처음 즉위하여 고묘에 알현할 때, 대장군 곽광이 따라 참승하였는데 선제는 마음속으로 곽광이 두려워 등에 가시가 찔리는 것 같았다. 뒤에 거기장군 장안세가 곽광을 대신하여 참승하자 천자는 마음과 몸이 모두 너그러워 매우 편안하였다.
(「곽광전」, 『한서6권』, 명문당, 69쪽)
곽광의 참승 동행은 선제를 힘으로 겁박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신하의 예’였을 뿐, 다른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허나 선제는 그런 곽광의 존재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꼈다. 왜일까? 그것은 곽광이 나쁜 신하여서가 아니라, ‘황제의 스승이자 보호자’인 곽광이 황제에게 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 바로 ‘옹립과 폐위’의 권한 때문이었다. 만약 곽광의 눈에 잘못 들기라도 하면 선제 자신도 유하처럼 내쳐지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하여 선제는 재위 초부터, 곽광과 관계 맺는 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곽광은 무제 후원 연간부터 국정의 큰일을 장악했는데 이번에 선제가 즉위하자 정사를 황제에게 되돌렸다. 선제는 겸양하며 받지 않아서 모든 국정은 곽광에게 먼저 보고한 뒤에 천자의 어전에 상주하였다. 곽광이 매번 조회에 알현하면 선제도 마음을 비우고 낯빛을 바로 하며 예를 다해 겸양하는 정도가 매우 심했다.
(「곽광전」, 『한서6권』, 명문당, 46쪽)
선제 옹립 후, 곽광은 선제에게 정사를 돌려주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선제는 곽광의 제안을 거절하고, 모든 것을 곽광에게 일임한다. 왜일까? 기억을 더듬어 왕길이 폐황제 유하에게 했던 제언을 떠올려보자. 왕길은 황제로 추대되어 올라가는 유하를 붙잡고 ‘대장군 곽광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조정은 곽광을 중심으로 질서가 만들어진 형세여서, 황제가 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곽광과 신하들이 만든 질서를 믿고 따르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유하는 이 조언을 따르지 않아, 결국 폐위의 수모를 겪었다.
반면 선제가 곽광과 관계 맺는 법은 달랐다. 선제는 모든 신하가 보는 앞에서 곽광을 스승처럼 대했다. 만나면 낯빛을 바로 하고, 예를 다해 겸양했다. 왜일까? 선제가 보기에 한나라의 형세는 그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곽광에게 위임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로, 지금은 나서야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주지하듯 황제의 역할은 50년 이상 재위한 무제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선제는 어제까진 평민이었다가 오늘부로 갑작스레 황위에 오른 군주였으니 무엇을 할 줄 알았겠는가! 선제는 치국에 대해 배워야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배워야 할 것인가? 선제가 보기에 곽광은 두려운 신하였으나, 무제가 탕진했던 한나라의 살림을 회복하고, 신하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그의 리더십만 보더라도, 황제의 스승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한 자였다. 이러한 이유로 선제는 곽광을 스승처럼 대하며, 모든 정사를 곽광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배우는 자의 자세로, 모든 마음을 비우고.
2. 조용히 자기 목소리를 내다
충심으로 황제를 보좌했던 곽광에게도 약한 고리가 있었다. 그것은 집안 문제였다. 문제의 시작은 곽광의 아내 현부인의 욕망이었다. 선제가 황위에 오르자, 현부인은 자신의 막내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고 싶어 했다. 때마침 곽광의 눈치를 보던 신하들이 황후 책봉 문제가 나올 때마다, 곽광의 딸을 추천하려 했기에 일은 순조로울 듯 보였다. 허나 선제는 이 상황을 꿰뚫었는지, 황후 책봉문제가 거론되자 ‘미천할 때 쓰던 칼을 찾는다.’는 의외의 조서를 반포한다. 여기서 말한 ‘미천할 때 쓰던 칼’은 진짜 칼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 함께 지냈던 아내 허평군이다.
황후 책봉문제는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황후 책봉은, 단순 결혼이 아니라, 황후와 연결된 외척을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기존의 권력층을 견제하려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곽광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가문은 없었다. 그러한즉, 선제가 곽성군과 결혼한다면 그것은 곽광의 세력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곽광의 세력을 더 공고히 해줄 뿐이다. 선제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주지하듯 선제는 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기었던 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 부인과의 의리도 저버릴 수 없었다. 선제는 전 부인과 의리를 지키고, 곽광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황후 책봉만큼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제가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왜냐하면 군신간의 힘 배치도 그러했거니와, 조정에서는 이미 곽광의 딸을 황후로 책봉해야 한다는 그들만의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에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면서, 동시에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이 필요했다. ‘미천할 때 쓰던 칼을 찾는다.’는 선제의 조서는 바로 이런 명분을 모두 갖춘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뜻을 드러내어 신하들의 여론을 뒤흔들 자구책! 선제에겐 도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서로 인해 신하들의 여론은 흔들렸다. 무엇보다 이 조서는 전 부인을 황후로 책봉하려는 선제의 마음이 한나라가 표방하는 유교적 비전과도 맞아, 누구도 선제의 조서에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는지 눈치 빠른 신하 중 한명이 선제의 조서를 이해하여, 허평군을 민가에서 데려와 황후로 책봉하자는 상서를 올린다. 그리고 얼마 뒤, 허평군은 황후에 오른다. 무척 소극적으로 보였던 선제의 행동이, 사실은 자신이 놓여 있던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3. 곽씨 가문의 만행, 무게중심이 선제에게로!
허평군이 황후로 책봉되자, 현부인은 분개하여 허황후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방법은 독살! 때마침 허황후는 출산을 앞에 두고 있어 기회까지 좋았다. 현부인은 황후의 병을 돌보는 여의(女醫) 순우연을 꾀어, 황후의 약에 독을 풀 것을 제안한다. 부귀영화에 대한 약속과 함께. 그러자 순우연은 곧 이 일을 수락, 출산을 마친 허황후에게 독약을 마시게 했다. 허황후는 그렇게 죽었다.
황후가 죽자 이번 일을 조사해야한다는 상서가 올라왔다. 이에 선제는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것을 명한다. 이 소식을 들은 현부인은 당황했다. 무엇보다 옥리들이 순우연을 심하게 문책해 그녀가 발설하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이지 않은가. 이에 현부인은 곽광에게 사실을 털어 놓으며, 순우연을 심하게 조사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과연 곽광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오랜 시간 충심으로 일해 온 곽광이었지만, 그런 곽광도 가족의 비리 앞에선 침묵했다. 자신의 공적인 잣대를 가족에겐 차마 적용할 수 없어, 아내의 부정을 눈감은 것이다. 곽광은 자신의 권력으로 순우연이 죄가 없다는 거짓 진술서를 황제에게 올리고, 순우연을 풀어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뒤, 곽광은 결국 자신의 딸을 황후에 앉히고, 막내딸이 황후가 된지 3년 만에 허황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안고, 최고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선제가 보여준 곽광의 사후처리 과정이다. 선제는 곽광의 장례를 황제의 예에 준해서 지내준다. 무덤의 크기는 물론 부장품까지. 게다가 곽광의 후손에 대한 대우도 개국공신 못지않게 파격적이었다. 후손들의 부세를 평생 면제함은 물론, 작위 역시 보장해준 것이다. 소제 때부터 곽광은 자신의 자식들을 비롯해 족당에 친척들을 모두 관직에 앉혔는데 이들 일가가 모두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신하의 죽음치곤 굉장한 규모의 혜택이었다. 선제는 왜 이런 혜택을 베푼 것일까?
곽광의 공은 물론 컸다. 선제 역시 그의 공적을 잊지 않고, 고마움을 드러낸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제에겐 곽광이 죽은 후, 곽씨 가문이 갖게 될 불안도 해결해야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권력을 갖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이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혹 이때 선제는 알고 있었을까? 이러한 자신의 호의가, 훗날 곽씨 가문의 방종으로 이어져 힘의 무게추가 결국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란 걸.
곽씨 가문은 이때부터 사치에 힘쓴다. 자기 집안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현부인은 남편의 무덤을 황제의 무덤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고, 아들인 곽우와 곽산 역시 자신의 집을 크게 늘렸다. 게다가 사치의 마음은 불손한 마음으로 이어지는 법. 그들은 집안에서 가마를 타고 다님은 물론, 황후의 침소와 궁궐 및 황제의 사냥터를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바야흐로 곽씨 가문의 참월 행위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던 것이다.
4. 선제, 드디어 칼을 뽑다.
정권을 쥐고 있던 곽씨 가문이 정사를 소홀히 하면서, 곽씨 가문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상서가 밀려들자, 선제에겐 조금씩 정치참여에 대한 명분이 조성되었다. 특히 어사대부 위상은 곽씨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정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여론을 주도했다. 위상은 인사권이 황실이 아닌 실권을 쥔 재상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문제와 그런 재상의 처자식의 무례와 방종, 그리고 황제에게 직언의 기회를 가로막는 기존의 상서제를 폐지하고 봉사(封事)제를 해야 한다고 간언한다. 여기서 말하는 봉사(封事)는 곽씨 가문의 권력을 축소하기 위한 중요한 방책 중 하나로, 황제에게 직접 간언하기 위한 특수 제작 상주문을 의미한다. 곽광이 살아 있을 때의 상서(上書)는 원본과 부본을 같이 올려 상서(尙書-천자와 신하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를 맡아보던 관직)가 부본을 읽고 필요 없는 상주라 생각하면 올리지 않았는데, 이는 모든 정사가 곽광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선제가 위상의 의견을 수렴하여 봉사제를 택한 것은 모든 신하가 봉사로 상주하여 더 많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과 동시에, 황제의 정치권을 되찾아온 상징적인 일이었다. 곽광이 살아있을 때 겸양으로 침묵했던 선제는, 이제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선제가 위상을 중심으로 정계 개편을 할 때쯤, 선제의 귀에는 하나의 놀라운 소문이 들려온다. 그것은 허황후 사건의 비밀이었다. 선제는 가족의 비리 앞에 눈 감았던 곽광과 현부인의 태도에 놀라고 분노했다. 허나 선제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조정의 모든 실권은 여전히 곽씨 가문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선제는 수 개월간의 긴 호흡으로 조용히 곽씨 가문 권력의 해체 작업을 추진한다.
우선 선제의 칼은 곽광의 가장 먼 친척들의 권력을 향한다. 즉 곽광의 자식들이 아니라 사위들이 갖고 있던 직위부터 칼을 댄 것이다. 선제는 그들의 직위를 낮추거나 타 지역으로 전출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군권이었는데, 선제는 군권이 있는 자들은 군권을 회수하여 이름만 남겨주고, 그렇게 획득한 병권을 자신의 외척 허씨와 사씨에게 천천히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워낙 긴 호흡으로 진행된 일이라 곽씨 가문에서 이를 눈치 채긴 어려웠다. 그렇게 친척들의 직위를 모두 변경한 후, 마지막으로 선제는 곽광의 두 아들의 군권을 회수했다. 그러나 선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사적인 분노를 이용하여 공신 곽광의 집안을 멸족시켰다는 여론이 조성되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선제는 기다렸다.
곽씨 가문은 자신들의 권력이 삭감되자 불만을 드러냈다. 부친 곽광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자신들을 밀어냈다며 선제의 처세를 원망한 것이다. 그들은 선제가 자신들에게 왜 이렇게 박한지 알 수 없었다. 이에 현부인은 자식들에게 허황후 사건에 대한 진실을 말했다. 이 말을 듣자, 곽우와 곽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제서야 선제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제 남은 길은 2개뿐이다. 죄를 고하고 뉘우치거나, 역모를 하거나. 곽씨 가문은 결국 역모를 택한다. 그것이 선제의 명분을 강화시켜주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곽씨 가문의 역모는 생각보다 금방 발각되었다. 곽운의 외삼촌인 이경은 평소에 ‘장사’라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장사는 곽운의 집안이 허둥거리자 이경에게 역모에 대한 가이드를 세워 준다. 정국을 주도하는 위상과 허광한을 먼저 죽이고, 황제를 폐위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말은 새어나와, 장안사람 ‘장장’의 귀에 들어갔고, 장사를 고발한 장장에 의해 집금오(수도의 치안유지 담당)는 손쉽게 장사 등을 체포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선제는 그들을 체포하지 말라 명한다. 왜일까? 선제는 대외적으로 그들이 일신(一新)하기를 기대하고 용서한 것이지만, 사실 이번에 잡힌 장사와 같은 인물은 곽씨 가문과 친분만 있었을 뿐, 곽씨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제는 그들을 풀어주고 다시 기다렸다. 선제에게 필요한 건 곽씨 권력의 중심, 곽우와 곽산의 확실한 역모였다.
체포해야 함에도 체포하지 않고 놓아주는 선제를 보자, 곽씨 가문은 당황했다. 물론 그들도 곽광과의 의리를 생각한 선제가, 반성의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빠른 역모의 계기로 삼았다. 허황후의 죽음을 알고 있는 선제가 자신들을 그냥 둘 리 없다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모는 시작부터 손발이 맞지 않았다. 시작도 전에 이경이 체포되어 모든 역모를 실토한 것이다. 헐!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역모를 다 듣고도, 다시 한 번 곽씨 가문에게 반성의 기회를 준 선제의 태도다. 이 정도의 죄만으로도 사형감인데 선제는 더 이상의 죄를 문책하지 않고 면직처리만으로 마무리 한 것이다. 곽씨 가문은 두려움에 떨었고, 선제의 선처에 신하들의 여론과 민심은 완전히 선제에게 기울었다.
마침내 곽우와 곽산 그리고 곽운은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역모를 서두른다. 선제가 그토록 기다렸던 가문의 중심이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거사 실행 전, 어이없게도 곽산은 기밀서류를 필사하다 걸려 옥에 갇힌다. 이에 현부인은 재산으로 곽산의 죄를 속죄하겠다며 상서를 올렸지만, 상서가 선제에게 보고될 때쯤, 곽우와 곽산의 역모가 완전히 드러났다. 선제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여론과 명분이 충분히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선제의 결단에 곽씨 가문은 순식간에 체포되어, 전원 멸족되었다. 곽광이 죽은 지 2년이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로, 선제는 황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황제의 목소리를 되찾은 것이다.
5. 공부, 나아가고 물러가고 말하고 침묵하는 힘
선제가 처음 황위에 올랐을 때, 곽광은 누구보다 신망이 높았다. 그의 사심 없는 충심과 한나라의 비전에 대한 자기중심이 그러한 고귀함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8년 뒤, 선제와 곽광의 운명은 뒤바뀐다. 선제는 신망 받는 성군으로, 곽광은 대역죄인으로.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바꾼 것일까? 곽광은 황제를 넘어서는 힘을 갖고도, 황제를 탐하지 않았고, 어린 황제들을 보필해 나라를 잘 이끌었다. 그러나 곽광은 가족의 비리에 눈감았다. 한나라의 치국과 평천하를 위해 무수히 뽑아들었던 공적인 칼날을, 수신과 제가, 즉 자신과 자기 가족의 비라 앞엔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곽광이 넘지 못한 한계였다. 반고는 곽광의 이런 한계를 ‘학문과 경술 부족’에서 찾았다. 아내의 비리를 한 번 봐준 것에 불과했던 곽광의 합리화가, 집안의 멸족으로 확장되었으니, 결국 공부하지 않아 생긴 수신(修身)의 문제가 진정 제가(齊家)의 문제로 확장된 셈이다.
반면 선제는 어린 시절부터 시, 서경, 효경을 공부하며, 출처어묵을 배웠다. 여기서 말하는 출처어묵이란, 나아가고 물러가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말하는데, 중요한 건 때와 위치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앞서 보았듯 선제는 늘 자신의 이익보다 형세를 파악해 자신의 거처를 정했다.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에는 곽광을 성심으로 믿고 따랐으며, 자기 목소리를 내야할 때에는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또한 지금이 때가 아닐 경우에는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으며, 과거의 공이 있는 신하라 해도 나라에 위협이 된다면 냉철하게 권력을 해체했다. 선제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때와 위치에 맞는 처신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공부의 힘이다. 물론 공부를 했다고 누구나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공부하지 않으면 존재의 변화는 없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론 겸양을, 다른 한편으론 매서운 칼을 뽑아들며 전혀 다른 존재의 층위를 보여준 선제였다.
선제 재위 초기 8년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황제의 정치권을 되찾은 선제가 앞으로 어떤 정치로 중흥기를 열 것인가?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To be Continued.
글_강보순(감이당, 화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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