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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발굴한서라는역사책] 한나라 최단기 황제의 탄생과 몰락

by 북드라망 2021. 3. 25.

한나라 최단기 황제의 탄생과 몰락

1. 느닷없이 오른 황제!


중국에서 황제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충 봐도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그렇다면 이런 확률은 어떨까? 황제가 되었다가, 폐황제가 될 확률은? 믿기 어렵겠지만, 한나라의 역사에는 실제로 이 엄청난 확률로 황제가 되었다가 무려 27일 만에 폐황제가 된 황손이 있었다. 그는 창읍왕 유하다. 소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으나 본기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황제 유하. 그는 어떻게 한나라 최단기 황제가 된 것일까?

 


소제는 21살, 재위 13년 만에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후사 없이 붕어한다. 과연 누가 소제의 뒤를 이어야할까? 소제를 보위하며 한나라의 가을을 열었던 곽광은 이를 고민한다. 허나 시간적 여유가 없다. 주지하듯 황제는 한시라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 서둘러 후사를 정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황족과 권세가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곽광은 서둘러야 했다.

후사의 전제는 단연 무제의 혈육이다. 그런데 당시 무제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던 인물은 단 한명, 6남 광릉왕 유서뿐이었다. 해서 후사를 논의했던 대부분의 신하들은 광릉왕을 황제로 추대하길 원했다. 하지만 결정권을 쥔 곽광은 유서가 평소 놀기 좋아하고, 행동에 절도가 없어, 무제가 생전에 후사에서 제외시킨 아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유서는 제외! 선택은 무제의 손자항렬로 넘어갔다.

그러나 공을 손자항렬로 넘기자, 의외로 결론은 쉽게 나왔다. 찾아보니 조건에 맞는 손자는 무제의 5남 창읍왕 유박의 아들, 19세의 유하가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무제의 장남 여태자의 증손자 유병이(훗날 선제)가 살아있었지만, 곽광은 ‘무고의 화’로 멸족된 황손인 유병이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후보가 정해졌으니 남은 건 인사검증! 그러나 유하가 황위에 오르려 했는지, 때마침 곽광에게 보고된 유하의 정보는 대부분 가짜뉴스였고, 곽광은 이를 걸러내지 못했다. 팩트 체크의 실패! 무제를 20년 동안 보필하며 한 번의 실수조차 없던 곽광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상황은 그 정도로 급박했던 것이다. 결국 유하는 황위에 올랐다. 과연 곽광의 선택은 어땠을까?


2. 환락의 파티! 27일간의 천하


곽광의 기대와는 달리, 유하의 인물됨은 ‘버닝썬 환락파티’를 즐겼던 경제의 아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란하고 무도했으며, 주변의 충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전형적인 왕의 아들이었다. 뭐 피하려다, 뭐 만난다더니 곽광이 딱 그러했다. 만일 이런 왕이 황제가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참최 상복을 입고도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장안에 오는 동안에도 검식을 하지 않고 시종관을 시켜 여자를 약취하여 의거에 태워가지고 머무는 전거에 들여보내게 하였습니다. 처음 황태후를 알현하고 황태자로 책립된 뒤에도 여전히 몰래 닭과 돼지고기를 사다가 먹었습니다. (중략) 시종관이 부절을 가지고 가서 창읍국에서 시종과 마부와 관노등 2백여 명을 데려와서 늘 궁궐 안에 머물게 하며 장난을 치며 놀게 했습니다. (중략) 소제의 영가가 전전(前殿)에 있는데도 악부(樂府)의 악기(樂器)를 가져오게 하여 창읍의 악인(樂人)을 불러들어 장단을 맞추며 노래하고 연기하게 시켰습니다. (중략) 천자의 법거를 타고 가며 피헌과 난기를 북궁과 계궁까지 달리게 하고 멧돼지와 호랑이 싸움을 즐겼습니다. (중략) 효소황후의 궁인인 몽 등과 음란한 짓을 하고 액정령을 불러 감히 발설하면 허리를 잘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하략)

(「곽광전」,『한서』6권, 명문당, 35쪽)

 

이렇게 앞뒤분간이 되지 않는 막장 황제라니. 역시는 역시였다. 한나라의 유교적 예법에 따르면, 황제는 국상기간에 슬픔과 예(禮)를 다해, 술과 고기를 멀리하고, 모든 향락을 금해야 한다. 하지만 유하는 황제가 어떤 자리인지, 황제는 국상 중에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술과 고기는 물론, 전임황제의 영전 앞에서 콘서트를 열고, 심지어 소제가 생전에 아꼈던 후궁과 음란한 짓을 벌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스펙터클, 광란의 환락파티다. 창읍왕 시절에는 그래도 충간하는 신하들의 눈치라도 봤는데, 이제는 황제라서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오늘 하루 버닝썬 뿐이었다. 유하에게 황제란 그저 자기 쾌락의 범위를 지방에서 전국으로 넓혀준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혹 그래도 나름 황제였는데 뭔가 황제로서의 활동을 하진 않았을까? 있긴 하다. 바로 자기 사람 챙기기! 이것이 유하의 유일한 황제 활동이었다. 유하는 기존의 신하들을 제쳐두고, 창읍국에서 자신을 따라온 신하들 위주로 포상과 관직을 수여했다.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 행위였을까? 아니다. 만약 권력욕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잘하려 노력했을 터, 국상이라는 시기에 망나니짓을 할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하의 자기 사람 챙기기는 과연 무엇일까? 사실 유하의 포상 명분은 거창한데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즐겁게 놀 수 있는 아첨꾼들에게 내린 상일뿐이었다. 쾌락만 있고 눈치는 없는 진정 저 세상 텐션의 황제 유하. 곽광은 어찌해야할까?

 

3. 곽광과 신하들의 민첩한 폐위작전


곽광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자책했다. 허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빨리 유하를 쳐내야 나라가 안정된다. 결국 곽광은 자신이 뿌린 씨앗, 자신이 거두기로 작심한다. 폐위를 결심한 것이다. 헐! 폐위라니! 주지하듯 폐위는 역모다. 언급 자체가 대역죄에 해당하는데, 곽광은 진정 역성혁명이라도 일으키려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폐위는 이전 왕조와의 단절, 혹은 새 왕조의 탄생과 연결된다. 어느 시대, 어느 왕조의 역사를 보더라도 폐위는 늘 이런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곽광이 폐위를 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곽광의 폐위는 자신이 새로운 권력, 더 많은 호사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한나라의 비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곽광에겐 사심이 없었다. 하지만 폐위는 폐위였다. 결심을 했다고 함부로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곽광은 이 고민을 자신의 부하 전연년에게 털어놓는다. 전연년이 말하길,

 

“선제(先帝)께서 장군에게 어린 황제를 부탁하신 것은 천하를 장군에게 맡긴 것으로 장군의 충성심과 지혜로 능히 유씨를 안정시킬 수 있다 생각하신 것입니다. 지금 천하는 솥의 물이 끓는 듯하고 사직이 곧 기울 듯 합니다. 그리고 한의 시법에 모두가 효가 들어가는 것은 오래도록 천하를 다스리어 종묘제사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한의 제사가 끊어진다면 장군은 죽더라도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선제를 뵙겠습니까? 오늘의 이 의논은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군신 중 나중에야 호응하겠다는 자는 제가 칼로 베고자 합니다.”

(「곽광전」,『한서』6권, 명문당, 35쪽)

 

전연년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무제의 유지와 대의였다. 무제가 곽광을 임명해 어린 황제를 맡긴 이유는, 나라가 위태로워 질 경우, 한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곽광과 신하들은 목숨을 주저하며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마침내 유하가 황제로 추대된 지 27일, 거사가 시작되었다.

곽광의 주도하에 신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창읍왕은 종묘사직을 계승할 수 없다’는 뜻을 황태후에게 전한다. 황태후 역시 바로 호응, 곧장 폐위를 실행에 옮기라 명한다. 속전속결! 유하를 미앙궁으로 불러오라는 황태후의 명이 유하에게 전해졌다. 영문도 모르고 놀고 있던 유하는 별다른 의심 없이 태후를 뵙기 위해 온실전으로 들어선다. 궁궐 문을 통과하는 순간, 영화처럼 궐문이 ‘쿵’ 닫혔고, 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유하의 신하 200여명은 그곳에서 대기하던 거기장군 장안세의 기병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되어 하옥되었다. “나의 예전 신하들이 관직에서 무슨 죄를 지었다고 대장군이 모두를 잡아두는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를 소환하는가!”(같은 책, 31쪽)유하는 당황하여 소리 쳤지만, 소용없었다.

곧 황태후가 나오고, 모든 대소신료와 군사들이 좌우측에 사열하는 가운데, 유하는 그 앞에 끌려 나와 무릎이 꿇려졌다. 그리고 곧 곽광과 신하들이 유하 자신에게 보내는 상주문을 듣게 된다. 상주문에는 앞서 말한 그간의 모든 죄상이 세세히 담겨 있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황음하고 미혹하여 제왕의 예를 잃고 한(漢)의 여러 법도를 어지럽힌 죄’(같은 책, 38쪽)였다. 상주문 낭독이 끝나고 유하는 황태후 령으로 즉시 폐위되었다. 그리고 창읍국의 신하 200여 명은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공수와 왕길, 왕식을 제외한 전원이 주살되었다.

유하는 뒤늦게 눈물 흘리며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유하는 자신을 추대한 사람이 누군지를 몰랐다. 그저 황제가 된 것에만 집중했을 뿐, 자신을 추대한 신하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유하를 추대한 곽광이 누구인가? 정치와 군사권을 양손에 꽉 쥔 실력자로, 소제의 정실부인인 황태후가 자신의 외손녀인 인물 아닌가. 유하는 곽광이 누군가를 선택하면 황제가 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폐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신하란 사실을 읽어내지 못했다. 유하는 그저 오늘 하루 즐기기에 여념이 없던 철부지였다.

 

4. 천운을 날린 유하


폐위는 비운일까? 사실 유하에게 비운은 황제에서 폐출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못한 그의 태도에 있었다. 예를 들면, 유하가 폐위되기 10일 전, 곽광을 중심으로 폐위의 담론이 형성될 때, 하후승은 유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읍왕이 제위를 계승하였는데 자주 출유하였다. 하후승은 수레 앞을 가로막고 간언을 하였다. “하늘이 오랫동안 흐리나 비를 내리지 않으니 신하로서 윗자리를 모의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폐하는 어디를 가시려 합니까?” 창읍왕은 노하여 하후승이 요사한 말을 한다며 관리에게 묶어두라고 하였다.

(「하후승전」,『한서』6권, 명문당, 481쪽)

 

하후승은 경학과 천지운기에 밝은 자로, 음양의 기가 정체되어 있는 하늘의 상태를 통해, 필시 불경한 일이 생길 조짐을 읽었다. 한마디로 곽광과 신하들의 마음상태를 읽은 것이다. 그러나 유하는 하후승의 재능과 충언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쾌락로드를 방해하는 신하로 여겨, 하후승을 하옥하는 우를 범한다. 사실 이런 조짐의 해석과 충언은 하후승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신하 공수는 유하가 창읍국에 있을 때, 큰 새들이 날아와 궁중에 모여들고, 왕의 자리가 피로 얼룩진 것이 재앙의 징조라며, 유하에게 삼가고 근신하라 말한다. 그리고 장안에 올라가면 반드시 창읍국의 신하들을 멀리하고, 곽광의 신하들을 곁에 두라 상소했다. 물론 유하는 듣지 않았다. 또한 왕길이란 신하는 유하가 황제가 되어 신나서 올라가는 날, 유하를 붙잡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알기로, 은 고종은 상중에 3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사 때문에 대왕을 부른 것이니 응당 주야로 통곡하고 슬퍼하시면 되니 삼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어찌 상사뿐이겠습니까 마는 모든 남면의 군주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중략) 신은 대왕께서 대장군을 공경하여 정사를 일임하고 팔짱을 끼고 남면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이를 늘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왕길전」,『한서』6권, 명문당, 286쪽)

 

왕길은 유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른다. 국상중이니 그저 제사에 더 집중하고, 모든 정사는 앞서 소제가 했던 것처럼 전부 곽광에게 일임하라 당부한다. 왕길이 보기에 지금의 조정은 황제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곽광을 믿고, 그에 의지해서 국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유하는 왕길의 천운과도 같은 충간 역시 듣지 않았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하후승과 공수 그리고 왕길은 모두 선제 때의 명신으로 활약한다. 이렇게 훌륭한 신하들을 곁에 두고도 이토록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니. 유하에겐 황제에게 가장 필요한 ‘잘 듣는 귀’가 없었다. 좋은 운과 조건을 모두 갖추고도, 유하가 27일 만에 폐위된 이유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폐위 후, 다시 한 번 공석이 된 황제의 자리. 과연 누가 소제의 뒤를 이어 이 혼란을 잠재우고 한나라의 가을을 이어갈까? 그 이야기는 To be Continued.

 

글_강보순(감이당, 화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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