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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발견!한서라는 역사책] 한나라의 화려한 여름은 간다

by 북드라망 2021. 1. 14.

한나라의 화려한 여름은 간다


 

진나라가 14년 만에 멸망했지만 한나라는 100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한나라가 100년의 시간을 버티면서 지속가능했던 것은 앞서 말했지만 ‘황로학’이 정신적인 축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로학이 받쳐준다 해도 흥망성쇠를 피할 수 없는 법. 한 무제가 파워풀한 힘으로 열었던 여름의 뜨거운 열기도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무제는 한나라를 부국강병 국가로 만드는 데 힘을 쏟았기 때문에 도덕적 수양 면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유위법의 한계이다. 많은 것을 이루면 그것에 대한 집착이 커지고 의심도 커지는 법. 달도 차면 기울기 마련이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황로학의 비전이 담긴 회남자에서 황제에게 종국에 강조하는 것은 내면의 덕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내면의 덕을 닦지 않으면 좋은 정치, 좋은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제(五帝) 삼왕(三王)을 보면 천기(天氣)를 품고 천심(天心)을 안고 중도(中道)를 잡고 화기(和氣)를 머금으며 내면에 덕이 형성되었다. 이에 천지가 안정되었고 음양이 제대로 발생하였으며 사계절이 순조로웠고 흔들리던 방위가 바로잡혔다. 그 결과 편안하게 하면 곧 안정되었고 일을 추진하면 곧 시행되었다. 이에 만물을 만들어 내고 뭇 생명들을 화육하였으니, 앞에서 외치면 화답하고 움직이면 따라와 사해(四海) 안이 한마음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상서로운 별이 나타나고 좋은 바람이 불어왔으며, 황룡이 내려오고 봉황의 둥지가 늘어섰으며 기린이 교외에 머물렀다. 


그러나 내면에 덕이 형성되지 않으면 법률을 시행하고 제도를 사용하여도 귀신이 반응하지 않고 복과 길조가 나타나지 않으며 사해(四海) 안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백성들이 교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면에 덕이 형성되는 게 다스림의 큰 근본이다.


(「요략」,『회남자』2권, 소명 출판, 647쪽)


내면의 덕을 형성하는 것이 업적과 재물을 경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많은 업적과 재물을 얻고도 자유로운 자들이 있었다. 앞서 보았던 문경제가 그런 인물들인데 그들의 시대가 태평성대였던 것은 황제가 수행을 통해 권력과 재물을 순환시켰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관포지교의 관중이 그렇고 불교에서 유마거사도 그런 자였다. 아, 부처는 어떤가. 부족함이 없는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자가 아니던가. 권력이든 재물이든 어떤 대단한 것도 그것만으로는 자유로울 수도,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가 없다. 한나라 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라는 커졌고 권력은 막강하지만 불안한 무제


무제는 정말 유능한 황제였다. 총명하고 재능 있는 무제는 나라도 크게 키웠고 권력도 막강해졌으며 아들도 6명이나 낳는 등 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천하의 무제도 나이가 들자 골골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장악하려했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냈으며 의심이 심해졌다. 특히 공손홍 이후 3명의 승상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문책하는 탓에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제 승상의 지위는 무제의 욕받이뿐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운 자리가 되었다. 그러니 누가 승상이 되고 싶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위황후의 언니를 부인으로 둔 공손하가 승상으로 낙점되었다. 그 당시 상황을 한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업무가 많고 대신들을 엄히 문책하였다. 공손홍 이후 승상 이채, 엄청적, 조주 3인이 연이어 직무와 관련하여 자살했다. 석경은 사람이 근신하여 제 명대로 살았지만 자주 견책을 당했다. 처음에 공손하가 승상을 제수받자 공손하는 인수를 받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본래 변방 출신으로 말이나 타는 기병으로 관직을 맡았기에 재능이 도저히 재상 직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제와 측근들이 공손하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지만 무제는 “승상을 일으켜라.”라고 말했다. 공손하가 일어나려 하지 않자 무제는 그냥 일어나 나갔고 공손하는 부득이 받아야만 했다. 공손하가 나오자 좌우에서 그 까닭을 묻자 공손하가 말했다. “주상은 현명하시어 내가 감당 못하리라 알고 계시며 엄히 문책하실 것이니 지금부터 위태로울 것이요.” 


(「공손유전와양채진정전」,『한서』5권, 명문당, 460쪽) 




속사정을 모르고 보면 공손하가 눈물을 흘리면서 승상 자리를 거절하니 겸손한 자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제발 자기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인 것. 그럼에도 무제는 공손하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떴기 때문에 승상 자리를 수락할 밖에 없었다. 정치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다. 그 모든 일을 승상이 책임져야 하니 이제 공손하는 목숨을 건 레이스를 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승상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무제가 승상을 문책하면 승상도 그 아래 관료들을 문책할 밖에. 그렇게 되면 일의 해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느라 관료 사회 자체가 불신 풍조가 만연해진다. 무제는 능력 제일주의자로 사람보다는 업적이 먼저였다. 나이가 들어 마음의 여유까지 없어지자 자신의 권력으로 신하들의 목숨을 더더욱 쥐락펴락했다. 그렇게 무제는 불통의 군주가 되어 가고 있었다.



무고의 화와 태자의 죽음, 강충와 무제의 합작품


이때 한나라 왕실을 뒤 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고의 화! 장희빈 같은 드라마에서 보면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고 주문을 외워서 저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나라에서는 이런 인형을 땅속에 묻고 수명 단축을 위한 주술행위를 했는데 이것을 ‘무고(巫蠱)’라고 한다. 마지못해 승상을 한 공손하는 간신히 10년을 버텼지만 무제를 무고했다는 의심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무고는 공손하의 목숨뿐 아니라 태자의 죽음까지 초래하게 된다.


당시 강충이라는 문제적인 인물이 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강제로 조나라 경숙왕의 상객이었으나 조왕의 태자가 음란한 사생활을 무제에게 밀고할까 두려워 잡아 죽이려고 했으나 도망쳐서 무제에게 조왕을 고발했다. 주변에서 강충은 개인의 원한을 위해 까발린 거라고 무제에게 알렸으나 무제는 강충의 장대한 용모와 특이한 의상에 마음이 끌려 신임했다. 신분도 불분명한 강충은 그 이후 승승장구하여 귀족들과 신하의 사치를 적발했고 그들은 두려워서 속죄의 뜻으로 수천만의 돈을 바쳤다. 귀족들과 신하들을 벌벌 떨게 하면서 돈을 걷는 강충을 무제는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강충의 위세는 태자가 눈치를 봐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


한 번은 태자의 하인이 천자 전용 도로에서 수레를 타다가 강충에게 딱 걸렸다. 태자는 측근을 관리 못했다는 말이 무제에게 들어 갈까봐 알리지 말아달라고 강충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강충은 가차 없이 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는 신하라면 응당 이렇게 해야 한다며 더 크게 신임했고 강충의 위세는 장안을 진동시킬 정도였다고 한서는 기록한다. 이 사건으로 태자와 강충 사이가 나빠졌는데 무제가 병이 나자 강충은 더럭 겁이 났다. 만약 무제가 죽고 태자가 황제가 되면 자신은 바로 사형될 수도. 그런 생각에 이르자 강충은 무제가 아픈 것은 누군가 무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속삭인다. 심신이 약해진 무제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고 강충에게 무고한 자를 찾으라고 명을 내린다.


강충은 흉노(胡人) 무당을 시켜 땅을 파서 인형(偶人)을 찾아내었고 무고한 사람을 잡고 밤에 굿을 하여 도깨비와 굿을 한 자리도 찾아내었는데 그때마다 사람을 잡아 조사하면서 달군 쇠와 형구로 고문하고 불로 지지며 강제로 자백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서로 무고했다며 거짓으로 고발하며 관리들은 그때마다 대역무도한 죄로 다스리니 연좌되어 죽은 자가 사건 전후로 수만 명이었다. 이때 무제는 나이가 많아 측근들이 모두 무고로 저주한다고 의심하였고 의심을 받거나 안 받거나 감히 원통하다고 하소연할 자가 없었다. 강충은 황제의 뜻을 알아 궁중에 무고의 기운이 있다면서 먼저 후궁이나 황제의 총애를 바라는 부인을 치죄하고 이후 황후까지 미치게 되어 마침내 태자의 궁궐에서 무고를 찾는다 하여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을 파내었다. 태자는 너무 두려워 변명조차 하지 못하자 강충을 잡아다 직접 처형하려고 하였다.


(「괴오강식부전」,『한서』 3권, 명문당, 249쪽)


강충이 무제에게 무고를 말한 것은 태자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를 잡기 위해 수만 명이 무고로 죽어야 했다. 한서는 강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강충은 무고를 만들어 태자를 죽였으며 식부궁은 간계를 꾸며 동평왕을 죽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작은 거짓말로 큰일을 망친 것이며 소원한 사람이 가까운 사람을 몰락하게 한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괴오강식부전」,『한서』 3권, 명문당, 275쪽) 


그렇다. 강충은 비열한 놈이다. 하지만 그만을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강충이 나쁘다고 해도 무제가 호응하지 않았다면 무고의 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 비극적인 사건은 강충의 욕망과 무제의 욕망이 맞아 만들어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강충은 무제의 욕망을 채워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서에는 당시 무제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때 무제는 고령으로 마음속에 의심이 많았고 좌우에서 무고에 의해 저주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캐려고 하였다. 승상인 공손하 부자와 양석, 제읍 공주와 항우동생 위청의 아들인 장평후 위항 등이 모두 주살되었다.”  (「무오자전」,『한서』 5권, 명문당, 212쪽)




한서를 읽다보면 선과 악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악을 행한 자도, 그것을 당한 자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의 욕망과 한나라의 식어가는 여름이 얽히고설키어 만들어내는 변화가 사건으로 드러날 뿐이다! 아무튼 그 당시 태자에게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태자가 진실을 말한들 무제가 태자의 말을 알아주었을까. 당시 무제는 병으로 인해 감천궁에 피서 중이었는데 궁지에 몰린 태자는 고민을 사부에게 의논을 했고 사부는 두려운 마음에 강충을 먼저 죽인 후 황제에게 알리자고 제안한다. 태자는 사부의 말대로 강충을 죽였으나 강충의 측근이 황제에게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전하면서 일이 커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군대와 아들의 군대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무제가 반란을 진압하면서 태자는 도망쳐서 숨어 있다가 체포 위기에 처하자 자살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나라 한나라에서 그것도 한무제의 태자가 이런 죽음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모든 일이 1년 동안 일어났다. 공손하가 죽은 해가 정화 2년으로 무제 나이 66세가 되던 해이다. 그 해 여름에 무고의 화가, 그리고 7월에 태자가 강충을 죽였고 8월에 태자가 호현에서 자살. 무제가 강충을 들인 이후 이 모든 일이 일어나면서 황실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무제의 운이, 그리고 한나라의 운이 끝나려는 것일까. 


글_박장금(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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