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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발굴한서라는역사책] 일 없는 왕자들, 무엇을 할 것인가?

by 북드라망 2020. 11. 25.

일 없는 왕자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하인이로소이다!


한나라 경제의 아들이요, 무제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려 한다. 역대로 사고뭉치 왕자들이 없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경제의 아들들과 그 직계들은 유난히 사건도 많고 탈도 많다. 앞서 보았듯이 단순한 사건 사고가 아니라 해괴하고 망측한 대형 사건이자 사고였다. 풍요롭기는 넘치게 풍요로운데 딱히 에너지 쏟을 데가 없는 왕자들은 쾌락에 ‘버닝썬’하다가 패가망신을 자초했다.




경제의 아들들이 유독 무료했던 이유는 오초칠국의 난리 이후 제후국의 자치(自治) 권한이 박탈되고,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문제와 경제 때 황제 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제후국의 힘이 막강했는데, 경제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여겨 영지를 삭감하는 정책을 펼쳤다. 오나라 초나라를 중심으로 모두 7개국의 제후들은 영지 삭감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 권력에 대한 전복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제후들의 반란은 바로 진압되었고, 이로 인해 제후들에 대한 경계는 더욱 삼엄해질 따름이었다. 무제 때부터 2천석 이상의 관리는 중앙조정에서 파견하여 제후국을 다스리게 했다. 제후왕은 황실의 왕자로서 혜택을 맘껏 누리지만, 나라 다스리는 일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제후들의 모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중앙에서 감찰관까지 파견했다. 제후라는 직책은 일이 없어 자유로운 백수와는 완벽하게 달랐다. 제후왕은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은 많은 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일부는 취미 오락 쾌락에 빠져 패가망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다른 왕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쾌락에 탕진하는 파가 있다면 또 다른 측면에서 인생을 탕진하는 파가 있었으니, 경제의 일곱 번째 아들인 조나라 경숙왕 유팽조가 그 주인공이다. 인간의 행동 패턴은 참으로 각양각색이라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 인물이다. 유팽조는 사치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하고 싶어 몸살을 앓는 인간 유형에 속했다. 부지런히 일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유팽조가 일을 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는 않았다. 


유팽조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승상과 2천석 관리가 한나라의 법도로 제후국을 다스리는 일에 불만이 많았다. 제후왕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으니, 조왕실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제후국이 중앙조정의 감시를 받는 환경에서, 유팽조는 황실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묘책을 짜낸다, 이 묘책 아닌 묘책은 급수로 치면 최하였다.  


그 묘책은 일명 하인-되기! 승상이나 2천석 관리가 조나라에 부임하면 유팽조는 하인의 옷을 입고 나가서 영접하며 관사까지 손수 청소하였다. 유팽조는 명색이 왕으로서의 체통은 던져버리고, 지나치게 겸손하게 굴었다. 반전은 이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 전적으로 중앙 관리들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한 책략이었다. 


유팽조는 승상이나 관리들에게 어려운 일을 제기하거나 거짓으로 선동하면서, 이들이 실언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바로 기록해 두었다. 이들이 법대로 처리하려 하면 옛 기록을 가지고 협박하였고, 말을 듣지 않으면 상서하여 고발하거나, 사욕을 채우려 나쁜 일을 했다고 덮어씌웠다. 


겉으로는 굽실거리며 겸손한 척했지만, 뒤로는 중상모략을 일삼고 잔혹하게 굴었던 것이다. 유팽조는 중앙 관리들의 행정을 사사건건 간섭하고 트집 잡는 것을 왕의 직무로 삼았다. 제후의 일을 대신하는 중앙 관리들이 미워서 역으로 뒤에서 감시하고 흠집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왕, 그것도 지나치게 굽실거리며 잘해주는 척하다 뒤통수 치는 것을 일삼는 왕이라니,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이 왕자다움인가?


사실 유팽조는 재능과 실력이 넘치는 편에 속했다. 부지런하고 법률을 잘 알았으며 이재에도 밝았다. 각 현에 상인을 파견하여 독점 판매로 거둬들인 수입이 조세보다 많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유팽조는 궁궐을 꾸미고 귀신을 섬기는 등 돈 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후궁과 자식이 많았는데, 돈을 모두 이들에게 주어 탕진해 버렸다. 유팽조가 관심을 보인 건, 오직 일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그런데 그것을 온전히 할 수 없자, 유팽조가 선택한 건, 하급 관리의 역할이었다. 도적을 잡겠다고 한나라 황실에 상서하고, 밤마다 군졸들과 함께 수도 한단의 성안을 순찰했다. 


왕자의 신분으로 하급관리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유팽조에게 일은 주로 다른 사람을 잡아 넣으려는 음험한 횡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사절이나 과객들이 조나라 수도인 한단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남의 흠집을 잡아내거나, 도적을 잡거나. 이 일맥상통한 행위에 열정을 다 바치는 왕 또한 버닝썬의 왕자들만큼 엽기적이다. 성의와 열정을 이런 일에 다 쏟았던 유팽조는 스스로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의 7남 유팽조와 8남 유승의 대화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중산국의 정왕 유승은 술을 즐기고 여색을 좋아하여 자녀가 1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 유승이 일 좋아하는 유팽조를 비난하며 말했다. 


형은 왕이 되어 겨우 관리가 할 일이나 대신하고 있다. 왕자라면 당연히 매일 음악을 듣고 가기나 미인을 거느려야 한다. (반고, 「경십삼왕전」, 『한서』4권, 204쪽)


유팽조 또한 유승을 비난하며 말했다.


중산왕은 사치하고 음탕하며 천자를 도와 백성을 어루만져 주지도 못하니 어찌 번신(藩臣)이라 할 수 있겠나. (반고, 「경십삼왕전」, 『한서』4권, 205쪽)


유팽조와 유승의 대화는 코메디 같다. 서로를 왕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는데, 우리 눈엔 둘다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누릴 수 있는 걸 다 누리는 게 왕자다운 삶이라고 말하는 유승이나 잘못을 찾아내어 벌을 내리는 게 왕자다운 삶이라고 말하는 유팽조나 오십보백보, 도긴개긴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자긍심을 보이기까지 한다. 왕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 왕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여긴다. 




그러한 까닭에 이들은 사는 법이 달랐어도 불만과 고통받는 부분에서는 일치했다. 왕자들의 권한이 너무 제한되어 있으며, 황실이 왕자들을 너무 소홀히 한다는 것. 유승은 동생 무제에게 제후로 사는 괴로움을 상서한 바 있었다. 중앙 관리들이 붕당을 이뤄 서로 위하면서 종실을 능멸하는 현실에서 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무제는 제후에 대한 예를 두터이 하고 제후에 관한 보고를 줄이고 더 가까이했지만, 전제 군주제 사회에서 제후왕들에 대한 권력 제한은 불가피했다.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이 시대 황제는 한 사람, 나머지 왕자들은 이 구도 안에서 사는 법을 찾아야 했다. 사실 왕자들에게 권력이 주어져도 문제, 권력이 박탈되어도 문제는 일어났다. 넘쳐나는 혜택과 재물,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 휘둘리면 언제든 재앙이 생겨났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회 탓 남 탓만 한다면, 어떤 사회에 살아도 불만은 넘치게 많고 운신의 폭은 늘 협소할 뿐이다.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면서 부당함에 항의하고 사는 건 기본이다. 그러나 왕자들은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 욕구만 채우려 하다 문제를 일으켰다. 그 결과 반란을 일으키거나, 사치와 쾌락에 빠지거나, 술수를 부리거나, 횡포를 부리거나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자로 태어난 자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수행자로소이다!


반고는 경제의 아들 중 높은 덕과 재주를 가지고 탁월하여 다른 왕자들과 달랐던 인물로 둘째 아들인 하간국의 헌왕 유덕을 꼽았다. 유덕은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여 실사구시를 추구했다. 유덕은 이름 그대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유학자였다. 세상에 좋은 책을 얻으면 잘 필사하여 두고 진본을 넘겼는데, 금이나 비단을 주면서 책을 구했다. 이 때문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불원천리 찾아왔고, 또는 조상의 책을 가지고 유덕에게 증정하는 자가 많았다. 유덕이 소장한 책은 한나라 황실이 소장한 책과 맞먹었다. 


유덕은 고문으로 된 선진(先秦)시대의 옛 책을 구했다. 회남왕 유안도 학문에 있어 유덕 못지 않았는데, 반고는 유안이 구한 책들은 부화(浮華)하다고 평가한다. 부화하다는 것은 허황하기만 하고 실질이 없다는 말이다. 유안은 황노학의 대가로 도가류의 책뿐만 아니라 불로장생의 방술이나 술수에 관한 책들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한 것이다. 유덕은 유안과 다르게 『주관(周官)』, 『상서(尙書)』, 『시』, 『예기』, 『맹자』, 『노자』, 공자 70 제자들의 책을 중시했다. 그리고 유학의 법도를 지켰다. 유덕은 실력만 쌓은 게 아니라 배운 그만큼 자신을 연마해 나간 유학자의 전형이었다. 이 때문에 유덕은 안일하지 않았고, 음란하지 않았으며, 잔인하지 않았고, 음모나 술수를 부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덕은 치국의 근본을 대책문에 담아 무제에게 올렸다. 유덕은 직접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환경이지만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건의함으로써 왕자의 역할을 대신했다. 반고는 유덕에게서 왕자들의 삶의 좌표를 찾아내었다. 왕자들이 유덕처럼 견실하게 예법을 지키며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을 근심한다면, 적어도 재앙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을 수 있다. 


반고가 보기에 종실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 화려하고 풍요로움이 부러울 수 있지만, 여기에만 안주하면 인생은 위태롭다. 한 번에 탕진하고 가는 인생, 그 뒤끝이 좋을 리 없다. 탐욕이 자신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해친다. 그래서 반고는 왕자들의 삶을 일별하면서 자신을 먼저 다스린 제후왕을 주목했던 것이다.    


경제 아들 중에는 유덕이 탁월한 삶의 방향성을 보여줬지만, 덕이 충만한 종실 집안이 또 있었다. 고조 유방의 이복동생인 초나라 원왕 유교의 작은 아들 집안이 그러했다. 유교의 작은아들은 유휴(유부)로, 그 직계는 유벽강-유덕-유향-유흠으로 이어진다. 초원왕 유교가 글을 좋아하고 재주가 많아 시경을 전공한 학자들을 따라 배우면서 예를 다해 대접했다. 이런 유교의 태도는 작은아들 유후에게로 이어졌다.




유후의 아들 유벽강은 시경을 즐겨 공부했고 글을 잘 지었다. 무제 때 종실 자제로 이천석 관리에 쓸만한 사람으로는 유벽강이 으뜸이었다. 그러나 청정하고 욕심이 없어서 학문을 즐길 뿐 벼슬은 하려 하지 않았다. 무제의 뒤를 이어 소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외척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 종실 유벽강을 등용했는데, 이때 나이가 80세였다. 


왕자로 태어나도 그 세대가 내려가면, 황제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종실로 누리는 은택도 사라지고 만다. 매 순간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청정하게 살 뿐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공부가 특효약이다. 물론 공부가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는 데 치중한다면, 그 공부 또한 화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부한 대로 일상을 지켰던 이들은 적어도 자신을 망치지 않았다. 자신을 다스리는 동시에 세상을 고요하게 했다. 


유벽강의 아들 유덕 또한 일생을 고귀하고 탁월하게 살았다. 경제의 2남 유덕과 이름이 같다. 그래서인지 유벽강의 아들 유덕 또한 품성과 행실 또한 덕스러웠다. 유벽강은 젊어 황노의 사상을 배웠고, 지략이 뛰어나 무제는 천리를 달리는 망아지, 천리구(千里駒)라 칭찬했다고 한다. 노자의 지족(知足)을 배워 실천하여 어떤 상황이든 그 순간의 삶에 만족했다. 어린 소제를 대신하여 섭정했던 곽광이 유덕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려했으나 곽광의 권세가 너무 큰 것을 걱정하여 장가들지 않았다. 한때 탄핵과 비방을 당해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나, 산촌에 은거하여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사람의 품격은 결국에는 알아보는 때가 있는 법. 곽광이 나중에 후회하여 유벽강에게 청주자사 서리를 제수했고, 선제 옹립에 참여하여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관내후로 백성을 다스릴 때도 후덕했고 죄수를 바르게 재판했다. 가산이 백만금을 넘었으나 사치하지도 방탕하지도 않았다, ‘부유하면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다’는 말을 철칙으로 삼아, 재물을 형제들이나 빈객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재물에 욕심내지 않는다. 유벽강은 노자의 지족을 알고 실천했다. 이만한 수행이 어디 있으랴. 수행하는 자, 스스로의 삶도 평안하지만 주변도 평안하다. 


유덕의 아들이 『열녀전』을 지은 그 유명한 학자 유향이고, 유향의 아들이 모든 책을 분류해서 정리한 『칠략』의 저자 유흠이다. 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후의 직계들은 공부로 수행하며, 넘치지 않게 살았다. 자신을 돌아보며, 동시에 주변도 돌보았다. 적어도 쾌락과 탐착에 빠지지 않으면, 삶은 평화롭게 계속된다. 반고는 왕자들의 열전을 통해 인생은 거창한 게 아님을 대변한다. 자신을 다스릴 방법을 찾고 실천하면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 이런 삶 말고, 더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글_길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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