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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 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1. 1. 6.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

지은이 인터뷰

1. 이 책에서 카프카의 삶과 작품을 통해 가족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카프카를 ‘가족’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시켜 생각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카프카와 ‘가족’을 연결시키는 것은 참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생의 첫번째 계단인 ‘가족’을 절대로 떠날 수 없다고도 이야기했지요. 무엇보다 초기 3부작인 『선고』, 『화부』, 『변신』이 모두 부르주아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카프카가 쓴 미완의 장편 『실종자』, 『소송』, 『성』도 모두 부자관계의 확장판이지요. 


주인공들은 모두 아버지라는 지상의 척도로부터 어떻게 고개 돌릴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죄인이 되어 있더라’라고 하는 『소송』조차도 아버지이신 천주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이 어떤 아버지의 아들인지, 어떤 시대의 아들인지를 갖고 씨름하는 셈입니다. 카프카는 ‘가족’을 통해 우리 각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탐구했던 거지요. 


카프카에게 있어 가족은 한 인간을 출현시키는 최초의 형식입니다. 어떤 존재도 신체라고 하는 물질적 형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요. 자유로워 보이는 저 새도 날개라고 하는 몸에 묶여 허공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새는 창공을 날 수 있지만 심연을 헤엄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날개는 삶의 조건이자 한계입니다. 카프카가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와 비슷합니다. 카프카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 상식을 요구하는 이웃들이 한 존재의 삶을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덕분에 사는 겁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살 때 발생하지요.   


카프카는 존재가 자신을 둘러싼 조건에 얽매여 있음을 강조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리 특정한 규정 속에 놓인다 해도, 우리는 그 조건 밖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가족들이 ‘인간과 갑충’(『변신』), ‘장난감과 장남’(「가장의 근심」)처럼 이종(異種)들의 복합체로 나오는 까닭이 그 이유입니다.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세상의 찬바람으로부터 몸을 피해, 화목하게 새끼를 낳아 기르는 스위트한 관계는 아닙니다. 카프카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욕망 덩어리입니다. 아무리 ‘너는 아빠잖아, 너는 아들이잖아!’라고 규정하고 규정받는다 해도, 그런 규정 밖으로 빠져나가는 만 갈래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프카는 평범한 한 가족 안으로 현미경을 들고 들어가 구성원 각자가 가진 온갖 욕망들을 샅샅이 훑어 줍니다.   


카프카는 ‘가족’이라는 화두를 붙들고서 어떻게 다른 삶을 살 것인가를 탐구했습니다. 사실 카프카와 가족을 이렇게 연결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 자신이 가족이라는 굴레에 대해 생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고 나서 비로소 사회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로서 느끼게 되는 것들, 생각하게 되는 것들, 갖추게 되는 물건들, 그런 것들로 제가 매일같이 주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어떻게 하면 엄마라는 압박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카프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카프카 덕분에 여성이라는 압박, 나아가 인간이라는 압박까지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이 책의 1부는 카프카의 약혼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세 번이나 약혼을 했지만, 결국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카프카는 왜 이렇게 결혼을 꺼렸던 걸까요? 그러면서 왜 약혼은 세 번이나 했던 걸까요?


시절 인연이 그랬던 거지요(^^). 한 여인과 두 번이나 약혼만 하도록, 어떤 연인과도 결혼은 할 수 없도록 하는 운명이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좀 뜨악해 보이는 이 결과가 카프카에게는 참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이런 태도는 카프카의 직장 생활이나 보통의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거든요. 카프카는 ‘노동자 재해보험공사’의 직원이었지만 회사에서의 사색과 출퇴근 전후의 긴 산책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한마디로, 출근은 하지만 직장인처럼 지내지는 않았지요. 우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 하고 문예 서클 활동도 했지만, 절친이었던 막스 브로트와도 공부를 함께 한다거나 같이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그 누구도 자기 삶으로 완전히 데리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반대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프카는 늘 위태로운 가족관계만 그렸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집 근처에서 평생을 지냈습니다. 가족을 완전히 떠나지도 않았던 거지요. 그렇습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거리’였습니다. 어떤 관계도 영원하고 확실한 것으로 갖고 가지 않는 태도 말이지요. 


세 번의 약혼은 카프카가 결혼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카프카는 프라하 부르주아들이 하는 그런 결혼만은 할 수 없었다는 것도 말해 주지요. 단지 카프카는 가족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도 가지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다. 카프카는 사랑이 우리 자신을 떠나게 하고 삶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잉태하는 힘임은 확신했습니다. 첫번째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 양에 대한 사랑으로 초기 3부작을 비롯해 앞으로 쓸 작품들 대부분의 테마를 얻게 되거든요. 카프카는 가능했다면 약혼녀가 원하는 그 ‘가족’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상대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를수록 점점 더 프라하, 부르주아, 보험공사라고 하는 울타리에 갇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프카가 고민한 것은 뭔가 다른 가족관계였습니다. 카프카는 무려 세 번이나 시도해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계속 달라지는 각자의 욕망을 보고 가는 관계를 꿈꾸면서요.    

  


3. 책에서 카프카가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가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반항하지도 않으면서, 『변신』의 갑충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살아간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카프카의 이러한 태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카프카는 가족 자체가 나쁘다거나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부모 없이는 이 세상에 오지 못하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악덕한 존재이니 벌을 받아야 한다든가, ‘저런 속악한 사람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어!’라며 집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거지요. 세 번의 약혼은 그가 가족이라고 하는 이 조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문제는 그 조건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란 삶의 척도를 뜻했습니다. ‘프라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유대인이라면 이렇게’, ‘남자라면 이렇게’ 등,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모범으로서의 ‘아버지’였지요. 그런데 『변신』에서는 아버지의 집에서 갑충으로 사는 아들이 나옵니다. 도대체 갑충에게 인간 아버지의 말이 제대로 들리겠습니까? 빚을 갚아야 한다는 장남의 의무도, 여동생의 바이올린 레슨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오빠의 책임도, 갑충에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요구가 되겠지요. 카프카는 ‘아버지-어머니-자식’이라고 하는 성(聖)-삼위일체의 세계 안에 ‘갑충-아들’을 밀어 넣음으로써 이 관계가 강요하는 상식의 무게를 덥니다. 그리고 한 집안에 얼마나 많은 욕망이 꿈틀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체코는 독일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는 독일계-체코계-유대계로 내려오는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가 철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체코계와 유대계 각각의 민족주의가 극렬하게 부딪치게 되었지요. 독일식으로 교육받고 체코 사회의 주류가 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의 낙원을 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카프카는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속물주의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면서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카프카는 속악한 이곳과 순결한 저곳, 즉 비참한 현실과 충일한 이상을 나누는 사고에 반대했습니다. 


새에게 자유란 무엇일까요? 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물고기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새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물고기에 대한 동경은 새이기 때문에 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거미라면 물고기에 대한 꿈은 꾸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카프카는, 우리 각자가 느끼는 한계와 희망은 지금 이 조건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핍박받는 유대인은 프라하라고 하는 시공에서 나온 한계지요. 어디 팔레스타인이 낙원일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가면 또 다른 모순과 삶의 한계가 출현할 텐데요. 카프카는 낙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금 여기가 지옥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묻습니다. 체코인들처럼 똑같은 시민으로 대우해 달라는 욕망이 있기에 ‘유대인은 차별받는다’라는 생각이 가능해지는 것이니까요. 내 욕망이 내 삶의 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욕망을 바꾸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카프카의 『변신』과 『성』은 이 문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아들은 매일같이 하던 월급 생각을 내려놓자마자 자신의 작은 방이 이상한 부피로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는 마룻바닥의 거침, 구석 먼지의 풀풀거림, 공간을 채우는 일상 소음의 은근함 등 자기 삶을 채우고 있던 다른 요소에 마음을 쏟자마자 월급이라는 중력에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카프카가 ‘변신’이라는 테마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지금 여기의 삶을 다르게 느껴 보기 위해서였어요. 프라하가 어디 체코인, 유대인만의 것이겠습니까? 산책가로서 작가로서 사색가로서 바라볼 때, 프라하는 골목마다 더듬어 볼 길이 새로이 열리는 별세계가 됩니다. 카프카는 우리의 욕망이 너무나 다채롭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껴안자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낳은 이 세계 안에서도 더듬고 걸어 볼 길은 너무나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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