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약방, 여기가 로두스다!
약사가 되기 싫었다
나는 약사라는 직업에 그다지 소명의식이 없었다. 약대 대신 미대에 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그 어떤 과목보다 미술 시간에 집중했다. 미술로 먹고 살 자신이 없어서 엄마가 권한 약대에 갔지만 미술은 내게 못다 이룬 꿈이었다. 약사가 되어서 돈을 벌게 되면 그 돈으로 미술을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다.
실제로 스물아홉 되던 해에 국내 미술 대학원 두 곳에 지원했다. 한 곳은 무참하게 떨어졌고 다른 한 곳은 전문과 과정으로 합격했다. 서류전형인 곳에서는 인터뷰 내내 미술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받았고, 시험을 치른 곳은 탈락자가 한 명도 없어서 이건 뭔가 싶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유학을 가서 제대로 공부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났다. 학비가 비싼 미국에서 공부할 방법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미국 약사가 되는 것 밖에 별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미국 약사 면허를 따겠다고 세 가지 시험을 패스하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인턴 약사에 지원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하느라 미국을 세 번이나 다녀 왔다.
결국 미국에 가지 않게 되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미술을 공부하려고 한 이유는 뭘까? 그렇게나 약사라는 일이 하기 싫었던 것일까? 한참 뒤에야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생각해 보면 미술은 내게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변명’ 같은 것이었다. ‘미술을 하지 못해서 내가 불행하구나!’라는 생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면 떠오르곤 했다. 8년 전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다 간 오빠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돈돈’ 하는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제약회사를 퇴사하고 수녀회에 입회했다.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좇는 게 아닌 신에게 봉헌하는 영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난 수녀회를 나왔다. 세상에서 벗어나 깨닫는 삶을 살고자 한 내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문탁네트워크(이후 문탁)에 접속하고 인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문학 공부를 깊이 있게 해서 이쪽에서 길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약사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이 양생(養生)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고 자꾸 나한테 말을 걸었다. 양생이 삶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말로 들리지 않고 자꾸 의료나 치료에 관련된 협소한 범위의 일로 들렸다. 내가 약사라고 이러는구나 싶어 싫었다.
내 공부 내공이 짧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만, 사실 난 약사라는 직업에 흔들릴 때마다 그 직업 속에서 벼르질 못했다. 엄마가 권해서 갖게 된 직업이라며 쉽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바빴고,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이라 아쉬울 땐 돌아갔다. 그래도 먹고사는 업이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히 임했던 것은 최소한의 내 양심이었다.
인문학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성적이 안 좋아서 국어 선생님한테 불려 간 적이 있을 정도로 난 국어를 못했고 또 싫어했다. 특히 고전 문학은 관심 밖이었고 이과생인 내게 이런 무관심은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문과였던 고딩 절친은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다. 반면 나는 학교 공부를 한다며 책과 점점 멀어졌다. 친구와 나의 차이를 문과와 이과의 차이 정도로 여겼다. 내가 책을 멀리하게 된 데에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책벌레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엔 세계문학에서부터 종교, 예술, 정치 서적까지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책들에 내 손때가 묻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2004년이었다. 34살이 된 내가 왜 그 책을 사게 되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우연히 고미숙 선생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사서 읽었다. 의외로 재밌었다. 그때의 일기장을 찾아보니 짧게 책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18세기에 박지원이란 멋진 사람이 살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어쨌건 고미숙 선생님의 책이 지금 생각해보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그녀가 공부하고 있다던 ‘수유 너머’ 연구 공간도 궁금했지만 금방 잊혔다.
2012년 고미숙 선생님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가 출간되자 반가운 마음에 사서 읽었다. 미신이라고 치부했던 명리학엔 음양오행이라는 고래의 동양철학 이론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대학 때 배웠던 한방원리와도 맞닿아 있었다. 또 인문의역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관심이 생겨 다음 해 감이당에서 하는 동의보감 강좌를 들었다. 여름에는 인문학 캠프에 참여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기초를 뗐을 정도였지만 내 사주를 보고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그냥 내가 있었다. 오지랖 넓고, 미술을 좋아하고, 종교에 관심이 깊고, 의료 계통에 직업을 가진 내가 말이다. 내가 상처받은 영혼도, 트라우마 때문에 왜곡된 존재도 아니라니 좋았다. 어떤 사주도 음양오행을 모두 갖출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래서 삶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주는 평등하다는 새로운 관점. 운명애란 주어진 (생)명을 잘 운전해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읽고 쓰면서 공부를 했다
문탁에 합류하고 1년 정도는 일본어 세미나와 동의보감 세미나를 했다. 어느 날 우쿨렐레를 함께 하며 친해진 친구 히말라야가 내게 이제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좀 황당했다. 내가 그간 한 공부들을 다 나열하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그 친구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뭐 그럼 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가장 먼저 열리는 ‘글쓰기 강학원’에 무작정 신청을 했다. 생전 처음 듣는 루쉰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획세미나였다.
첫 시간부터 멘붕이 왔다. 문학하고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책을 반복해서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글이라곤 초딩 때 숙제로 썼던 거나 일기 쓰기가 다인 상태. 첫 시간에 난 세 명에 뽑혔다. 튜터 선생님(문탁샘)이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고른 예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그땐 너무 창피했다. 그다음 시간에도 문탁샘은 세미나가 끝난 후 조용히 나를 불렀다. 친절하게 내 글에 대해 조언해 주었지만 내 눈은 그렁그렁해졌다.
두 번이나 지적을 받고 나자 오기가 생겼다. 최소 세 번 책을 반복해서 읽었고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때는 참고 서적도 더불어 읽었다. 일주일 내내 루쉰 책만 붙들고 있게 되었다. 내 책상 주변으로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일 정도였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 독해력도 부족하고 글도 못썼다. 두 시즌에 걸쳐 공부하는 동안 당시 발간되지 않았던 너댓 권 정도 빼고는 루쉰 전집을 다 읽었다. 시즌을 마무리하는 에세이를 대여섯 장 쓸 때는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사유는 좀 더 치밀해졌고 그럴수록 내 삶을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 강학원을 거치면서 난 새삼 느꼈다. 내가 이제껏 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었구나! 읽고 쓰기라는 ‘공부법’을 배우고 나니 다른 공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다른 기획세미나에 들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공부했다. 그중 스피노자 철학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특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내게 스피노자의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은 충격적이었고 견고했던 나의 종교관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내게 타인은 신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이었고 나는 신에게 선택된 사람이었다. 신에게 선택된 만큼 그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내가 착해지고 특별해져 구원받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원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상호 영향 속에서 그때그때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은 내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존재들 사이에 더 낫고 못나고는 없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들은 완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타인’에 대해 화두를 갖게 되었다. 늘 나와 경계 짓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존재들에 대해서. 이제 나 혼자 잘해서 잘 살 수 있는 건 불가능함을 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능동적인 상태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힘들다고 말한다. 타인들과 공통의 감각을 키울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내 존재적 조건인 외부와의 관계에서 정념도 어쩔 수 없이 생기지만, 정념을 넘어 이성 또는 지혜를 만드는 조건도 다름 아닌 타인과의 관계이다. 타인과 (공)통할 수 있을 때 그 차이도 받아들일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정’이고 지혜이다.
인문약방을 시작하다
요새는 소통을 잘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난 ‘공통’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우정이라는 확장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연인과의 단 둘 간의 사랑이나 가족에 갇힌 사랑만으로는 우린 지혜로워질 수 없다. 문탁에서의 공부는 나밖에 몰랐던 나를 ‘우정’이라는 차원으로 이끌었다. 우정이 자기와 마음 맞는 사람과 만드는 끈끈한 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에 내가 마음을 쓰는 것도 연민보다는 연대라는 우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전혀 공감을 안 하는 것 보다야 마음 아파하는 연민이 좋겠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살펴보려 하고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공통 감각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노력이 모두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걸 이제 알겠다.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그리고 더 큰 공동체로 관점이 확장되고 나니, 자의식이란 좁은 곳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예술가이든 수도자이든 약사이든 큰 상관이 없다. 명리학으로 보아도 이 중 내가 무엇을 하든 다 개연성이 있다. 어쩌면 이것들은 겉보기에 다른 직업군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는 같은 지향을 가지고 다른 분야에서 다른 형태의 일을 하는 것일 뿐일지도. 그래도 약사로 일하면서 그간 내가 쏟아온 시간과 공들이 있고 그렇게 얻은 것들이 있으니 되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달라진 만큼 다른 약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왼쪽부터 새털, 기린, 둥글레
함께 공부하고 있는 친구 새털이 처음 ‘인문약방’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래서 반가웠다. ‘인문약방’에서 무엇을 할지 딱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이 말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생겼다는 게 좋았다. 또 친구들과 함께 먹고 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세 명이다. 새털, 기린, 그리고 나. 하지만 처음 ‘으쌰 으쌰!’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잘 모아지질 않았다. 각자가 방점을 찍는 지점이 다르고 몸이 움직이는 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 셋은 작년 1년 동안 ‘양생 세미나’를 조직하고 특히 몸에 대한 공부를 했다. 서로가 가지고 있던 감각의 차이를 확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슷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올해 ‘인문약방’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문탁 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작년에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인문약방, 호모큐라스를 위한 처방전>이라는 팟캐스트를 하고 있고, ‘양생 프로젝트’라는 기획세미나를 열었다. 난생처음 팟캐스트 대본을 써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글선생 새털은 술술 쓰던데 나는 왜 그렇게 힘들던지. 그래도 대본 회의를 하면서 또 팟캐스트 녹음을 하면서 우리 셋은 좀 더 통하는 사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만큼 ‘인문약방’의 그림에 디테일이 더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양생프로젝트’에서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1, 2, 3, 4권과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공부로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로마시대에는 의학과 철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며 살았고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자기’가 되기 위해 타인을 초대한다. 즉 자기를 수양하기 위해 타인들의 충고와 지혜를 받아들인다. 이 개념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배려’인데, 자기 배려에서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자기 배려, 자기 수양은 종국에 자기를 떠나 훨씬 더 확장된 시야를 갖게 되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과 ‘우정’의 다른 변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더 공부해가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좋은 삶’ 즉 ‘양생’에 대한 담론과 실천들을 만들어보고 싶다.
이제 난 친구들과 함께 ‘인문약방’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인문약방 약사가 되고 싶다. 그간의 공부 덕에 내 직업이 나에겐 ‘로두스’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나를 위해 따로 마련되어 있다거나 하는 건 없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사람들의 변명이고 지금-여기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망상이다. 투닥거리다가도 의기투합하면서 나와 함께 공부하고 활동해 준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여기서’ 뛰고 싶어 졌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1
p.s. 이번 회로 <둥글레의 인문약방>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형편없이 쓴 글에 정성껏 피드백을 해주느라 에너지를 소진하신 <북앤톡>의 요요샘과 새털 그리고 함께 글을 썼던 기린샘, 뚜버기샘! 정말 고맙습니다. 댓글과 피드백으로 제게 사랑을 쏟아주신 샘들, 친구들과 함께 글을 쓰면서 제 직업, 공부 그리고 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0^
글_둥글레(문탁네트워크)
-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 출판사, 29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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