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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슬픔의 치료제를 찾는 사람들

by 북드라망 2020. 10. 5.

슬픔의 치료제를 찾는 사람들

 

 

가끔 지인들이 정신과 치료나 약에 대해 물어온다. 어떤 경우는 꾸준히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고, 어떤 경우는 정신과 약 복용이 너무 섣불러서 심리상담을 권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치료나 약 복용이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런 조언을 하지만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나서는 나도 정신과 질환의 처방을 조제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정신과 처방의 경우 의약분업 예외라서 병원에서 조제해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과 처방이 아니더라도 향정신성 의약품이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은 빈번히 취급한다.) 약국에서 정신과 처방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사람들이 정신적 문제를 약 복용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은 늘었다. 그도 그럴게 요사이 정신 질환에 대한 비호감이 많이 줄었고 정신과 병원도 거리낌 없이 간다. 또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로 약을 먹고 있다고 토로하는 장면도 TV에 심심치 않게 나온다. 




보건 복지부가 실행한 ‘2016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겪는다고 한다. 정신질환의 유병률이 25.4%라니 놀랍다. 그런데 왜 정신적 질병이 늘고 있을까? 확실한 건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이 늘었다. 요새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교 내에서 심리를 상담하고 이상 여부를 체크하는 일이 기본이 되었다. 학생들이고 성인들이고 정신적 문제로 약을 먹거나 상담을 받는 경우가 늘어났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갈수록 개인들의 부담을 늘리고 사회 안정망을 줄이고 있다. 이로 인해 정신적 폐해가 늘고 있다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은 보통 사회 구조적 원인보다 개인의 차원에서 원인을 찾게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다른 어떤 노력보다 전문가를 통해 정신이나 감정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 정신질환에 개방적으로 다가가는 부분은 좋다고 생각한다. 또 조현병처럼 만성적인 정신질환은 약을 먹어서 조절해야 한다. 내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많은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감정들, 특히 우울이나 슬픔이라는 정신의 현상을 그저 폐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들이 우리 삶에 어떤 부분을 비추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낼지 모른 채로 말이다. 

 

 

나의 힐링記


나는 오래도록 스스로를 불안정하다고 생각해 왔다. 과거로부터 온 여러 트라우마가 나의 현재를 왜곡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베인 종교적 도그마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부추겼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면 바로 죄의식에 빠져서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정신과를 가야 한다거나 심리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종교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요즘 분위기라면 약으로 고치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톨릭 단체 중에는 심리학에 기반한 치유 프로그램을 하는 곳이 많다. 어떤 수녀원에서 주최한 피정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강의를 듣고 각자의 애니어그램을 알아보았다. 애니어그램을 알아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자는 취지였다. 그때 들었던 칼 융에 대한 강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신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주변의 상처들로 인해 신을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상처들을 치유하고 진정한 내가 돼야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강의의 내용을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당시 심리학이라는 오묘한 학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진정한 나를 찾길 원했다. 아무튼 내가 3 유형 이랬는데, 그 유형이 진정한 나 같지는 않았고 또 유형을 알았다고 당장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다음에 참여한 프로그램에는 MBTI를 알아보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검사할 때마다 두 가지 성향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ENTP와 ENFP. 그때는 둘 중 하나가 맞는데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건가 싶었고 어쨌건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안달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이 결과는 잊혔다. 난 사람들을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는 일에 관심을 끊었고 신앙심을 키워갔다. 신앙심에는 어떤 예리한 분석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이후에도 종교적 베이스가 아닌 여러 힐링 프로그램들을 기웃거리면서 알게 된 건 모든 문제는 내 감정이 억압되어서 생겼다는 환원적인 결론이었다. 또 각종 힐링 프로그램에서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심리치료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자격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해서 심리검사를 반나절에 걸쳐서 받았다. 결과는 ‘상담 필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든 심리검사를 통과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어쨌건 난 7개월 정도의 긴 상담을 했고 내가 늘 원인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 그야말로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점에 있어서 이 상담은 내게 유용했다. 사실 심리상담은 오랜 시간을 들여 나를 비난하지 않는 누군가와 자신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다. 남의 도움을 빌어 비로소 깊게 (또는 상상적이지 않게) 나에 대해 생각해본 건 아닐까 싶다. 

 

 

슬픔과 기쁨의 실존


종교 안에서 그리고 심리상담 등 소위 ‘힐링판’이란 곳을 전전하면서 내가 바랐던 것은 불안, 슬픔, 우울, 분노 등 슬픔 계열의 감정들을 없애고 원래 나를 찾는 것이었다. 이런 감정들은 내 정신의 역량뿐 아니라 신체의 역량까지도 떨어뜨린다. 당연히 슬픔 계열의 감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 질병이 피할 수 없는 일이듯 “침울한 감정이나 과거에 겪었던 정신적 충격 등은 필연적인 인간의 조건이다”.[각주:1] 이런 감정도 비정상이 아니듯 이런 감정에 휩싸였다고 해서 내가 비정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슬픈 계열이건 기쁜 계열이건 어떤 감정도 우리에겐 당연하다. 제 아무리 성인(聖人)들이라 하더라도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뿐. 원치 않는다고 슬픔의 감정을 인생에서 들어낼 수 없고 원한다고 언제든 마음먹는 대로 기쁨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밝은 감정, 흥분된 표현, 과장된 리액션만을 원하는 것 같다. 기쁨이 정상이고 슬픔은 폐기되어야 할 비정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원하는 기쁨의 강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TV의 예능에는 ‘하이 텐션’을 뿜어내는 연예인이 아니라면 자리 붙일 수 없을 정도이다. 사회생활에서도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내는 사람들이 유리하다. 


나 또한 기쁨에서 늘 동력을 얻었다. 기쁨이 동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기쁨이라는 것도 다양한 정도와 다양한 색깔이 있을 것이다. 나는 흔히 ‘기분이 좋아 죽겠다’ 정도의 흥분상태가 아니면 기쁨이라고 못 느꼈다. 이는 나만의 일은 아닌듯하다. 웬만큼 기뻐서는 간에 기별도 안 가고 조금만 슬퍼도 큰 문제가 된다. 


성과를 내야 하는 주체[각주:2]가 되어버린 우리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스트레스에 더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스트레스를 더 만든다.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현대인에게 일상이다. 스트레스가 기분 개선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고갈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 말초와 중추신경계에서 염증성 사이토카인의 분비가 늘어나고 이 사이토카인이 세로토닌을 고갈시킨다는 메커니즘이다.


스트레스 상황이라면 당연히 기쁨의 강도에 대한 요구량이 커진다. 상대적으로 슬픔에 대한 역치는 떨어진다. 웬만큼 기쁘지 않고서야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고 슬퍼질까 봐 두려워지고 불안해진다. 이로써 감정이라는 상상에 우리가 쏟아야 할 에너지는 날로 늘어나고 삶이라는 실존 자체가 왜곡된다.

 

 

정신질환 권하는 사회


스트레스 말고라도 어떤 이유에서건 기분은 다운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세로토닌, 도파민 등의 기분을 좋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몸에서 줄어든다. 다운된 기분을 올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경전달물질을 몸에 넣어주거나 몸에서 더 많이 생산되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쪽이 바로 현대 정신의학이다. 정신과는 주로 중추신경계 즉 뇌에 작용하는 약물을 복용케 함으로써 정신질환을 치료하려 한다. 다른 한쪽에는 심리상담이 있다. 심리상담은 약을 주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대화를 한다. 그리고 양쪽 다 물론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다. 없었다면 그 상품성이 지금처럼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약 한 알을 먹어서 우울한 기분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내가 우울증일까? 아니 더 근본적으로 내가 슬픔에 빠졌다고, 불행하다고 느낀다고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친구와 고민에 대해 얘기한 후 기분이 나아진 것과 심리상담사와 얘기한 후 기분이 나아진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정신의학은 자연과학이고 심리학은 인문학이라는데 다른 두 분야의 다른 치료법은 정신질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신질환의 진단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데 <DSM;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이 널리 사용된다. DSM은 1952년 이래로 계속 개정을 거처 5 개정판이 2013년에 나왔다. 이 최신판이 ‘진단 인플레이션’과 ‘의료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4 개정판 집필 책임자인 알렌 프랜시스는 비판했다고 한다. 또 DSM의 진단 기준이 절대적이라 할 수도 없다. 해석에 여지가 있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정신질환의 정의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성애는 3 개정판이 나왔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정체감 장애의 하나로 분류되었으나 1994년에 나온 4 개정판에서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게 되었다. 멜 슈워츠라는 심리학자는 한 심리학 전문 잡지 블로그에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이라는 정상적인 경험들이 지금은 기능 이상의 프리즘을 통해 관찰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모든 시련과 고통에는 진단명이 꼬리표처럼 붙고, 우리는 희생자 집단이 되어간다. 막연한 불안감과 인간다움의 병리화에 희생되어가는 것이다.”[각주:3]

 

‘정신의 병’이라는 정의는 점점 넓어지면서 인간의 다양한 실존들이 거기에 욱여넣어지고 있는 것 같다. 정신과 약물들도 많이 개발되어 그만큼의 수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약들을 자동차나 전기주전자처럼 단지 문명의 이기로 생각하고 편의적으로 다가가도 되는 것일까?




 

슬픔을 품은 삶의 진실들


나는 불안, 슬픔, 우울에 빠져있는 ‘나’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감정을 훌훌 털고 기쁨과 의욕에 찬 진정한 내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망상이다. 어떤 감정에 처해있든 나는 나인데. 다만 그런 ‘나’의 생각과 행동이 시절 인연에 따라 다양한 의미 또는 진실을 만들 뿐이다. 정해진 ‘나’라는 건 없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나 또한 변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정해진 나라는 것을 찾지 않게 된 것은 인문학을 공부하면서부터이다. 인문학 공부는 자뻑과 자기 비하의 극과 극을 오가는 상상적인 자아 비대가 아닌 해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도록 했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딱딱해진 자아를 부수고 나면 또다시 굳어진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또 인문학 공부만이 유효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많은 힐링 경험 끝에 다다른 인문학 공부가 내겐 도움이 되었다.


사주명리학을 통해서 운명애를 배웠고, 사회뿐 아니라 사회의 일부인 자신과도 처절히 싸우는 루쉰을 닮고 싶었고, 마르크스를 통해서 돈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로부터는 감정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필연성임을, 그리고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혼자가 아닌 우정의 힘(또는 공동체의 공통 감각)이 필요함을 배웠다. 올해는 푸코 공부를 시작했다. 

 

프로작 한 알이면 금방 기분이 나아질 텐데 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공부를 하니?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프로작의 수많은 부작용은 차치하고라도, 화학물질에 내 기분을 맡기고 싶지 않노라고 답하고 싶다. 무엇보다 슬픔 계열의 감정들을 없애는 것이 치료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약으로 이런 감정들이 없어진다면 나는 그때 그 슬픔이 품은 진실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또 슬픔의 진실들을 외면하는데 어찌 기쁨의 진실들을 만날까? 순서가 바뀐 거다. 슬픔이나 우울 때문에 삶이 비참해진 게 아니다. 삶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슬픔과 우울이 있는 거다.


이제 나에게 ‘공부한다’는 말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공부가 내 삶과 만나 생산한 다양한 나의 진실을 만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슬픔, 우울, 불행을 품은 삶의 의미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부’이다. 그런 진실 또는 의미를 만날 때 작은 깨달음이지만 기쁘다. 나는 공부가 만들어낸 여러 스펙트럼의 기쁨을 느끼고 싶다. 잔잔한 기쁨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P.S. 나의 힐링기는 실은 더 길다. 북미 인디언이 직접 와서 진행했던 정화 의례에 제주도까지 가서 참석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외국인이 전생과 영혼의 상태를 본다길래 친구 집에 냅다 갔다. 또 레이키라는 기치료 비슷한 것도 배웠다. 한 신부님과 꿈 해석도 진행했고 유명 심리학자와 집단 꿈 투사 작업도 했다. 예수회 신부님과 수녀님으로부터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장시간에 걸쳐 배웠다. 종교 때문에 끝까지 망설이다 타로도 배웠다. 이런 경험들이 다 나름 의미는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난 손쉽게 나의 실존을 폐기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미신적인 마음으로 임했던 힐링 경험도 많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스스로 삶의 진실들을 찾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사실 누구나 조금씩은 이런 노력을 하며 산다. 어쨌건 지금 나에겐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활동하며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그 무엇보다 의미 있다. 친구들과 싸울 때, 서로 속상할 때 포함해서.


글_둥글레(문탁네트워크)

  1. 수잔 손택, 이재원 옮김, 『은유로서의 질병』 79쪽, 이후, 2002. [본문으로]
  2. 한병철은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서 후기 근대인을 성과주의 사회에 스스로를 착취하여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있는 성과주체라고 명명했다. 스스로 성과주체가 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는 타인의 착취보다는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더 많을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에릭 메이젤, 강순이 옮김, 『가짜 우울, 우울을 권하는 사회, 일상 의미화 전략』, 2012, 마음산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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