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배려와 사랑
토요일이면 둘째 아이 손을 잡고 조그만 산에 가는 것이 언제나 내게 큰 낙이다. 특히 산길이 도서관 뒷마당과 연결되어 있어서, 도서관 가는 산책 코스로도 일품이다. 물론 도서관에 갈 거라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그러면 산책하는 기분도 안 들고, 무엇보다 아들 녀석과의 정다움을 버스 유리창 풍경에 빼앗기는 것 같아, 되도록 이 길을 택하게 된다. 비탈길에선 내가 뒤에서 잡아주고, 바위가 나오면 내가 안아서 넘어간다. 평평한 길이 나오면 손을 잡고, 도란도란 그간 못 다한 얘기도 나눌 수 있다. 이러다 보면 가슴에 애틋함은 한껏 커져서,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곤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뭔가 나눠주고 싶다니. 그래서 아내는 공부에서부터 밥 먹는 것까지 아이 하는 모든 것을 시시콜콜 챙겨주게 되었나 싶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이보다 사람을 사랑했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 나 같은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나로선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이의 미래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쩐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엄마가 뭘 같이 해주지 않으면 아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심지어 친구들과 무리지어 노는 것도 엄마들끼리 모여서 가야만 했다. 이렇게 했다가는 애 평생 자기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다 엄마나 아빠에게 의존할까 두렵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게 요즘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두고 보기엔 정말 곤란한 일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 순간, 우리가 공범인 것 같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우리들이 너무 사랑하니까 아이가 망가진다는 기묘한 결과를 갖는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라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의 대상이 무너지고 만다는 이런 아이러니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알키비아데스, 사랑이 떠나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 그리스에는 알키비아데스라는 호남이 있었다. 외모가 출중해서 어릴 적에는 잘생긴 외모로 아테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부인네들을 독수공방하게 만들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리스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해 남편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친구는 당대의 대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의 명성과 부를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또 그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포테이다이아(Poteidaia)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플라톤의 『향연』에 전해진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구출하는 장면(『향연』 220e)이 나오는 걸 보면, 그만큼 아주 끈끈한 사이였을 것으로 쉽게 짐작이 된다.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례했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난 후로는 그를 따르고 그의 철학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술에 취해 수줍은 고백을 하기도 한다.
이런 알키비아데스를 소크라테스는 깊이 사랑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태도는 다른 구애자들과 달리 묘한 것이었다. 숱한 이들이 알키비아데스와 육체적 사랑을 갈망할 때, 성인이 되기 전까지-사실 소년애는 성인이 되기 전에 끝나므로 사실상 통상적인 사랑의 전 기간-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 성인남자의 소년애를 광범위하게 인정했던 당시 사회통념으로 볼 때 그것은 아주 반시대적인 감각이었다. 그런데 더욱 묘한 것은 이제 알키비아데스가 18세가 되어 육체적 매력이 사라지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18세가 되자, 그러니까 숱한 구애자들이 떠날 시기가 되자, 비로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딱하군 그래, 알키비아데스, 이게 무슨 꼴인가! 내가 그것을 딱히 뭐라고 부르긴 주저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말해야겠네. 잘난 친구야, 우리의 논의도 자네를 탓하고 자네 자신도 자기를 탓하고 있듯이, 자네는 무지를,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무지를 끼고 살고 있는 셈이네. 그러니까 자네는 교육도 받기 전에 정치에 달려든 셈이지. 그런데 자네만 이런 꼴인 게 아니라, 나랏일을 행하는 이들 가운데 대다수 역시 그런 꼴이라네. 아마도 자네 후견인인 펠리클레스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말일세.”(플라톤,『알키비아데스1』 118b)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만일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작정이라면, 라케다이몬이나 페르시아의 왕들 정도는 경쟁상대로 보아야 하지만, 지금 알키비아데스의 상태로는 메추라기 놀이에 능한 메이디아스나 그 같은 사람들, 즉 하찮은 경쟁상대 정도에나 맞는 상태일 뿐이라고 핀잔을 준다. 고작 그런 정도의 경쟁을 하려한다면, 배워야 할 일을 배울 필요도 없고, 단련이 필요한 일을 단련할 필요도 없다고 몰아세운다. 상황이 이런데 그런 사람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당사자에게나, 이 나라에게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왼쪽) 알키비아데스, (오른쪽) 소크라테스
_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젊은이였다.
그렇다면, 페르시아나 라케다이몬 왕들 수준의 경쟁상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테면 체력, 지식 같은 현실적으로 유용한 역량을 계속 불려가기만 하면 되는가? 분명히 산술적으로만 가늠한다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역량 수준을 다른 층위에서 판단하고 있었다. 만일 통념적인 역량을 기준으로 알키비아데스를 그들과 비교하고 있었다면 아주 기만적인 일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좋은 교육 덕분에 현재의 알키비아데스도 체력이나 지식 면에서는 이미 충분히 높은 수준의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더군다나 페리클레스라는 막강한 후견인까지 배경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가시적인 역량만 키우면 될 일이었으면, 애초부터 알키비아데스를 애송이로 취급했던 소크라테스의 평가가 잘못임이 틀림없다.
그럼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육체가 시들어서 다른 사람이 떠나더라도 곁에 남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육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구애자들의 사랑은 육체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남들이 다 떠난 18세의 알키비아데스에게 남아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관계를 성적인 교제(synousia)가 아니라 지성적 교제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알키비아데스에게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아무튼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자기들을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자신보다 적들의 부인들이 더 나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속 편한 친구,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적수는 이들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니 말일세. 돌봄과 기술(앎)이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걸세. 이것들을 결여한다면,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든 이방인들 사이에서든 자네가 명성을 얻는 일 역시 결여하게 될 걸세.”(플라톤,『알키비아데스1』 124a~b)
사실 알키비아데스로선 육체의 아름다움이 시들고, 자신의 효용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래서 주변의 숱한 구애자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보는 것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불안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런 불안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관계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즉 육체적 사랑의 관계를 우애(필리아)의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육체적 사랑이 보여주는 관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육체적 사랑의 관계 속에는 성인 남자와 소년이라는 신분상 불균형이 내포되어 있었다. 소년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성인남자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이런 불균형은 제거될 기회를 얻게 되지만 육체의 아름다움이 시들기 때문에 구애자들은 다 떠나고 소년은 홀로 남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년애는 매우 역설적이다. 소년은 소년애 속에 내포되어 있는 그 불균형 관계를 통해, 상대방(성인남자)이 보여주는 사랑의 행위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겨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순간이 되자, 그에게 과거 사랑의 시간이 얼마나 문제인지가 비로소 드러난다. 다르게 살았어야 했던 것이다. ‘사랑의 시간 동안 그저 주어진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랑받는 사람도 뭔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도 뭔가를 함께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게 되는 것이다. 홀로 있게 되자마자 지금까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숭배와 찬탄 때문에 감추어져 있었던 질문들이 솟아오른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예리하게 되묻는다. “당신은 자신을 돌볼 수 있는가?”
파이드로스, 새로운 사랑에 눈뜨다
이런 문제는 특히 『파이드로스』에서 정면으로 다루어진다. 뤼시아스는 파이드로스를 유혹하려는 가상의 구애자다. 그는 기발하게도 연설문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라스테 éraste)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227c)라고 말하며, 파이드로스를 유혹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자신들이 입은 손해(blabē)를 따지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른바 사랑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애인을 얻는 순간, 이해득실을 따져서 옛 애인을 헌신처럼 내버릴 것이 뻔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한데, 그들은 소유욕에서 비롯된 질투심 때문에 자신의 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그를 외톨이로 만들 수도 있다. 어쩌면 애인(사랑 받는 사람=에로메네 éromène)이 슬기롭게 처신하려고 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불화에 빠져 들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슬기로워지면 사랑하는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욕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뤼시아스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지독히 노예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기만적인 결론을 도출해 버린다.
이런 어이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 대단히 계산적이기 때문이다. 이 구애자는 파이드로스의 육체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아주 지능적인 쾌락주의자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열거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어 사랑받는 사람(애인, 소년)으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하도록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접근법으로는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사랑과 진실의 문제를 제기한다.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큰 호의를 베풀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한 사람은 미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참말(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네(out esti etumos logos). 그 이유는 이렇지. 만일 광기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면, 그 말이 옳을 걸세. 하지만 광기, 즉 신의 선물로 제공되는 광기 덕분에 우리에겐 좋은 것들 가운데 가장 큰 것들이 생겨난다네.”(플라톤, 『파이드로스』 244a)
광기에 대한 뜻밖의 예찬으로 시작한 소크라테스의 사랑 연설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천상의 이데아로 향하기 위한 하나의 여행이다. 말하자면 이 여행은 생존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이데아들을 관조하기 위한 경쟁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천상을 여행하는 것은 그리 순탄치 않다. 사실상 이 여행은 일종의 전투와도 같다.
영혼은 속세에 있는 아름다움(kallos)을 보면, 전생에 보았던 참된 실재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실재에 대한 기억으로 날개 잃은 영혼에도 다시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체험하면, 이데아계에 대한 상기와 이데아계로의 영혼의 상승을 낳는 힘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아름다움[천상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사랑의 대상[사랑받는 사람]이다. 이런 대상을 보고 나면, 사랑의 대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유출되는 흐름(aporroē)을 받아들이게 되어 예전에 꺾여서 없어져 버렸던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인 아이를 보고 자신을 ‘히메로스’[아름다움에서 유출되는 것]에 흠뻑 적시고 나면, 한순간 어떤 것과도 비할 바 없는 달콤한 쾌락을 선사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감정 자체를 보고 ‘에로스(ērōs)’, 즉 ‘날개 달린 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것은 ‘프테로스(ptērōs)’ 즉 ‘날개 달아주는 신’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기묘한 말장난이다. 즉 사랑은 진리로 이끌어 가는 하나의 중개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이 진리로 다가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영혼과 영혼 사이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사랑하는 사람)가 시간을 들여 이런 일을 하면서 운동 경기장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교제 가운데 신체적인 접촉을 하면서 그와 가까이하면, 제우스가 가뉘메데스를 사랑할 때 ”히메로스“라고 이름붙인 그 흐름의 원천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옮겨가, 그 중 일부는 그 자신에게 스며들고, 일부는 그에게 가득 차 밖으로 넘쳐흐르지. 그리고 마치 바람이나 메아리가 매끈하고 딱딱한 표면에 부딪혀 그것이 생겨난 데로 되돌아가듯, 그 아름다움의 흐름은 다시 아름다운 자에게 되돌아가, 영혼에 이르는 입구인 그의 눈을 통과한 뒤 영혼에 이르러 날개의 출구들을 들어올리고 그것들을 부풀려 날개가 자라게 하고 사랑받는 이의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네.”(플라톤, 『파이드로스』 255c~d)
"'에로스'라는 그리스어는 '사랑'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욕망'으로 번역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사이먼 골드힐,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예경, 56쪽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행위 문제를 사랑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시켜 버린 셈이다.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란 무엇인가의 문제 말이다. 앞에서 뤼시아스의 접근법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런 저런 사랑의 해악을 들어 사랑 자체를 거짓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사랑 그 자체를 기만적으로 대하게 만들었다. 이미 여기에는 상대를 굴복시키고자하는 뤼시아스의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받는 행위, 즉 교환행위로서의 사랑에만 논의를 집중시키며 사랑 그 자체의 의미를 은폐하거나 기만해버린다. 뤼시아스 식으로는 절대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도달하려는 진정한 사랑[혼에 대한 사랑]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문제 자체를 뒤집어, 사랑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사랑은 아름다움을 체험하도록 하여 영혼이 이데아로 상승하도록 돕는 조력자이다. 이것은 앞서서 소크라테스가 말장난을 했던 바로, 그 ‘프테로스(ptērōs)’이다. 즉 이데아로 날아 올라가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신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은 ~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행위)를 강요하기보다, ‘사랑은 ~이다’를 규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랑은 진리의 문제라는 것을 밝혀내고, 그 정의로부터 가치의 혼란[‘사랑의 행위들(교환행위들)’에 따른 논란]을 미연에 막는다. 교환의 논리에 노예적으로 반응해야 했던 그전 상황과 달리, 이제 사랑은 ‘이데아를 향한 여행’으로서 새로운 기반을 얻는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사이의 불균형, 즉 능동적인 자와 수동적인 자라는 불균형이 일시에 해소된다. 원래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사랑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받는 자인 소년에게 어떤 보상(antéros)을 요구하는데, 사랑받는 사람들은 이것을 수동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뤼시아스처럼 사랑은 어떠해야 한다는 ‘행위와 행위의 교환’에만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소년이 보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사랑과 보상은 서로 해소되지 않는다. 즉 교환은 사랑에서조차 불균형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실과 관련되자마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로의 사랑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결국 두 사람 모두 진실에 도달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제 사랑은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되고,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가 진리의 입장에서 동등한 위치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한쪽이라도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건 묘한 진실게임 같은 것이다. 진실을 둘러싼 사랑의 게임! 이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변형된 사랑의 혁명과도 같다.
사랑은 진실을 둘러싼 게임이다
사랑을 하나의 게임으로 이해하고 행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행위 간 교환(보상)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삶 자체를 진실을 향한 게임으로 이해해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게임은 전투에 가까운 사건일지 모르겠다. 이 진실게임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에픽테투스의 다음 말을 징검다리 삼아보자.
“너는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무언가가 돌아다니다가 너의 자리에 올 때, 손을 뻗어서 적절한 몫을 취하라. 그것이 지나가는가. 붙들지 말라. 아직 오지 않았는가, 그것을 향해서 너의 욕구를 내놓지 말라. 하지만 너의 자리에 올때까지 기다리라. 너의 아이에 대해서도, 마누라에 대해서도, 지위에 대해서도, 부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하라. 그러다보면 너는 언젠가 신들의 연회에 함께할 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네 앞에 놓았을 때조차도 이런 것들을 취하지 않고 경멸한다면, 그때에는 신들의 연회를 함께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과 함께 지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디오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또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마땅히 신들과 같이 되었고 또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에픽테투스, 『엥케이리디온』 제15장)
에픽테투스에게 삶의 마당은 하나의 연회다. 사람은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와 같다. 만일 작가가 있어서, 나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에픽테투스, 『엥케이리디온』 제17장) 이 연회에서 어떤 구실을 하라는 것은 주어지는 것으로서 나에게 달려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주어진 구실을 잘 연기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를 숙명론적인 역할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연회에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이 하나의 가면일 뿐이라는 것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에픽테투스가 요청하고 있는 것은 각각의 주체들로 하여금 고정된 다른 주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헛되이 욕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그것들을 헛되게 자신의 권력아래 두려고 욕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에 대해서도, 마누라에 대해서도, 그리고 심지어 지위나 부에 대해서도 하나의 가면에 불과할 뿐인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으라는 점이다. 이런 가면의 가면됨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때,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자신 앞에 놓았을 때조차도 취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른바 ‘신들의 연회’를 함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과 함께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지배해야 세계를 지배한다! 사실 알키비아데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연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인의 철학이 필요하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나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확보해주거나 또는 없애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각자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되고자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들의 어떤 것도 원하지도 또한 회피하지도 말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에픽테투스, 『엥케이리디온』 제14장)
이 연회에서 가면을 실재로 보고, 진실을 허상으로 보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에 달려 있는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질병은 자신에 달려 있지 않다. 자연으로부터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심지어 육체도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주어진 것이다. 내 몸조차 내 것이 아니다. 재산, 평판, 지위 등등 그것들은 더더욱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쩌다 보니 나에게 가까이 있게 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언제든지 달아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욕망한다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욕망한 꼴이니,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 충동(선택), 욕구, 혐오 같은 것들은 나에게 달려 있다. 이것들은 자유롭고, 훼방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다. 반면 나에게 달려 있지 않는 것들은 노예적이고, 무력하다.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최고의 미덕인 자제심은, 남성이 자신의 아내, 몸, 욕망, 가족을 통제함을 의미한다.
결국 연회에서 성공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들을 잘 다스리고 훈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믿음을 잘 다듬고, 충동을 잘 조절하고, 욕구를 탁월한 곳으로 방향잡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했던 말,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란 이렇게 자기에게 진정으로 달려 있는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에픽테투스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영혼을 마차와 연결해 설명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영혼은 한 쌍의 날개 달린 말들과 마부가 합쳐진 능력과 같다. 말들 가운데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며, 나쁜 말은 마부에게 어려운 수고를 안겨준다. 영혼은 높이 날아올라 이데아로의 상승을 시도하는데, 날개가 있는 완전한 상태에서는 높이 날아오르지만, 날개를 잃으면 무언가 단단한 것(아마도 ‘지상’)에 도달할 때까지 추락해 흙으로 된 육체(sōma)를 취해 거기 거주한다. 만일 무절제한 말이 거듭 승리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채찍과 몰이막대에도 불구하고 날뛰면서 마차를 아이 앞으로 끌고 가 육체적인 쾌락을 얻으려 한다. 아마도 그는 쾌락이 사랑인줄 알고 몸을 맡길 것이다. 결국 그는 그것 때문에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 위험함 싸움에서 다른 부분 즉 좋은 말이 이기면 마부는 육체적인 쾌락에의 탐닉을 넘어 천상의 세계[진리]를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다시 얻는다.
“정신의 더 뛰어난 부분들이 이겨서 그들을 질서 있는 생활 태도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면, 그들은 이곳의 삶을 복되고 조화 있게 살아가네.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절도를 지키면서 영혼의 열등함을 낳는 것을 노예로 삼고 탁월함을 낳는 것에 자유를 허락하지. 그리고 삶이 끝나면, 날개를 달고 가벼워진 상태로 진짜 올림피아 경기의 세 판 중 한 판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인간적인 분별이나 신적인 광기 가운데 어느 것도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람에게 베풀어 줄 수 없다네.”(플라톤,『파이드로스』 256a~b)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사이의 사랑이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됨으로써 비로소 두 사람 모두 날개를 다시 얻고 영혼의 상승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데아 전략’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통념적인 분할을 해소(혹은 통일)시키고, 오로지 진실에 의한, 진실을 위한, 진실의 사랑을 발명해 내었다.
이런 사랑의 논리는 에픽테투스의 연회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에로스는 이 연회를 주최한 자일 것이다. 에로스는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준다. 표면적으로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할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가면일 뿐이다. 가면을 가면으로서 이해하고, 주어진 가면 역할을 즐길 수 있다면, 상대방의 가면을 탐할 이유가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다른 가면을 자신의 가면 아래로 복종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기에게 달려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그것들을 빼앗더라도 자신의 가면이 우월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연회를 망칠 위험만 있을 뿐이다. 진실은 그만큼 더 멀어진다. 그러나 믿음, 욕망, 충동 같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다르다. 끊임없이 가면들의 연회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욕망들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연회는 ‘신들의 연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 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이 게임을 끊임없이 진행하게 된다. 이 연회에서의 승리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모두가 진리로 가는 날개를 얻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 또한 자기배려의 한 형태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고투, 진실을 향한 여행인 셈이다. 그것은 애인 앞에서 자기를 돌볼 수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아주 묘한 진실의 게임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차례 올바로 바라보면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여기까지 인도된 자라면 이제 에로스 관련 일들의 끝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입니다." (『향연』210a)
이제 다시 아이에게로 돌아가 본다. 나도, 아내도 진리에 대한 여행 속에서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나 자신조차 진리의 여행에 들어서지 않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가 아이를 대면하면서 느꼈던 애틋한 감정은, 설사 그것이 안아주고, 도와주고, 이끌어주고 싶은 마음일지라도 ‘사랑’이라 해선 안 될 것 같다.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차라리 다른 가면들에 대한 노예적인 욕망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이가 나만을 사랑하고 복종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솟아나온 감정이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순간 나는 이제 사랑을 못하는, 또 아이와 똑같이 나조차 돌보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어 버린 암담한 느낌이다.
하지만 또 우리는 이미 진실 앞에서 경기를 함께 즐기고 있는 동등한 상대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아이 또한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우리들의 연회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분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진실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아이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아이 뒤에서, 아이를 통해서 진실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라는 묘한 느낌이 솟아났다. 나는 통념적인 사랑이 끝난 곳에서야, 비로소 나의 새로운 사랑이 움트는 것을 본다. 이제 아이에게 가서 나를 도와 달라 말해야겠다. 산길을 걸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이제 아이에게 길을 물어야겠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의 아이는 능동적 주체로서 앞에 서서 모험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_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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